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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사상사답사] 교토 – 히에이산 엔랴쿠지, 난젠지 & 교토학파
답사 지역과 방문 장소 : 교토 – 比叡山延暦寺, 南禅寺로부터 철학자의 길
차례
1. 교토 지도 및 정보
2. 답사지 유적 조사
3. 교토학파와 철학자 조사
1. 교토 지도 및 정보
(1) 교토에 대하여
교토시(京都市きょうとし)는 일본 교토부 중남부에 위치한 교토부청 소재지이자 교토부 최대 도시이다. 천년고도라고 불리는 일본의 옛 수도로 문화 · 역사 · 종교 · 예술 · 교육을 한데 모은 일본 문화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다. 교토에는 6, 7세기부터 한국과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8세기에 강력한 불교 신자들이 황실 직무에 관여하자 간무 천황은 나라(奈良)에서 불교 영향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헤이안쿄(平安京)라 하였고 일본 역사에서 헤이안 시대를 열었다. 교토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수도를 도쿄로 이전하기 전까지 무려 1075년 동안 일본의 공식 수도였다. 막부 시대에도 실질적인 권력기구인 막부가 가마쿠라와 에도에 들어선 바가 있지만, 교토는 천황이 근거하는 공식 수도였고, 정치적 입지 역시 결코 약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이 교토를 정신적 수도(역사적, 문화적 중심지)로 여기며 인구에 비해서 그 위상이 매우 높다.
북위 35°, 동경 135°에 위치한 교토의 면적은 약 827.8 km², 인구는 약 140만 명(2025년 기준), 행정구역은 나카교구, 사쿄구, 우쿄구, 후시미구 등 11개로 나뉜다. 도시를 상징하는 시목은 계수나무이고, 시화는 벚꽃이다.
기온은 8월 평균기온 28.5℃, 평균 최고 기온 33.7℃로 대구(각각 26.7℃, 31.3℃)보다 2℃ 가량 높다. 여름철 교토는 일본 전체에서도 유난히 후텁지근하고 무더운 곳으로 유명하다. 겨울은 또 춥기로도 유명하다. 교토는 왜 이렇게 덥고 추울까? 그것은 교토가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과 산지들의 위치가 계절풍과 상호 작용한 결과이다. 일본에는 여름에 남동 계절풍이 분다. 필리핀해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태평양 고기압이 강해지면서, 일본 열도 남동쪽에서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 공기는 습도가 매우 높고, 바람이 산을 넘을 때 구름과 비를 만들며 지역 기온을 높인다. 그런데 교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동쪽은 히에이산(比叡山), 히가시야마 산지(東山山地), 서쪽은 아라시야마(嵐山), 북쪽은 기타야마(北山) 등)으로 외부에서 불어오는 습하고 뜨거운 공기를 분지 안에 가두는 효과를 만든다. 그 결과 공기가 정체되고, 복사열(지표에서 데워진 열)이 축적되어, 교토는 더욱 무덥고 후덥지근해지는 것이다. 겨울에도 시베리아 고기압이 강화되어 불어오는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다. 이 공기가 바다에서 수분을 머금고 눈구름을 만들어 폭설이 내리지만, 교토는 내륙 쪽이라 이 눈구름이 산맥(북산·기타야마)에서 대부분 차단되어 차갑고 건조한 바람만 교토까지 넘어온다. 교토 분지는 밤에 복사냉각(지표에서 열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 아침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 도시는 가모가와(鴨川), 가쓰라가와(桂川)라는 강을 품고 있고, 주요 산으로 히에이산(比叡山), 다이몬지야마(大文字山), 아타고야마(愛宕山)를 꼽을 수 있다. 일본의 대도시 중에서는 지진 빈도와 대지진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내륙 깊숙이 위치한 교토는 난카이 해곡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실제 난카이 해곡 대지진이 발생해도 전달되는 지진동이 약하며, 쓰나미 피해에서 안전하다. 교토시 중심부가 위치한 교토 분지 북부는 충적층의 두께가 얇아 지반이 매우 단단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원래 교토는 중국 전통 풍수에 따라 고대 중국 수도 장안(현재의 시안시)을 모방하여 도시 구조를 배치했다. 황궁은 남쪽을 바라보며 우쿄(수도의 오른쪽 부분)는 서쪽에, 사쿄(수도의 왼쪽 부분)는 동쪽이다. 오늘날 나카교구, 시모교구, 가미교구 거리는 여전히 바둑판 양식이다.
