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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답사 자료집] 나라 –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 (天理市石上神宮)

작성자
진진
작성일
2025-05-08 22:58
조회
37

일본철학답사 자료집 / 天理市石上神宮 / 2025.05.08. / 진진

 

나라 /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 (天理市石上神宮)

 

1. 지도, 지형 및 지세

1) 지도

일본 간사이 지역 지도

 

나라현(奈良県), 나라시(奈良市)

2) 지형 및 지세

나라현은 일본 긴키 지방의 내륙에 있는 현이며, 현청 소재지는 나라시(奈良市). 현재의 나라현은 1887년에 오사카부로부터 독립해 탄생했다. 역사적으로 나라현은 야마토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라시는 8세기에 헤이조쿄(平城京)가 자리 잡았던 고도로, 나라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인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역사 도시이다.

 

나라현

나라현은 대부분이 산과 숲으로, 거주 가능 지역은 851에 불과해 47개 도도부현 중 가장 작다. 지질학적으로 나라현은 요시노강을 따라 현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중앙구조선에 의해 이등분된다. 구조선 북쪽에 있는 현 북서쪽의 이코마 산지는 오사카부와의 경계를 형성하고 동쪽에는 나라 분지가 펼쳐져 있어, 나라현 인구의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다. 더 동쪽의 가사기 산지는 야마토 고원과 분지를 분리한다. 구조선 남쪽에는 기이 산지가 있고 현 면적의 60%를 차지한다. 오미네 산맥은 기이 산지의 중심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양쪽으로 가파른 계곡을 형성한다. 나라현과 긴키 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핫코산(1915)이 이 산맥에 있다. 나라현과 와카야마현을 분리하는 오바코 산맥은 1300m의 높이이다. 동쪽으로 다이코 산맥을 통해 미에현과 접하고 1695m의 오다이가하라산을 포함한다. 이 광대한 산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로 등록되었다.

 

나라시

나라시는 나라 시대에 헤이조쿄가 세워졌던 고대 일본의 수도이며, 실크로드의 종착점으로서 덴표 문화를 꽃피웠던 땅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나라시는 나라현의 북부 일대를 차지한 도시로 나라 분지의 북단에 해당한다. 시의 북쪽은 고대에 나라야마(平城山)로 불렸던 구릉 지대로 교토부와 접하는데, 나라야마를 넘어서 야마시로국과 이어지는 나라자카(奈良坂)는 예로부터 일본의 주요 교통로 중 하나였다.

도시는 남북으로 22.22km, 동서로 33.51km에 걸쳐 뻗어 있어 남북보다는 동서로 조금 더 넓다. 동부의 산간지,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국제적인 관광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중동부의 시가지 일대, 오사카의 위성도시로서 택지 개발이 이루어진 서부 등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어 같은 나라시 안에서도 거리 분위기나 주민들의 의식은 차이가 있다.

200541일의 행정구역 합병으로 쓰게촌과 쓰키가세촌을 편입해 현재의 경계는 동쪽으로 야마토 고원, 미에현과도 접하며 표고 300m에서 600m에 이르는 고지가 이어진다. 총 면적은 276.84km2이다.

 

2. 역사

 

일본의 역사 日本史

선사시대 (기원전 35000~3세기)

· 구석기 시대 (기원전 35000~ 기원전 14000)

· 조몬 시대 기원전 (14000~ 기원전 300)

· 야요이 시대 (기원전 300~ 서기 250)

고대 (3세기~12세기 말)

· 야마토 정권 (250~ 710)

· 나라 시대 (710~ 794)

· 헤이안 시대 (794~ 1185)

중세

· 가마쿠라 시대 (1185~ 1336)

· 무로마치 시대 (1336~ 1573)

· 전국 시대 (1467~ 1573)

근세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 1603)

· 에도 시대 (1603~1868)

근현대

· 대일본제국 (1868~ 1945)

· 일본국 (1945~ 현재)

 

야마토 정권 (250~ 710)

