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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아시아 Asia

 

[조몬답사 자료집] 고레카와 석기시대 제례 문화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08-09 16:13
조회
43

조몬유적지 답사 자료(고레카와 석기시대 유적, 1000BCE~400BCE)

 

2024.8.9. 최수정

 

삶과 죽음의 의례

 

조몬문화는 복합 수렵채집민으로 문자를 가지지 않은 사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통해 조몬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전국적으로 1만 개에 달하는 조몬시대의 유적 중 약 80%가 낙엽활엽수림대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낙엽활엽수림에 풍부한 호두·도토리들의 나무 열매를 주요한 식량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채집·어로·수렵 생활을 기반으로 한 정주 생활을 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또 음식이 되는 동·식물의 삶과 죽음에 대해 강렬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유물과 유적들은 자연과 한 몸이었던 삶, 자연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을 잊지 않는 정신성이 드러나 있다. 조몬시대에는 식량도 자원도 모두 자연이 준 선물로 생각하고, 일상과 기도·주술이 밀접하게 결합된 세계관 속에서 풍요의 의례가 발달했다.

 

정신문화

조몬 정신문화의 발달은 정주에 의해 진전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집단의 유지, 안정, 상병의 회복이나 자연에의 경외나 감사 등, 소망이나 생각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상적 홀은 계절 등의 고비마다 다양한 의식·의례가 행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몬인들에게 정밀하고 복잡한 정신성이 있었음을 유구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무덤은 죽은 조상을 기리는 마음의 표현이며, 그 무덤에는 붉은 옻칠과 팔찌 등 풍부한 부장품이 동반된다. 패총·패장이나 성토유구에서는 패각이나 동물의 뼈 외에 의도적으로 파괴한 토기나 석기, 토우도 출토되었고, 인간을 매장한 무덤도 있어 제사장적인 성격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큰 돌을 원형으로 배열한 환상열석에는 무덤을 동반한 것이나 상징적인 태양의 운행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는 것들이 있어 당시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참고 북의 조몬 세계와 국보, 9)

 

 

제사터와 묘지터의 분리

조몬 시기 취락에서는 산 자의 주거지가 죽은 자를 위한 묘지를 한가운데 두고 감싸안는 듯한 형태로 형성되었으며, 그곳에서의 일상생활은 항상 죽음의 입회하에 영위되었다고 생각할 할 수 있다. 집은 정면이 광장을 향하도록 만들어진 환상취락의 형태였다.

그러나 조몬시대 후기나 말기에 이른 고래카와 석기시대는 거주공간에 시신을 묻지 않았다. 이전까지 같은 공간에 중첩되어 있던 산자의 영역과 죽은 자의 영역이 어느 순간에 분리가 일어났다. 묘지가 취락 중앙의 광장에서 외곽으로 옮겨지고,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점차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참고 신의 발명,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114)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처럼 안과 밖을 구분하는 취락 구조의 등장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스피리트(보이는 것 너머의 실재, 유동하는 추상적인 힘)’로 가득한 세계가 사라지고, 지고신(至高神)과 내방신(來訪神)이라는 이원적 구조로 이루어진 들의 세계가 등장하는 것과 상응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원초적인 신들의 세계는 이후 긴 시간이 흐르면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결과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여러 다신교 신앙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고신과 내방신의 대조적인 성격은 사뭇 인상적이다. 지고신(감추어진 신)은 차원에 상주하는 신이고, 이곳에 편재하는 신이고, 위에서 지켜보는 신이고, 유지와 존속의 신이고, 믿음과 약속의 신이고, 세계의 항상성의 신이다. 반대로 내방신(원천과 기원)은 차원을 넘나드는 신이고, 저곳에서 오는 신이고, 멀리서 찾아오는 신이고, 풍요와 재앙의 신이고, 선물과 혼돈의 신이고, 세계의 가능성의 신이다. 내방신에 의해 이 세상저 세상의 구별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내방신은 이 세상=현실세계저 세상=타계의 구별을 의식하게끔 하고, 두 세계를 공간적으로 격리되고 분리된 영역으로 묘사한다. 그런 다음 좁은 통로를 통해 그 두 영역을 연결한다. ‘저 세상이란 망자의 세계 또는 죽음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망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를 잇는 여행을 하는 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다.(참고 신의 발명, 나카자와 신이치, 175)

