스피노자
유덕한 사람은 자유롭다
[죽음을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자유인은 자살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여러 속성이 변용인 양태는 무한히 더 큰 다른 양태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는 예기치 않은 죽음에 직면할 수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 자기 신체의 중단없는 변용의 길을 끊을 수도 있다.
스티븐 내들러는 앞 장에서 자유인이건, 자유인을 목표로 하는 무지자이건 결코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거짓말로 보존될 것은 자유인에게는 설사 자신의 육신이더라 해도 큰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육신의 무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경우, 그가 동원하게 되는 모든 관념과 정서는 결국 신체 변용에 대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체가 없으면, 인간 그 자신의 사유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자유인은 최대한 자신의 코나투스 즉 존재의 본성을 지속시키도록 노력하는 일이 최고의 실천 미션이 된다.
하지만 때로는 네로와 같은 폭군을 만날 수도 있고, 아메리카의 백인들처럼 어리석게 타인을 압제하는 무리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할 때에 자유인은 어떻게 하는가? 타인에 의해 명령된 자신의 소멸을 수행하는가?
스티븐 내들러는 이러한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의 포인트는 ‘코나투스’에 있다고 본다. 자기 보존이라는 코나투스의 원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내들러에 따르면, 이때에도 자유인에게 자기 육신의 보존이 최종 목적은 될 수 없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보존’이 아니라 영원하고 무한하며 절대적인 신 즉 자연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계속 존재하는 일이지,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현상 유지는 아니다. 자유인의 사고는 늘 1종 인식이라는 개인적 통념과 이미지로부터의 이행이므로, 일단 자유인은 늘 자기 육신의 안위보다는 공동체와 나아가 자연 전체의 필연적 존재함에 따라 자기 행동을 결정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육신의 진행은 멈추더라도(작은 악), 더 많은 존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더 큰 선)을 열 수 있다면 그는 자살로 보이는 일을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따라서 코나투스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존재는, 인간의 경우 평행론에 따라 사유 속성의 변용인 정신과 연장 속성의 변용인 신체가 평행적으로 함께 작동한다. 그런데 물리적 신체는 그 존재함을 중단하지만 정신은 다르다. 신의 사유 속성의 변용인, 그의 정신이 산출하는 관념은 영원히 신 즉 자연 전체 사유 속성의 운동 장에서 변용을 거듭하며 보존된다. 따라서 그의 육신은 죽지만 그의 정신은 소멸하지 않는다.
스티븐 내들러는 9장에서 세네카를 스피노자의 자살론의 좋은 예로 제시한다. 그런데 늘 덕을 추구했던 이 스토아학파의 철학자가 현자라서 모델로 삼는 것은 아니다. 내들러는 스스로 팔을 자르면서도 슬퍼하는 아내에 의해 마음이 흔들릴까 걱정했던 이 이성적 존재의 최후를, 특히 그가 친구들에게 구술로서 책을 받아 쓰게 한 장면으로 설명한다. 어떤 죽음이 오더라도, 중단 없이 생각을 계속해나가는 자에게 자유가 있다. 세네카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초래하지 않으면 더 큰 악이 사회에 만들어질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이해와 별도로 자기 정신의 활동이 멈추기 전까지 친구들과 나누고 싶은 지혜가 있었다. 그는 육신의 고통을 최후까지 감내하면서 생각하기를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스피노자도, 내들러도,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과제란 궁극에 이를 때까지 생각하는 것임을 말한다. 당신은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가? 언제까지 생각할 수 있는가? 사유의 무게가 무겁고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자기 죽음 앞에서도 멈출 수 없는 존재의 숙명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