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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아시아 Asia

 

[오리엔테이션](곰에서 왕으로) 대칭성을 찾아서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4-07-18 17:36
조회
84

곰에서 왕으로/240719/강평

 

대칭성을 찾아서

 

자연의 일원

곰에서 왕으로의 부제는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이다. 제목을 거칠게 풀이하자면 곰과 인간의 구분 없이 인간이 자연의 일원이었던 세계에서 왕, 국가로 인해 인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세계로 이동하면서 야만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자칭 문명인들은 구석기인들을 문명의 전단계로서의 야만이라고 부르는데, 저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정작 야만은 문명인들의 특징이라고 한다. 이때 야만은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이다. 인류는 신석기 전까지만 해도 자연의 일부였고 특별할 것 없이 자연의 일원으로서 살아갔다. 다만 특별한 것이 있다면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써서 도구를 만들어 사냥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을 위해 사냥을 했지만 사냥은 몹시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또 많은 지식, 기술을 요하는 일로서 상대를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곰을 죽이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과 다를 바 없었기에 심리적인 압력이 엄청나게 발생했던 일이다. 구석기인들은 부득이하게 곰을 죽일 때 의례를 통해 영혼을 달래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자신과 같은 곰, 감사한 곰을 함부로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죽이지만,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일용할 양식, , 기름, 뼈 등을 제공해주는 대상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구석기들은 사냥만 한 것이 아니라 사냥으로 중심이 인간으로 편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균형을 맞췄다.

곰에서 왕으로에서 곰 사냥을 결투라고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다. 마음대로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갖다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라이벌(?)로 생각한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난 고래사냥 그림도 긴장감, 허세 담긴 무용담보다는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룰과 격식이 있는 치열하고도 박진감 넘치는 결투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려면 꼼수나 속임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기술에 꼼수까지 포함되어 포획한 뒤 감사의 기도를 했다면 그야말로 기도가 아니라 기만일 것이다.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죽음을 사후에 조금이나마 맞추기 위한 균형인 것이지 어차피 맞출 균형을 염두에 두고, 속임수와 꼼수가 난무한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일은 아니다. , 형식, 심판, 관객이 있는 링에서의 정직한 결투는 그 자체로 상대를 인정하고 공경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오모리 가는 길

베링해협을 가는 기차 우화의 가난한 청년이 눈에 띈다. 그 기차는 이미 야만의 세계로서 아무렇지도 않게 야생동물을 포획하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몇 겹으로 옷과 목도리를 걸치고, 이를 자랑하는 공간이다. 곰의 가죽으로 더워 죽을만큼 옷을 입고 있는데 옷을 더 입으러 가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자신과 관련이 없거나 피해를 입을 것 같으면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길 주지 않고 자는척, 조는척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곰들은 테러리스트가 되어 역공을 펼치려한다. 파국이 임박한 상황에서 사냥꾼들과 곰들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가난한 청년이다. 이 청년은 한번도 함부로 야생동물을 포획한 적 없는 순교자 같은 인상이다. 나는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하면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돈 버는 데에 몰입해서 완전히 그 세계에 젖어 있으면서 저녁에 잠깐, 주말에 조금 책을 보는 것으로 뭘 기대하고 있을까 자문하기도 한다(특히 숙제가 밀리고 시간에 쪼이면 그런 생각이 강력하게 든다). 그들의 세계에 다가서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내 관점으로 덧씌운 해석이었다는 자각에 허탈해하기도 한다. 나는 일할 때, 공부할 때와는 달리 목소리와 눈빛도 예민하게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곰의 털옷을 입고 베링해 기차를 타고 또 곰을 잡으러 가면서, 또 거기에 길들여진 몸으로 손에 인류학 책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작년 북해도 답사를 다녀오고, <빙하 이후>를 읽고,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보고 나서 구석기, 원시 부족 사람들의 생활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과서에서 공부한 것과 달리 신석기 농업 혁명, 국가의 탄생이 필연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농경이라고 하는 우연한 일만 없었다면 어쩌면 나는 자연의 일원으로서 작살을 다듬고 고래를 손질하고, 아니 어쩌면 고래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암각화를 그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경의 배신>에 나온 것처럼 인간은 식물, 동물을 길들였다는 데에만 주목했지만, 그 길들이는 과정에서 인간 또한 식물, 동물에 길들여지고 울타리에 갇히기도 했다. 울타리에서는 사회적 긴장, 전염병의 문제가 생겼고, 문자와 국가도 탄생하면서 인간도 관리되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아서 울타리 밖으로 이탈하는 탈주자들을 잡아서 일 시키고 세금을 걷느라 국가도 수 천년을 애께나 썼다. 나도 이래저래 애쓰고 있다. 아오모리 가는 길. 내가 만나게 될 유물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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