 

신앙관념과 공간관념의 대응(<요동의 풍운> 블로그)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하지 않음

인간계와 자연계가 중첩되어 인식

애니미즘 또는 토테미즘

↙ ↘

주거·생산·매장공간의 미분화

취락의 외부경계가 표시되지 않음

광장장 또는 거실장

↙ ↘

지고신

차원에 상주하는 신

이곳에 편재하는 신

위에서 지켜보는 신

(수직축의 사고)

유지와 존속의 신

믿음과 약속의 신

지속성의 신

내방신

차원을 넘나드는 신

저곳에서 오가는 신

멀리서 찾아오는 신

(수평축의 사고)

풍요와 재앙의 신

선물과 혼돈의 신

가능성의 신

취락 내부

사람이 상주하는 공간

사회가 유지되는 공간

저장과 일상의 공간

상식과 문화의 공간

지속성의 공간

 

 

취락 외부

사람이 넘나드는 공간

저 세상, 자연의 공간

자원을 획득하는 공간

생산과 죽음의 공간

미지와 야생의 공간

가능성의 공간

 

 

장기간의 정주생활로 사람들은 점차 취락의 안과 밖을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타계관(他界觀)-현실 세계를 떠난 다른 세계에 대한 관념의 첫 등장과 나란히 일어났을 것이다.

취락 안은 사람이 일상을 영위하는 상식과 문화의 공간이고, 취락 밖은 사람의 인지 너머에 있는 미지와 야생의 공간이고, 따라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혼돈의 공간이다. 이러한 혼돈은 죽음과 재앙의 원천인 동시에 풍요와 기적의 원천이기도 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사람들은 취락 주위에 환호를 파서 취락 안과 밖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시신의 매장이나 도기의 생산 등의 활동이 환호 바깥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기원전 5000년경, 인류는 서아시아 중심부와 동아시아 중심부에서 각각 인간자연을 정신적·물질적으로 분리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이는 이전까지 모든 공간에 충만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던 자연의 힘이 인간의 일상에서 물러나 숲의 어둠 속으로 숨게 되었음을 의미하고, 동시에 서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초인적인 인물로 샤먼의 본격적인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힘이 강해지면서 이 간극은 가속을 거듭하며 멀어지게 되었고, 급기야 후대에는 인간 사회의 지고신이 자연에 숨은 내방신들을 집어삼키기에 이른다.

 

고래카와 석기 시대 유적

정주성숙기 후반의 유적으로 수혈건물수에 비해 무덤의 수가 많고 묘역도 넓어 여러 취락에 의해 형성, 유지 관리된 공동묘지로 여겨져 높은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유적은 정주성숙기 전반(기원전 1000~기원전 300년경)의 다양한 유구를 동반한 공동묘지이며, 또한 제사상으로 생각되는 유기장과 물터, 배석유구 등의 다양한 구도도 확인되었다. 무덤과 유기장이 분리되어 저지대에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이 중요한 이유는 제사 유적으로서 보았을 때 그 마을에 있어서 규모가 크다는 것이다. 취락의 규모에 비해 제사 유적의 규모가 너무 크다. 이미 신을 모시는 것이 전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참고 산나이마루야마 유적, 도오쿠일보사, 97)

공동묘지가 공동 제사 공간과 마을 구성에서 분리되어 만들어지게 되었고, 다양한 제사·의례 중에서도 장례에 관한 의례가 특화되었다. 이것은 선조 숭배문화의 조성을 보여준다.

미적 감각이 풍부한 토우와 옻칠 제품 등, 다양한 부장품이 출토되는 공동묘지도 조성되었다.