오른쪽 격자형 거리(나카교구(中京区), 가미교구(上京区) 일대)
뒤편으로 히에이잔(比叡山)을 포함한 산맥이 교토 분지를 둘러싸고 있다
수도 교토의 필사본 지도(17세기, 6개의 패널로 된 병풍)
a. 문화 및 언어 : ① 중세 시대에 일본의 궁정 시인들은 교토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옛 연대기를 보면 8세기와 9세기에 교토에서 일본을 다스렸던 왕들이 예술을 장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수도로써 11세기 동안 전쟁, 화재, 지진 등을 겪었고, 2차 대전 교토의 문화유산 덕에 원폭을 피했다.
② 교토시는 약 1,600개의 절과 400개의 신사, 궁전, 정원 등을 잘 보존한 도시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절 중 하나인 기요미즈데라는 산의 경사에 기둥을 세워 지지한 웅장한 목조 사찰이다. 로쿠온지(금각사)는 황금 누각의 절이고 지쇼지(은각사)는 누각의 절이며 료안지는 석조 정원으로 유명하다. 헤이안 신궁은 1895년에 세운 신사로 황실을 찬양하고 교토에 처음과 마지막으로 살았던 황제를 기념한다. 교토 어소와 센토 어소를 포함하는 교토 교엔은 오랜 세기 동안 일본 천황들의 거처였다. 가쓰우라 이궁은 일본에서 가장 정교한 건축상의 보물 중 하나이고 슈가쿠인 이궁은 일본 최고의 정원 중 하나이다. 또한 센뉴지 절에는 시조에서 고메이에 이르는 천황의 무덤이 있다.
③ 교토는 맛있는 일본 음식과 풍상한 요리가 유명하다. 바다에서 멀지만 많은 절들이 있는 도시라는 교토의 특수한 환경으로 교토 지역만의 다양하고 특수한 요리들이 발전했다(교야사이, 京野菜). 전통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④ 도쿄 천도 전까지는 언어도 교코토바가 표준어였고 이를 중심으로 일본어가 많이 형성되었다. 그 때문인지 일본 내에서도 교토인은 다테마에로 혼네를 감추는 표현, 즉 완곡어법을 유난히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졌다. 사실 좋게 말해 유난히 자주 사용한다고 하지, 교토인들의 표현, 이른바 ‘교토식 화법‘은 일본인들의 관점에서도 학을 뗄 정도이다. 오죽하면 일본 예능에서 교토식 화법 예문을 늘여놓고 진짜 뜻을 맞히는 퀴즈까지 방송으로 나올 정도이다. 교토 사람들은 상대가 곤란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화법이라고 하지만,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정말로 차원이 다른 완곡어법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데에 특화되었다. 완곡어법이라는 점만 가지고 충청도식 화법과 유사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둘은 의도와 사용법이 상당히 다르다. 흔히 말하는 충청도식 화법에서는 ‘꼬아 말하기‘의 정도가 특별히 더 심한 경우는 드물다. 의미 파악의 난이도 자체를 높이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즉 의미 자체는 화자와 청자 모두 용이하게 이해한다는 전제하에,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농담처럼 돌려서 전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좀 단순하게 설명한다면, ‘내가 화났다‘라는 사실 자체는 명확하게 전달하되, 그 화남의 표현 방법을 농담처럼 돌려말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교토식 화법은 의미와 상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도 돌려말하기가 적용된다. 그 꼬아 말하는 맥락과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맥락 자체를 알기 힘들다는 것이고, 위와 같이 단순하게 설명한다면 ‘내가 화났다‘는 사실 자체를 꼬아서 이해하기 힘들게 전달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심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토식 화법은 과거 교토가 정치적 수도였고, 귀족들이 모여있던 만큼 일본 상류층 사이에서 상대의 흠을 직접 지적하는 행위가 상대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불명예를 주었다고 해서 칼 찬 사람에게 원한을 사거나 트집을 잡힐 수 있는 위험을 굳이 감수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결점이 내게 흠이 되는 상황에서 ‘흠을 고쳐달라‘라고 부탁하는 것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에게 부탁하는, 명예를 깎는 굴욕적인 일이다. 따라서 ‘당신의 흠이 내게 민폐를 끼쳐 거슬리고 있으니까 고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하는, 즉 메이와쿠라는 트집을 잡힐 위험 없이 상대의 메이와쿠를 지적하는 고단수의 힐책이다. 겉으로는 웃는 낯으로 평소에 안 하던 칭찬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의도는 항의하고 심지어는 갈구고 비꼬는 것이다.
b. 축제 : 1,000년 이상 열린 전통 축제들로 유명하다. 3대 축제 중 가장 먼저 열리는 아오이마쓰리는 매년 5월 15일 열린다. 7월 한 달 동안은 기온 거리에서 기온마쓰리가 열린다. 특히 7월 17일에 열리는 전통 행진이 유명하다. 8월 16일 오본을 기념해 산에 불을 밝혀 영혼을 집으로 인도하는 고잔 노 오쿠리비라는 축제를 연다. 10월 22일에는 지다이마쓰리가 열린다.