3세기부터 일본 열도에서 시작된 고훈 시대에 왕(, きみ) 또는 대왕(大王, おおきみ) 등으로 불렸던 왜국의 수장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유력 씨족이 연합하여 설립한 정치권력, 정치조직을 가리킨다. 야마토 정권은 나라 분지(奈良盆地) 등의 긴키 지방(近畿地方) 중앙부를 지배한 정권이라는 뜻이지만, 한편으로 지역국가로 부를 수 있는 일본 열도 각지의 다양한 권력(왕권)의 존재를 중시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나라 시대 (奈良時代, 710~794)

넓은 의미로 710년 겐메이 천황이 헤이조쿄(平城京)로 천도한 때부터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할 때까지 84년 기간을 가리킨다. 헤이죠코 천도에 앞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반포로 율령국가, 천황 중심의 전제국가,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던 시대였다. 다이호 율령은 이후에 누차 손질되며 10세기까지 일본에서 최고 법전 지위를 유지한다.

율령제에 의해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가 확립되어가자, 국가의 부가 중앙에 집중되어 수도 나라의 황족과 귀족은 이러한 부를 배경으로 호사를 누리며 귀족적. 불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덴표 문화(天平文化)- 한편, 고쿠가(国衙, 구니의 관할 관청고쿠분지 등에 임명된 고쿠시(国司), 관인과 승려 등에 의해서 지방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퍼져나갔다.

 

1) 나라 시대까지

일본의 고대 수도는 아스카, 후지와라쿄(694~710), 헤이조쿄(710~784)라는 이름으로 나라 지역에 세워졌다. 후지와라쿄와 헤이조쿄는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장안을 모방해 격자형 구조로 만들어졌다. 황실은 또한 수나라,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학생들을 보냈다. 7세기까지 나라는 한반도의 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백제의 많은 피난민들을 수용하였다. 불교는 황실의 보호 속에 오늘날의 나라시에서 번창하였다.

 

2) 헤이안 시대의 나라

784년에 간무 천황은 수도를 야마시로국의 나가오카쿄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고, 794년에는 또다시 헤이안쿄로 이전해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라의 사원들은 정치적인 수도를 옮긴 후에도 강력한 힘을 유지하였고 이 때문에 나라는 헤이조쿄의 남쪽의 수도라는 뜻으로 난토(南都)로 불렸다.

 

3.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 (天理市石上神宮) (이시가미 신궁)

이시가미 신궁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며, 국가와 민족의 수호신, 건강과 장수, 병의 치유, 백 가지 일의 성취의 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본관과 신사 문의 열쇠는 황실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세 신궁과 이소노카미 신궁은 나라 시대(710-784 AD) 이전에 진구(대신사)’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신사였다. 또한 이세 신사와 마찬가지로 천황을 대표하는 황실 사자가 건설에 파견되었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메이지 시대 신사 제도에서 대형 신사로 지정되었다.

이소노카미 신궁에 모셔져 있는 후쓰노미타마노오카미(経津主神, Futsunomitama no Kami)는 타케미카즈치노카미(武甕槌大神) 신의 소유라고 전해지는 검의 신격화이다. 후쓰노미타마노오카미는 고대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백성의 평화를 유지하는 신이자 모든 것을 성취하는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신화에서는 이 신(검의 신)이 나라의 복속에 기여하고 진무 천황(기원전 7세기에 즉위한 신화적인 첫 번째 천황)의 동방 원정에서 거짓 신과 반란군을 패배시켰다고 한다. 그 후, 진무 천황은 전사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모노노베 가문의 조상인 우마시마지노미코토에게 이 검을 황실에 영원히 안치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스진 천황 시대(기원전 1세기경)에 검이 궁중에서 현재의 장소인 이소노카미후루의 다카나와로 옮겨졌고, 이것이 이소노카미 신사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 이후로 황제들은 이 신사를 숭배하고, 국가의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많은 무기를 기증했으며, 특히 전쟁 중에는 화합을 위해 기도했다. 이 신사는 또한 유명한 장군과 전사들의 숭배를 받았다. 많은 씨족들이 호쿠라(八安)라고 불리는 창고에 신성한 보물을 바치고 황실의 안전과 국가의 평화를 기원했다.