 

 

 

매장과 취락체계의 관련

조몬 매장과 의례 관습의 다양성이 시간이 지나면서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매장과 의례 관습의 다양성이 사회 복합도를 반영한다고 추정하면 이 결과들은 조몬사회 복합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현저하게 증가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흥미 있는 것은 매장과 의례 관습의 다양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 반드시 생업의 집약, 정주의 증가, 그리고 높은 인구밀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몬 인구 추산은 조몬 중기에 최대에 도달하였으며, 조몬 후기와 만기에 줄어들었다. 대형 취락의 상당수가 조몬 후기와 만기가 아니라 조몬 중기에 나타났고, 조몬 중기에서 후기 및 만기까지 유적의 평균 크기와 밀접도의 전반적인 감소는 확실하다.

전통적으로 선사시대 취락에서 묘지의 존재는 완전한 정주를 시사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몬 무덤 자료에 대한 검토는 각 유적에서 무덤의 축조와 수혈주거의 점유는 반드시 동시에 발생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조몬인들의 문화 경관이 이전에 점유되었던 취락을 포함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그들의 전반적인 토지 사용은 과거부터 추정되어 오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 같다.

매장과 의례 행위를 조몬 정주 저장형 수렵채집민 그리고 혹은 이동형 수렵채집민의 취락체계의 구성요소로 추가하면 우리가 엄격한 생태학적 혹은 경제적 관점으로부터는 해명되지 않는 특정한 고고학적 정형성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 생업과 취락의 조직적 복합성의 초기 발전은 정교한 의례 관습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참고 일본 조몬 고고학, 하부 준코 지음, 강봉원 옮김, 사회평론, 222)

조몬 전기 초엽에 이루어진 저장 기술의 발전은 일본열도의 여러 지역에서 이동성 거주 체계 발전의 둔화를 촉발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저장혈의 출현은 대형 취락지들과 유적지들의 기능적 분화의 실재를 포함한다. 대형 취락지의 일부는 비록 유구들이 반드시 동시대는 아니더라도 묘지 그리고/혹은 대형의 제의 석조 유구들과 관련되어 있다. 또 토우와 암우, 활석(滑石)제 귀걸이와 구슬 등과 같은 제의 혹은 종교적 유물의 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증가를 보인다.

그러나 조몬 중기 말엽 취락 대부분의 급속한 소멸이 있다. 저자는 극히 전문화되어 있는 생업 전략이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작은 자연환경적 변동 혹은 다른 외부 혼란에 더 민감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조몬 중기 사람들은 지나치게 전문화되었을 수도 있다. 고도로 전업화된 시스템은 단기적으로 대규모 인구를 지탱하기에 적합하지만 자원이용의 다양성이 결여되기 때문에 환경의 작은 변동이나 기타 요인에 의해 큰 타격을 받기 쉬운 시스템으로 본다면 중기 말의 유적 수와 밀도 급감이나 감소는 모순 없이 설명된다.(참고 일본 조몬 고고학, 하부 준코 지음, 강봉원 옮김, 사회평론, 220~280.)

 

조몬 후기 : 사회 복합 발전의 심화

도호쿠에서 취락의 평균 크기는 조몬 전기에서보다 작아 보인다. 이 지역에서 취락과 떨어진 제의 유적의 발전은 어쩌면 이 작은 취락의 크기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세습적 사회 계층의 발생에 대한 시사는 부장품을 가진 소아 묘에서 볼 수 있다.