c. 유네스코 세계 유산 : 일본 국보의 약 20%, 중요 문화재의 약 14%가 교토 시내에 있다. 1994년에 지정한 고도 교토의 문화재는 교토부의 교토시, 우지시와 시가현의 오쓰시에 소재하는 17곳이다.
d. 요리 : 교토의 전통 요리는 ‘교료리(京料理)’로 불리며, 재료 그대로의 담백한 맛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내륙 도시다 보니 교토산 제철 야채(교야사이) 같은 채소를 이용한 요리가 많이 발달한 편이며, 사찰 요리인 ‘정진요리‘, 교토식 두부 요리인 유도후, 가정식 백반인 ‘오반자이‘가 유명하다. 교토는 전통 음식을 좋아한다는 통념과는 다르게 일본 총무성 가계 조사에 따르면 1가구당 커피와 빵 소비량 전국 1위이기도 한데, 정작 교토가 대표 음식으로 미는 녹차를 비롯한 차 음료 소비량은 전국 41위이다. 기사 교토 현지인들은 녹차보다 홍차를 좋아하며 로열 밀크티의 발상지가 바로 교토이다. ‘간토인은 양념을 진하게 해 짜게 먹고 간사이인은 짠돌이라서 양념 강도도 약하고 싱겁게 먹는다.’라는, 일본 내에서도 유명한 지역드립성 이미지가 있는데 그 간사이 요리의 총본산이 교토이다. 그런데 도쿄에 비하면 약간 싱거운데, 음식 문화가 누구를 대상으로 발달했느냐 하는 차이 때문이다.
e. 헤이안시대(平安時代 へいあんじだい, 794~1185)에 대하여(『일본철학사상자료집』, 7쪽)
헤이안시대는 교토(京都)로 천도되면서 수도와 조정에서의 권력의 중앙 집중화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 시기는 중국의 문화적, 철학적, 종교적 전통을 들여오고 흡수하려는 거듭된 시도로부터 벗어나 그것들을 일본 고유의 문화적 표현에 동화시키고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후대의 대다수 일본사상가들은 헤이안시대를 일본의 독창적인 지적, 미학적 활동이 꽃피웠던 시대로 회상하게 되었다. 조정과 정부의 제도나 불교사원과 승가제도 등은 여전히 중국적 양식의 큰 틀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사상가들은 일본의 토착적인 감성에 조화를 이루는 관념과 가치들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의 혁신, 가령 이전 세대에서 무시되었던 고대 애니미즘적인 요소들의 의식적인 복원과 같은 노력에 보다 관대해지고 있었다. 불교 승단과 조정은 지성계의 두 중심부로서 그 안의 지식인과 예술애호가들이 두루 서로 교류하였다. 헤이안시대 가장 창의적인 불교적 사유의 중심은 구카이가 개창한 진언종(眞言宗)과 사이초의 천태종(天台宗)이 두 전통들이었다. 헤이안시대의 철학적 논의들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포인트들이 주목되는데, 첫째, 구카이와 사이초는 이전 3세기간에 걸쳐 일본에 유입된 갖가지의 불교 사상, 문헌, 수행법들을 정리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일본에서의 천태는 지의(智顗, 538~597)가 개창한 당의 천태종에서 발전된 교하과 경전에 대한 교판을 중심으로 일본 천태의 해석을 형성·발전시켰다. 한편 진언종은 ‘열 가지 마음의 단계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는 『십주심론(十住心論)』을 통해 구카이가 분류한 교판을 따랐다. 천태와 진언은 모두 다른 종파의 불교에 대한 자신들 종파의 우월함과 종합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들만의 해석학적 범주론과 분류법을 활용하였다. 구카이의 해석은 심지어 대륙으로부터의 비불교적 전통–주로 유교와 도교–조차 끌어들였다. 이들의 교판(敎判)은 다른 종파들에 반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천태나 진언을 최상층에 둔 종파적 위계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다른 종파의 전통들은 그 교학 등이 틀렸다고 무시당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좀 더 보편적이고 거시적인 교학의 불완전한 부분들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두번째로 주요한 그리고 불교적으로도 중요한 철학적 주제는 깨달음의 본질과 그것이 종교적 수행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밀교(密敎)의 영향이 매우 크다. 진언종은 현교(顯敎)에 대한 밀교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현교는 그저 지적인 이해에만 매일뿐 온전한 한 사람의 몸과 마음 모두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밀교적 의식(만다라, 무드라, 만트라의 수행법) 참여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보다 완전한, 진실 그 자체가 작용하는 수행이라고 여겨졌다. 밀교적 목표는 진리의 이해를 냉정한 머리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구카이에 따르면 ‘지금 이 몸 그대로’ 성불이 가능한 것이고, 이러한 성취는 진정한 지적 이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한편, 일본의 천태는 밀교와 대륙으로부터 전수한 현교적 천태의 교학을 융합하여 중국의 계보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갔다. 진언이 밀교가 모든 불교교학과 수행의 바탕이라고 주장한데 대하여 천태는 밀교과 현교를 상호보완적으로 이해했고, 천태에서 수학하는 승려들에게도 현밀에 모두 정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진언과 천태의 철학적 사유는 모두 실천과 통찰, 신체와 정신적인 것의 융합, 깨달음의 형이상학적 토대, 말과 실체의 관계, 그리고 개체의 본질과 총체로서의 진실의 본질간 관련성에 초점을 맞췄다.