이소노카미 신궁 내에서 가장 신성한 지역은 긴소쿠치(문자 그대로 금지된 지역’), 원래 신성한 검이 바로 중앙에 묻혀 있던 곳이다. 1874년에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많은 중요한 고대 무기와 마가타마라고 불리는 장식용 구슬이 출토되어 국보 또는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금단의 땅은 지금도 후루샤(布留社)’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끝이 있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 역사

이시가미 신궁은 야마토 분지의 동쪽 중앙 부근, 류잔 산의 서쪽 기슭, 후루야마 산의 북서쪽 기슭(해발 266m)에 위치한 구릉지에 있다. 북쪽으로 후루 강이 흐르고 주변 지역은 고분이 밀집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고전에서는 이시가미 신궁’, ‘이시가미 신 신궁’, ‘이시가미 자후토 영혼 신사등으로 쓰여 있으며, ‘이시가미 신사’, ‘후루 신사라고도 불렸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며, 무가문의 수장인 모노노베 가문의 주신으로 여겨져 고대의 신앙 중에서도 두드러지며, 건강과 장수, 병의 치유, 재해 퇴치의 행운, 100가지 성취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집합적으로 이시가미 오카미(Ishigami Ōkami)로 알려진 이 신들은 제10대 스진 천황 7년에 이시가미 후루(Ishigami Furu)의 다카니와(Takaniwa)에 모셔졌다.

헤이안 시대 후반에 시라카와 천황이 이 신사로 인해 특히 존경을 받았는데, 현재의 예배당(국보)은 천황이 궁궐의 신카덴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이 신사에 본전이 없었고, 배전 뒤의 금단의 땅은 고혼치라고 불렸고, 주신은 신사 중앙에 묻혔고, 배전에는 신들이 모셔졌다. 메이지 7, 오미야 간마사토 모의 승려에 의해 금단의 땅이 굴착되고, 다이쇼 2년에 본전이 창건되었다.

 

2) 주요 건물과 신성한 보물 

예배당[ 국보 ]

이 건물은 황실의 신카덴이라고 불리는 본당이었다고 전해지며, 이 신사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진 72대 시라카와 천황이 에이호 원년(1081)에 이 신사의 진혼 의식을 위해 궁전의 신카덴을 기증했다고 한다. 건축 양식으로 보면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간주되며, 웅장하고 견고하고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다

금단의 땅

후루샤라는 비문이 새겨진 칼끝이 있는 돌(미즈가키)로 둘러싸인 배전 뒤편의 땅. 신사에서 가장 신성한 성지로 동서로 44.5m, 남북 29.5m, 면적은 약 1,300이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남쪽의 절반 이상(남북 약 18m, 800)에 불과, 고대부터 이시가미 후루 타카니와‘, ‘고혼치‘, ‘신토 신사등 이 신사의 성지가 안치하는 성지로 칭송되어 왔다

메인 홀

이 신사의 성스러운 몸인 무도(神子) ‘후츠노 미타마(神市市)’가 금단의 땅 속 깊은 곳에 모셔져 있다는 전승이 있어, 메이지 78, 당시 오미야 승려 칸 마사토모(金水水)가 정부의 허가를 얻어 조사, 많은 옥, , 창 등과 함께 신검도 되었다. 그 후, 메이지 43년부터 다이쇼 2년까지, 신검을 모시기 위해 본전이 세워지고, 이때 금단의 땅이 북쪽으로 확장, 당시 배전의 서쪽 옆에 있던 신사(호쿠라)가 금단의 땅의 남서쪽 모퉁이로 이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신검이 나타난 곳은 본전과 배전 사이에 있으며, 현재 큰 돌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함께 출토된 옥 중 다수는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호쿠라 창고

금단 지역의 남서쪽 모퉁이에 지어진 이 창고는 천황에게 바친 보물과 무기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무기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신성한 창고는 신성한 보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신의 거처로 여겨지기도 한다. 매년 1231일에는 호쿠라사이(Hokura-sai)라는 축제가 열려 신성한 보물의 안전을 기원한다.

현재의 신사는 1851(카에이 4)에 재건되어 원래 금단 땅 밖의 배전의 서쪽 옆에 있었지만, 본전의 건설에 따라 메이지 45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루몽 [중요문화재]

산등이에 쓰여진 수묵 서예에 의하면 가마쿠라 시대 말기, 96대 고다이고 천황 분포 2(1318)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옛날에는 종탑의 문으로 상층에 종을 매달아 놓았지만, 메이지 시대 원년의 신과 불교의 분리에 의해 철거되어 매각되었다.