사회 복합성에 대한 고고학적 상관관계의 가능성에 관한 세 가지 측면의 주요 증거가 있다. 첫째, 제의 유물과 유구의 수와 종류의 증가이다. 조몬 후기 초엽에 대형의 환상열석이 갑자기 증가하였다. 둘째, 아스팔트와 소금을 포함한 한정된 자원으로부터 입수한 물품의 원거리 이동이 확연히 눈에 띈다. 셋째, 정교하게 제작된 토기, 칠기, 그리고 다른 부패성 유물의 전문화된 생산이 조몬 후기 이후에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세 가지 측면이 수직적 사회 불평등으로 가는 가능한 모든 통로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조몬 후기에 수직적 사회 차별의 정도는 비교적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수직적 차별의 발전은 생업과 취락에서 조직적 복합성이 축소됨으로써 제한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조몬 사회의 복합적 성격은 보다 수평적 차별에 토대를 두었던 것 같다. 대형 기념물 건축을 위해서 지도자들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였음에 틀림없었겠지만 그들의 위치가 세습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몬 중기 말엽에 고도로 전문화된 정주저장형 수렵채집민 체계의 소멸이 그 뒤 조몬 후기에 수직적 발생을 촉발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참고 일본 조몬 고고학, 하부 준코 지음, 강봉원 옮김, 사회평론, 280~281)

 

제의 유물의 형식

기도와 축제의 도구

수북이 쌓인 성토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된다. 그 안에는 생활용구인 흙이나 석기 외에도 토제·석제 장식품 등 다양한 종류의 도구를 볼 수 있다. 그 중에도 특징이 있는 출토품으로 축제의 도구로 여겨지는 토우와 미니어처 토기가 있다. 80% 이상이 성토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성토와 축제도구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쌓인 흙층의 위아래에서는 비슷한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어 일정한 시간차를 가지면서도 같은 장소에서 도구를 버리거나 접었던 것 같다.

이 밖에 축제의 모습을 전하는 출토품으로는 무속인처럼 보이는 인물이 그려진 토기편과 열을 받은 비취제 대주와 돌봉 들이 있다. 이것들은 불과 관련된 축제나 그와 관련된 인물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참고 산나이마루야마 유적 가이드북, 133)

조몬 유적에서 나온 소위 제의 유물의 형식은 상당히 다양하다. 그것들은 토우(土偶) 및 암우(岩偶), 석봉과 석검”, 토제 가면[土面] 그리고 다른 물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더하여 고고학자들은 종종 토제 및 석제 귀걸이와 옥과 같은 여러 가지 종류들의 장신구를 조몬 제의 관습의 맥락에서 분석한다. 제의 유물이 풍부한 것은 조몬 중기와 그 이후의 동일본에서 특히 눈에 띈다.

토면(土面)은 조몬 후기에 아주 갑자기 나타났고 이들의 분포가 북도호쿠에서 특히 조밀하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북환태평양 지역으로부터의 민족지학적 예를 인용하여 오츠카(1988)는 적어도 색칠한 가면, “문신가면, 그리고 조합식 가면은 제의를 시작할 때 사용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눈과 입을 위한 구멍을 가지고 있지 않고 크기가 너무 작아서 실제로 쓸 수 없는 가면 모양 토제 유물은 예외이고 이들 대부분은 사람들에 의해서 아마 착용되었을 것이다. 가면과 함께 상당수의 토우 존재도 이 견해를 뒷받침한다.(참고 일본 조몬 고고학, 182)

낳는 힘의 신앙

 

 

토우(土偶)

토우는 토기와 마찬가지로 흙으로 빚어 구운 것이다. 그러나 토우는 항아리나 항아리처럼 생긴 용기가 아니라 인간을 본떠 만든 것이다. 대부분 유방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며, 토우는 여성의 육체를 본떠서 만들고 있다고 해도 좋다. 토우는 눈이나 코나 입이 달려 있다고 해도, 극단적으로 큰 동글동글한 눈이나 입이 달려 있는 것도 있고, 잘 치켜 올라간 눈을 가진 짐승 같은 얼굴도 있다.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되는 토우도 있다.

토우를 여성의 낳는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만들었고 깨지기 위해 만들어진다. 조몬 토우는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다. 토우는 대부분 부서진 상태로 발견되며, 빠진 곳이 없는 토우는 30점 정도 밖에 없다.(참고 산나미마루야마 유적 가이드북, 139) 토우가 출토되는 장소는 다양하다. 작은 돌로 웅크린 속에 토우가 묻혀 있기고 하고, 독에 묻히기도 하고, 폐옥된 수혈 주거의 구덩이에 놓이기도 한다.