셋째로, 헤이안시대의 불교도들은 당시 일반적으로 가미의 숭배로 특징적인 일본 고유의 애니미즘적인 신앙, 즉 나중에 결국 신도의 핵심적 요소로 발전하게 되는 전통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애니미즘적인 경향이 아직도 자연에 대한 일본인의 정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반면, 거기에는 뚜렷하게 신도(神道)라고 칭할 만한 교학과 지적인 발전이 결여되어 있었다. 진언과 천태는 주로 밀교적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애니미즘적인 정서나 가미 관련 제의들을 가미가 심오한 불교적 진실상의 표면적 현현이라는 이해와 함께 상당부분 포용했다. 이로써 17세기 혹은 18세기까지 지속된 불교와 신도 간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 시기 동안 신도의 사상도 어렴풋하게나마, 불교적 분석에 기대어 그것을 신도식으로 변형시키면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헤이안 조정의 지식인들은 주로 미학적인 관점을 통해, 특히 시의 평가를 둘러싸고 이론과 실천에 대한 서로 유사한 의문점들을 던지며 논의하였다. 시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 말과 사물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전통적 양식들을 숙달하고 혁신도 하는 창의적인 융합과 조화를 어떨게 이루어낼 것인지, 허구와 진실간의 관계가 역사나 수필, 전기와 같은 논픽션과 진실간의 관계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등등, 그들의 논의는 종교적 문제에서 결코 멀어진 적이 없었다. 실로 시에 관하 이론은 미학적 감수성이 무상(無常)이나 무아(無我)와 같은 불교의 가르침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거듭하여 물었던 것이다.
2. 답사지 유적 조사
(1) 比叡山延暦寺(히에이산 엔랴쿠지, Hieizan Enryaku-ji)
히에이산은 시가현과 교토부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5개의 봉우리를 가진 아름다운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산줄기는 남북으로 약 16km, 최고봉은 해발 848m이고 최고봉을 중심으로 100km 범위에 사원의 경내가 펼쳐져 산 전체가 엔랴쿠지 사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장엄하고 웅대한 영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불교의 어머니 산(日本仏教の母山)’이라 불릴 정도로 산비탈에는 여러 불교 사찰, 탑, 수행터, 암자, 순례길이 분포하고 있다.
히에이산의 또 다른 매력은 풍요로운 자연환경으로 오랫동안 영산으로서 성역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청정한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쪽으로는 일본 제일의 호수 비와코를 내려다볼 수 있고, 서쪽으로는 옛 수도 교토의 거리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경승지다. 산 전체가 붉게 물드는 단풍의 가을, 순백의 눈에 휩싸이는 정적의 겨울 등, 사계절 철철이 변하는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a. 개요
엔랴쿠지는 천태종(天台宗) 본산으로 사이초(最澄, Saichō, 767–822)가 788년에 창건했다. 일본 불교 각 파의 창시자인 법연, 신란, 에이사이, 도겐, 니치렌 등 수많은 명승들이 수행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엔랴쿠지의 경내는 매우 넓으며, 약 1,700헥타르의 부지에 100채 이상의 건축물이 흩어져 있다. ‘동탑’, ‘서탑’, ‘요코카와’의 세 주요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구역에는 중심이 되는 불당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동탑에 위치한 ‘콘폰추도’다. 콘폰추도는 엔랴쿠지의 총본당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전국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방화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에 의해 재건되었다. 현재 엔랴쿠지의 많은 건축물과 문화재는 국보 및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히에이산 엔랴쿠지는 일본 불교 수행의 장소로도 알려져 있으며, 콘폰추도와 대강당을 중심으로 엄격한 수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b.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역사
사이초는 20세 때 히에이산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수행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남도 육종(나라 불교)의 부패를 비판하며 일본 불교를 새롭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고자 했다. 그 후, 804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에서 천태교학을 배우고, 805년에 귀국하여 천태종을 공식적으로 개창하였다. 그의 활동을 통해 엔랴쿠지는 일본 불교의 중심 수행과 학문의 장소로 발전해 나갔다.