이중 앞면의 나무 명판에 새겨진 반코 유신이라는 글귀는 유명한 메이지와 다이쇼 장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작품이다..

셋샤이즈모타케오 신사[出雲建雄神社] 배전 [국보]

이 홀의 스타일은 와리하이덴(warihaiden)이라고 불리며, 홀의 중심이 흙바닥으로 되어 있어 건물을 걸을 수 있다. 지하로 덮인 통로는 폭이 1.8m이며 카라하푸라고 하는 곡선형 박공이 있다. 양쪽으로 스윙하는 보드의 양쪽에 있는 문과 그 문 앞면과 뒷면은 도색되지 않은 나무로 된 격자문이다. 이것은 여러 기간의 재건을 거쳤지만 우아한 형태는 예배당에서 중요한 모범이 된다. 건축 연대는 호노베 3(1137)에 처음 지어졌으며 13세기와 14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 재건되어 현재의 구조와 형태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우치야마 에이큐지(宇山寺寺)에 있는 스미요시 신사(神市神社)의 참배당이었다가, 다이쇼 3년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우치야마 에이큐지는 도바 천황(1113~18)의 영구 시대에 지어진 큰 사원이지만, 신도와 불교의 분리로 인해 메이지 9년에 폐지되었다. 그 후, 신사의 스미요시 신사는 보존되었지만, 메이지 23년에 스미요시 신사의 본전도 방화로 파괴되어 배당만 황폐해졌기 때문에 당점 진구 신사의 이즈모 켄유 신사의 배배사로 이전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우치야마 영원사 건물의 유물로서 가치가 있으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3) 모시는 신

이시가미 신궁은 제10대 수진 천황 시대에 건립된 고대 신사로, 다음 세 신을 주요 신으로 모시고 있다.

 

후츠노미타마노오카미(布都御魂大神, ふつのみたまのおおかみ)와 그 신화

후츠노 미타마(헤이 쿠니노 츠루기)의 검과 그 정신력이 진무 천황이 나라를 진정시키는 데 큰 공적을 세웠다. 韴靈(후츠노미타마)는 천둥의 신(타케미카즈치카미)이 들고 있던 검으로, 고사기·일본서기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 반환 신화에 등장한다.

진무 천황은 규슈의 다카치호 궁전을 떠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야마토로 향하면서 동쪽에는 나라의 중앙에 놀랍도록 아름다운 땅이 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구마노에서는 군대 전체가 도적단의 유독한 공기에 의해 파괴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다카쿠라지는 진무 천황에게 단일 수평검(타치)(일본 쇼키에서는 고타마 후토, 미타마 후쓰 또는 미타마 후츠노 미타마라고도 함)을 제공했다. 그러자 이 수평검의 신비한 힘, 재생과 재생의 힘으로 인해 진무 황제의 일행이 부활하고 도적들은 흩어졌다. 진무 천황은 야마토를 무사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평화 정착 후 진무 천황은 건국 수도의 대노래를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인민을 위한 것이라면 성물에는 차이가 없다‘, ‘온 나라가 통일되고, 수도가 개방되며, 도시는 여덟 개의 사찰로 뒤덮일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2년 후, 그는 왕위에 올라 초대 황제가 되었다. 진무 천황은 나라의 건수와 나라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모노노베 가문의 먼 조상인 우마 시마지(Uma Shimaji)를 궁궐에 안치하도록 명령했다. 그 후, 10대 스진 천황 7년에 모노노베 가문의 조상인 이카시코 오미코토가 이시가미 후루 고원으로 옮겨져 현재 모셔져 모셔지고 있다. 또한 고사기에는 이 칼은 이시가미 신사에 있다“, 즉 모셔져 있다고 쓰여 있다.

 

후루미타마오카미(布留御魂大神, ふるのみたまのおおかみ)와 그 신화

열 가지 종류의 천상의 보물과 진혼제.