토우는 머리나 몸통이나 손이나 발과 같은 상태에서 뿔뿔이 부서져 각각의 부분이 다른 장소에 놓여진 것으로 나타난다. 별도의 주거지에서 출토된 머리와 몸통이 연결되기도 하고, 몸통과 왼손이 연결되기도 한다. 이는 중요한 일이다. 토우는 넓고 여러 장소에 배포되기 위해 만들어졌다. 토우는 부서지는 것만큼이나 그 부서진 부분을 여러 장소에 배포하는 데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토우를 조각조각 부수어 각처에 배포하는 것은 음식을 확보하기 위해서 행하는 풍요의 의례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음식이 되는 식물의 재배에는 죽음이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다. 뿔뿔이 흩어지는 토우는 그런 격렬한 생각이 조몬 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토우를 깨는 것은, 당연히 다음에 태어날 새로운 생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혼의 존재가 생각되었던 것이며, 삶은 죽음을 내포하고, 죽음은 삶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명관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죽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영을 믿는 사상이 조몬시대의 유물로서 나타난다. (참고 일본의 신들, 히라노히토시히로)

어린이 무덤

아이들의 관은 일상생활에서 삶기에 사용하던 토기를 재활용했다. 완전한 형태의 토기는 적고, 그릇의 가장자리를 깨거나 바닥이나 측면에 구멍을 뚫는 등 손이 많이 가는 경우가 있다. 깊이 20~4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로 보면 유아가 이런 토기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참고 산나이마루야마 유적 가이드북,168)

유아의 옹관장조몬 중기부터 후기까지 성행하고 있다. 조몬인은 왜 유아를 옹관장으로 한 것일까. 유아의 옹관장은 용기로서의 토기 항아리를 모태로 간주함으로써 성립된 장법으로 유아 재생관과 관련이 있다.

여자==용기=세계라는 방식이 성립하고 있다. 여신상은 생명을 주고 생산하는 것, 생명을 부양하는 것, 비호하는 것으로서의 여신상. 출산하는 여성을 유사한 힘을 가진 것으로 보고, 그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여성이야말로 풍부한 생산력을 가진 대지의 흙을 자유롭게 다룰 자격을 가질 만하다. 여성이 대지의 흙을 재료로 만든 토기는 바로 여성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기를 어머니의 태속을 나타내는 토기에 넣어 매장하는 것은 죽은 아이에 대한 상냥한 보살핌뿐만 아니라, 그 재생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옹관장으로 하는 장법은 조몬인의 마음에 인간 생명의 핵으로서의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을 믿는 사상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참고 일본의 신들, 히라노히토시히로)

 

남성원리의 상징

여성 원리를 나타내는 토우에 대해 남성 원리를 나타내는 석봉을 대치할 수 있다. 토우에 대한 여자의 제식이 있고, 석봉에 대한 남자의 제식이 있었다. 둘 모두 만들어내는 힘에 대한 제식이었음이 틀림없다. 석봉이 정성껏 만들어져 있는 것에 비해 돌기둥은 인간의 손길이 거의 가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석주에는 견혈 주거지 안에 만들어진 돌계단 위에 세워져 있는 것과, 마을 광장에 세워져 있는 것이 있다. 특정 가족에 의해 행해지는 제식과 공동체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공동의 제식이 있었음을 상상하게 한다. 석주의 제식은 집과 마을 전체의 제식이다. (참고 일본의 신들, 히라노히토시히로)

 

가면의 영력

집단적 조상 숭배 의례와 관련된 것이다. 가면은 조상을 표상한다. 가면을 통해 죽은 자기 되살아난다. 가면을 쓴 자는 그를 통해 구현된 신화제의적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그 사자는 최초의 신화적 조상에게 흡수, 동화된 신화제의적 존재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참고 M.엘리아데, 상징, 신성, 예술, 서광사,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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