사이초의 뒤를 이어, 엔랴쿠지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며 천태종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특히 사이초의 제자들은 엔랴쿠지의 가르침을 전국에 전파하여, 일본 불교의 어머니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3대 천태좌주인 엔닌(자각대사)은 천태 교학을 심화하고, 정토교의 가르침을 도입하여 엔랴쿠지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헤이안 시대 중기에는 료겐(자혜대사)이 여러 당우의 재건과 교학의 진흥에 힘썼고, 그의 제자인 겐신(혜심승도)은 후에 정토교 발전의 기초가 된 『왕생요집』을 저술했다.
c.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주요 명소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주요 명소는 천태종의 총본산으로서의 역사적·종교적 가치와 자연과 조화된 아름다운 경관을 느낄 수 있다.
◎ 콘폰추도(根本中堂)
콘폰추도는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중심 건물로, 엔랴쿠 7년(788년)에 사이초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곳에는 사이초가 봉헌한 약사여래가 안치되어 있으며, 엔랴쿠지의 상징인 “불멸의 법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등불은 1200년 동안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으며, 매일 꾸준히 등유가 공급되고 있다. 이 등불은 사이초의 염원에 따라 말법 시대를 넘어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한다.
◎ 대강당(大講堂)
대강당은 콘폰추도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승려들이 학문과 수행을 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대강당은 원래 824년에 건립되었고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3년에 복원된 것으로,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내부에는 대일여래가 본존으로 모셔져 있으며, 법연과 신란 등 일본 불교 각 종파의 창시자 상도 안치되어 있다. 또한, 석가모니와 천태종과 관련된 고승들의 초상화도 볼 수 있다.
◎ 아미타당(阿弥陀堂)
아미타당은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중요한 불당 중 하나로, 천태종의 교리에 따라 세워졌다. 이곳에는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으며, 정토 신앙의 중심지로서 많은 신자들이 아미타여래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히에이산의 불교 신도들에게 아미타당은 극락 정토를 염원하는 중요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아미타당은 아미타여래를 신앙하는 사람들을 위한 명상과 기도의 장소로, 아미타여래는 무한한 자비와 구원의 상징으로 참배자들에게 희망과 안식을 준다.
◎ 석가당(釈迦堂) / 전법륜당(転法輪堂)
삼나무 숲에 둘러싸인 석가당은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서탑 지역에 위치한 본당으로, 사이초가 직접 조각한 석가여래상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이 건물은 오다 노부나가의 방화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쓰의 미이데라에서 이전한 것으로, 현재까지 엔랴쿠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석가당은 천태종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정토인(浄土院)
정토인은 전교대사 사이초의 묘가 있는 곳으로, 히에이산 내에서도 특히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다. 이곳은 “청소 지옥“이라 불릴 정도로 철저한 청소가 이루어져 있으며, 장엄하고 청정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사이초의 묘에 가기 위해서는 서탑 지역에서 산길을 따라야 한다. 정토인은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수행 승려들이 엄격한 수행을 계속하는 장소로, 그 정신적 엄숙함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 간잔다이시당(元三大師堂)
간잔다이시당은 요코카와 지역에 위치한 중요한 불당으로, 오미쿠지(운세)를 처음으로 창안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헤이안 시대의 승려인 료겐(간잔다이시)이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책을 제시한 ‘오미쿠지’를 발명한 장소다. 간잔다이시당의 독특한 점은 단순한 운세 점이 아니라, 승려가 참배자의 고민을 듣고 조언을 주는 인생 상담의 형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건강과 재앙 방지를 기원하는 많은 참배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 니나이도(にない堂, 상행당·법화당)
니나이도는 두 개의 당인 상행당과 법화당이 복도로 연결된 히에이산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벤케이가 이 복도를 짊어졌다는 전설에서 ‘니나이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상행당에는 아미타여래가, 법화당에는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각각 다른 수행이 이루어져 온 역사적인 장소다.
(2) 난젠지(南禅寺 남선사)
동쪽 언덕의 산기슭에 위치한 난젠지는 교토 가장 중요한 사원 중 하나다. 경내, 그늘 나무, 비와 호수 수로에는 1890년부터 지어진 12개의 사원이 있다. 난젠지의 역사는 가메야마 천황(1249~1305)의 별궁으로 시작(1264)되었다. 아들과 함께 은둔한 황제로 재임하던 중 위기를 맞은 그는 정치적 라이벌의 책략에 밀려 이전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박탈당한 후 결국 1289년에 불교에 입문했다. 선승 무신 다이민 고쿠시(福新大正市)의 제자가 된 가메야마 천황은 1291년 대선종 사원 건축을 위해 자신의 단독 궁전과 부지를 기증했다.