모노노베 가문의 먼 조상인 니기하야 히노코토(Nigihaya Hinokoto)는 높은 천상에서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 천진의 신으로부터 하늘의 열 가지 보물을 하사받았다. 이때 그는 아프면 이 열 가지 종류의 즈이노 타카라를 흔들며 1234567890라고 말하라. 그러면 죽는 사람들은 살지 못할 것이다.” 10 종류의 신성한 보물은 십종신보(十種神寶)’라고도 불린다. 오키츠카가미, 헤츠카가미, 야츠카노쓰루기, 이쿠타마, 아시타마, 마카루가, 지가헤시노타마, 뱀 히레이, 하치노 하이레, 구사구사노 모노 히레이 등 10종류의 거울이 있으며,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많은 동료들과 함께 천상의 배를 타고 중국의 풍요로운 갈대 평원으로 내려갔는데, 그가 처음 강림한 곳은 가와치 국의 가와카미 광산이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히요미 하야는 야마토국 후루시 다카바(현재 이시가미 신궁 터)로 이전했다. 일본서기에는 공허를 볼 수 있는 일본의 땅이라고 말했고 이것이 일본이라는 이름의 시작이라고 쓰여 있다.

히요미 하야의 아들은 우마 시마지였다. 우마 시마지(岳島島)는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秀武) 천황과 황후의 성스러운 생명의 장수를 기원할 때, 열 종류의 신성한 보물을 사용하여 진혼 의식을 거행했다. 이것이 진혼제의 시작이었다는 것은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모노노베의 진혼제 영혼의 흔들림과 영혼을 진동시키는 비취줄을 연결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타마노오오는 공을 관통하는 끈으로, 공과 같은 소리인 영혼과 생명의 결속을 나타낸다. 지금도 이시가미 신궁에서는 1122일 밤에는 진혼제 축제’, 세쓰분 전야에는 다마노오사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후츠미타마오카미(布都斯魂大神, ふつしみたまのおおかみ)와 그 신화

십검과 야마타 오로치를 쓰러뜨린 스사노오 미코토의 정신.

스사노오는 다카텐하라에서 폭력적으로 행동했다. 이것을 볼 수 없었던 아마테라스가 천상의 돌문에 숨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천상의 돌집에 숨어 있었다는 신화로 알려져 있다. 아마테라스가 돌문에 숨으면 하늘과 땅이 어둠에 휩싸입니다. 신들은 다양한 축제를 열어 이시야도의 위대한 신을 다시 환영했고, 빛은 하늘과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스사노오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이즈모 땅으로 유배되었다.

스사노오가 이즈모 땅에 도착했을 때, 한 노부부가 애도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 보니, “매년 하치마타의 대뱀이 나타나 딸들을 차례차례 잡아먹고, 마지막 남은 이나다 공주도 곧 잡아먹힌다고 했다. 스사노오는 용감하게 하치마타의 대뱀을 물리치고 이나다 공주와 행복하게 연합했다. 이때 뱀을 쓰러뜨린 검은 천십악검(天十握剣)으로, 나중에 이시가미 신궁에 모셔졌다. 덧붙여서, 뱀의 꼬리에서 나온 검은 아메노 무라쿠모노 츠루기 또는 쿠사나기 검이라고 불렸으며, 나중에 3대 신성한 무기 중 하나로 여겨졌다.

스사노오가 하치마타 대뱀을 쓰러뜨린 검은 일본서기고어습유古語拾遺에 묘사된 바와 같이 후토 영혼의 오카미 영혼을 기리기 위해 이시가미 신궁에 모셔져 있다. 또한 궁내에는 정령검과 천상의 십보가 모셔져 있었지만, 스진 천황 7년에 모노노베 가문의 조상인 이카 시코노 미코토가 지금의 이시가미 신사인 이시가미 후루 고원으로 옮겼다. 원래 이시가미 신궁에는 본전이 없었고, 본신은 이 후루 고원(배전 뒤의 금단의 땅)에 묻혔다. 메이지 시대에 금단의 땅이 발굴되어 본전이 세워졌다.

 

4) 칠지도(七支刀)

<앞면>

[] 四年 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

[] 411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奇生)이 성음(聖音)으로 왜왕 지를 위해 만들게 하였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자료 출처

이시가미 신궁 공식 홈페이지(https://web.archive.org/web/20160301021240/http://www.isonokami.jp/)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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