◎ 산몬(三門)
난젠지 단지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거대한 문은 산몬 또는 산문(‘산’은 사원을 지칭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라고 불린다. 1628년에 지어진 이 문은 ‘삼 해방의 문’이라고도 불리며 일본 선불교 사원에서 가장 중요한 문이다.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가 오사카 여름의 진(大坂夏の陣)에서 전사한 무사들의 위령하기 위해 기부한 것으로, ‘텐카류몬(天下竜門)’이라는 별칭도 가진 높이 22m의 2층 누문(楼門)이다.
◎ 호죠
산몬 문을 지나 단지 뒤쪽으로 걸어가면 호조(Hōjō)라는 건물이 있다. 대수도 원장의 숙소로 사용된 호조(Hōjō)는 현재 주요 건축물이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에는 소박하고 절묘한 암석정원, 관음보살상, 가노탄유의 유명한 슬라이딩 도어 페인팅 ‘호랑이 마시는 물‘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작품이 있다. 가메야마 천황에 의해 세워진 이 건물은 세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현재의 건물은 모모야마 시대 이후에 다시 지어졌다.
◎ 수로각(水路閣)
수로각은 주변의 풍경을 생각한 설계와 디자인으로, 길이 93.2m, 폭4m, 높이가 9m인 돌로 지어져 아치형 다리 기둥이 품격 있는 건축물이며, 비와코소스이(琵琶湖疏水) 분선에 있는 수로교다. 일본의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여 쿄토를 대표하는 풍경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3. 교토학파와 철학자 조사(『일본철학사상자료집』, 515쪽~)
(1) 교토학파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와 그가 교토대학(京都大学)에서 큰 영향을 미친 여러 학자들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일본 최초의 진정한 철학자들로 간주되며, 또한 동양과 서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사람들로도 알려져 있다. 그들의 독창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이질적인 전통들을 각기 얼마나 충실하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들이 일본과 해외의 철학적 논의에 미친 영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토학파의 사상은 서양에서 일컫는 ‘사변철학’과 가장 비슷하긴 하지만, 그러한 사유 형식의 일반적 특징을 벗어난 것도 사실이다. 교토학파 철학자들이 서양의 사변적 철학자들을 닮은 점은 다양한 양상들을 통일시키는 경험과 실재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찾았다는 것이다. 즉 자연, 문화, 도덕, 예술, 정신, 절대자 개념 등 다양한 양상들을 통합하려 애쓰면서 구체적인 자연 및 사회 세계에 드러나는 특수성들 대신에 보편성과 총체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반면에 교토학파가 서양 사변철학과 크게 다른점은 통일의 체계적 원리를 부적정 관점에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인데, 이것은 근본 원리의 개념을 약화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학파와 연계된 모든 사상가들의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은 이 학파의 ‘창시자’로 유명한 니시다와의 연분이다. 하지만 니시다 자신은 ‘학파’를 창설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한편으로 보자면 니시다의 철학은 그것 자체로 위대한 업적으로서 교토학파와 연관된 다른 학자들의 연구와 거의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다만 다나베 하지메(田邊元, 1885-1962)의 연구는 예외인데, 니시다의 발전에 미친 그의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여, 이 둘의 철학은 상당 부분 상호 비평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다나베와 니시다가 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그 특징에 따라서 여기에서 제시한 4대에 걸친 사상가들을 비록 느슨하게나마 하나의 철학 전통으로 묶을 수 있다. 니시다와 다나베가 교토학파의 1세대라면 무타이 리사쿠(務合理作, 1890-1974), 미키 기요시(三木淸, 1897-1945),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1900-1990), 시모무라 도라타로(下村黃太郞, 1902-1995), 고야마 이와오(高山岩男,1905-1993) 등 니시다의 제자들은 2세대로서 학파의 기반을 다지고 독자적인 전통을 강화시켰다. 그 뒤로 다나베의 제자인 다케우치 요시노리(武內義範, 1913-2002)와 쓰지무라 고이치(辻村 公一, 1922-2010) 니시타니의 제자인 우에다 시즈테(上田閑fe, 1926-2019) 그리고 사상면에서 니시다니와 가까웠던 아베 마사오(阿部正雄, 1915-2006) 등이 학파의 재활성화에 기여한 3세대인데, 특히 해외로 그 사상을 전파함으로써 교토학파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었다. 하세 쇼토(長谷正當,1937-)와 오하시 료스케(大橋良介, 1944-)는 각기 프랑스 철학과 독일 철학을 전공한 인물로서, 니시다와 니시타니의 전통과 유럽 철학을 동시에 섭렵한 4세대를 이끌었다.
구키 슈조(九鬼周造,1888-1941), 와쓰지 데쓰로(和辻哲 郞, 1889-1960), 도사카 준(戶板潤, 1900-1945) 같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철학 노선을 추구한 인물들도 있고, 스즈키 다이세쓰(鉛木大拙, 1870-1966), 히사마쓰 신이치(久松眞一,1889-1980), 가라키 준조(唐木順三,1904-1980)처럼 철학 교수라기보다는 철학에 조예가 깊은 불교인으로서 철학 논의 에 관여한 인물들도 있다.
학파의 철학 노선을 정의하기 위해 얽혀 있는 다섯 가지 요소를 제시할 수 있다.
① 교토학파 철학자들은 아시아 및 서구의 철학적 자원을 동등하게 높이 평가하고 또 비평도 했다. 대개 다른 일본 철학자들은 최근까지 오직 서구에서 들여온 철학 사조에만 전념함으로써 일본 전통을 소홀히 했으나, 교토학파와 연관된 철학자들은 이와 달리 처음부터 동아시아 문헌에서 취한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유럽 및 미국 사상과 교류했다.
② 유럽 및 미국 철학에 대한 입장과 관련된 것으로, 교토학파는 서구적 근대성 개념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 근대성의 문제는 주로 학파의 2세대 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되었다. 고야마는 교수 생활 내내 이 문제를 다루었다. 시모무라와 니시타니는 1942년에 열린 ‘근대의 초극(近代の超克)’이라는 특별 좌담회에 같은 대학의 역사 교수이자 함께 니시다에게서 배운 동문인 스즈키 시게타카(1907-1988)와 함께 참석하여, 서구의 가치와 제도의 전폭적인 수용에 대한 대안을 논하면서 일본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주장했다. 근대성으로부터 물러설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한 니시타니는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가치관, 구체적으로 불교의 가치관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③ 근대성에 대한 입장과 관련된 것으로서, 교토학파의 1,2세대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민족–국가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 대해 분명하고 또 다양한 정치적 자세를 견지했다.
④ 이들이 추구한 대안들이 종교적 양상을 보인다는 점도 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교토학파 학자들이 불교에 그리고 종교간의 만남에 눈을 돌린 것은 철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⑤ 대부분의 교토학파 학자들은 불교의 개념들을 차용하면서 ‘절대무(絶對無)’의 개념을 즐겨 사용했고, 그 학파의 이름표가 될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
(2)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
니시다 기타로는 10년간의 참선(參禪) 수련을 통해 배양한 영적 각성을 근대 철학과 융합하는 것을 삶의 과제로 삼았다. 선(禪)을 통해서 그는 모과 마음,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 선행하는 생생한 경험적 통일성의 가치를 인식했다. 서양철학을 통해서는 논리적 사고, 선입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 그리고 세상에 대한 폭넓은 통찰력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현실의 모든 것을 ‘순수 경험’으로 보려 했던 실험적 처녀작 『선(善)의 연구』로 시작해서 니시다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고, 그가 디딘 매 과정마다 신조어를 남겼다. 행위적 직관, 절대무(絶對無), ‘화(化)함’으로 지각하는 것, 절대모순적 자기동일(絶對矛盾的 自己同一), 장소(場所)의 논리, 변증법적 역사의 세계, 역대응(逆對應), 등등.
그는 인간 존재를 내부적 자기모순의 뿌리를 탐색하는 ‘세상에 대한 자기 결정’으로 보았다. 특히 그는 개인에 대해 세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세상의 집적된 반영물이기도 한 일종의 단자(單子)로 보았다. 라이프니츠와는 달리 니시다 철학의 개인은 역사에 의해 형성되지만 동시에 역사를 형성한다.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현실과 인간 삶의 모순이, 서양의 실존철학에서 그가 발견했던 단순한 비이성적 ‘불안(Angst)’을 초래하는 것을 막아보기 위해, 그는 부정 속의 긍정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순수 경험 :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허식을 버리고 사실을 따라서 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험이라고 해도 사실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상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려분별을 조금도 더하지 않은 그 자체의 상태를 ‘순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색을 보고, 소리를 듣는 찰나, 아직 소리와 색이 외부의 작용에 의한 것인지,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인지와 같은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색, 소리가 무엇인지 판단하기 이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순수경험은 직접경험과 동일하다. 자기의 의식상태를 동시에 경험하였을 때, 아직 주체도 객체도 없이 지식과 그 대상이 완전히 합치되는 것이다. 이것이 경험의 가장 순수한 것이다.
장소의 논리 : 어떠한 관계라도 관계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항목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지식의 형식에 대해서는 내용이 없으면 안되는 것과 같다. 위아래가 일치하는 하나의 완전체 역시 이를 비추어줄 장소가 없으면 안 된다. 대상이 주관적 작용을 초월하여 자립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객관적인 대상이 성립하는 장소는 주관적이어서는 안되며, 장소 그 자체가 초월적이어야 한다. 우리들이 작용이라고 하는 것을 대상화해서 볼 때도 역시 그러한 사유대상의 장소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참된 장소에서는 어떤 물이 그 반대로 이동할 뿐 아니라 그 모순으로 옮겨가는 것 역시 가능해야 하며, 비슷한 개념의 외부로 나가는 것도 가능해야 한다. 참된 장소는 단순히 변화의 장소가 아닌 생멸(生滅)의 장소이다. 유사 개념을 넘어서 생멸의 장소로 들어가면 이미 작용한다는 의미가 없어지고, 단지 작용하는 것만이 보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사 개념을 비추는 장소에서는 작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용을 내포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참된 무의 장소란 어떤 의미에서의 유무 대립마저도 초월아여 이를 안에 성립하여야 한다. 어디까지나 유개념적인 것을 부수면 참된 의식을 볼 수 있다. 대립 없는 초월적 대상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의미의 의식 밖에 초월한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장소에 비추어져서 대립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립 없는 대상’이란 것은 우리들의 당위적 사유의 대상으로 소위 판단 내용을 일의적으로 결정하는 표준이 된다. 만약 우리들이 이에 반해 생각한 경우 우리들의 사유는 모순에 빠지고 사유는 사유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이러한 의의를 벗어나 대립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어렵다.
예술과 시의 영원 : 위대한 예술은 영원이라는 대리석 위에 조각된 부조(浮彫)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는 인격적인 것과 대비되는 비인격적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형상과 대립되는 질료가 아니다. 인격적인 것이 여기에서, 이것에 의해 형성되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배경과 동떨어진 인격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덩어리는 단순한 질료가 아니라 그 자신의 예술의 일부여야만 한다. 우리들의 마음이 자기로부터 자신을 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영원 속에 비추어진 영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어떠한 예술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배경이 있다. 그러한 배경이 없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신 : 진정한 절대란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이 신이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신은 절대 자기부정으로 ‘역대응’적인 자기자신에 대해 자기자신 속에 절대적 자기부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고, 절대무이기 때문에 절대 유인 것이다. 절대무로서 유(有)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 없으며 알지 못한 것이 없어 전지전능하다. 따라서 부처이면서 동시에 중생이고, 중생이면서 동시에 부처라고 할 수 있다. 절대란 단순히 비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부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3) 다나베 하지메(田邊元, 1885-1962)
자신의 철학의 추상성과 절대무의 지각에 기반한 ‘장소(場所)의 논리’를 창안한 니시다와의 결별에 대해 불만이 겹치면서 다나베는 스스로 ‘종(種)의 논리’라 칭한 자신만의 철학을 시작한다. 다나베가 목표한 바는 종의 논리적 범주를 삼단논법적 소전제 속의 미약한 지위에서 좀 더 두드러진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베르그송의 ‘닫힌 사회’에 대한 비평에 영감을 받아서, 민족집단의 자폐성을 유지시키는 비이성을 비평할 근거를 찾았고, 동시에 사회적 생존이 생각에 가하는 특정한 한계를 애써 돌파하지 않고는 이성적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종의 논리 : 유한상대(有限相對)이면서 유한상대라는 자각은, 그리고 이미 유한상대를 넘어서는 무한절대(無限絶對)의 회향(廻向)의 시작이라는 신앙은, 모든 논증의 근거가 된다는 자증(自證)이다. 유한이란 자기를 한정하는 것이 외부에 있는 것, 상대란 다른 매개로 인해 자신이 확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생각해온 종과 개(個)는 그 의미에 있어서 명확하게 유한적이고 상대적이다. 종과 개는 대립되고 서로 반대의 방향으로 한정되지만, 서로 예상하여야 비로소 성립된다. 그 자신 안에 부정의 계기를 포함하고, 종을 매개로 해 비로소 성립되는 개(個)가 유한상대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종이라 하더라도 자신과 대립하고, 자기통일을 파괴해 역으로 그 한정을 뒤집으려는 개의 한정을 예상하여 개체 집단으로서의 공동사회의 종을 의미하는 것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