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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오른손(1) 발제]죽음, 재탄생의 시작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4-08-12 15:53
조회
69

죽음과 오른손(1)/240813/강평

 

죽음, 재탄생의 시작

 

죽음, 생의 단절이 아닌 연결

죽음을 슬퍼하는 양상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같을까? 저자 로베르 에르츠는 우리는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또 죽음에 대한 감정은 보편적이지 않고 죽음의 표상과 인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필멸한다는 사실이 비밀이 아님에도 죽음에 대한 사유는 많이 부족한 것 같다. 평소에는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마치 죽음이 갑자기 들이닥치기라도 한 것처럼 죽음이 다가오면 그제서야 두려움과 슬픔을 느낀다. 장례식이 끝나면, 문득 어떤 순간에 고인과의 인연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한다. 나에게 죽음은 생의 끝이자, 이별이었으며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는 개인적인 추억이었다.

문득 내가 삶을 머리, 꼬리, 내장과 분리된, 마트의 손질된 생선 가운데 토막처럼 일부분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삶에서 죽음은, 내달리기만 하다 갑자기 맞이하는 절벽 같은 끝이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슬픔에서 벗어나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말에서 일상이란 젊고, 건강한 가운데 토막만을 뜻하는 것 같다. 나에게 죽음은 되도록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일이거나, 생각해봐야 별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고, 남은 자만 생각하는 일상으로의 빠른 복귀는 얽힌 오랜 유대를 단호하게 갑자기 끊는 일인 것 같다. 반면 석기 시대 사람들은 죽음을 생의 단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고인의 물리적인 죽음 뒤에도 꽤 오랜 시간을 장례에 썼다. 죽은 자에게 그 기간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입문식이었으며, 그곳은 안식처가 아니라 재탄생을 기다리는 곳이었다. 보르네오 다약족 등 원시 부족들은 개별 사람은 이생에서는 필멸하지만, 이 죽음은 재탄생의 시작이며 이로써 사회는 불멸한다는 원리를 생각한 철학자였던 것 같다. 이 부분은 불교의 윤회 사상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가운데 토막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과 흐름이 있는 곳에서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수습 기간, 입회 자격, 입문식이 필요하다. 저자 로베르 에르츠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 다약족과 다른 여러 민족의 사례를 통해 이중 장례식에 드러난 삶과 죽음이 연결된, 죽음에 대한 표상과 인식을 보여준다. 그들의 장례식을 보고 있자니 죽음이 새로운 생을 향한 얼마나 중요한 단계인지, 출생이란 얼마나 많은 기다림과 드문 기회를 통과한 신비로운 은총일 수도 있는지, 무엇보다도 그렇게 출생한 존재들이 하나하나 얼마나 귀한지 생각하게 된다. 또한 출생과 죽음이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이라는 점도 생각해본다.

 

1차장, 임시 대기

에르츠는 죽음을 둘러싼 관념과 관습을 고인의 시신, 영혼, 그리고 살아 있는 자와의 관계 등 세 가지로 설명한다. 고인의 시신, 영혼, 산 자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중 장례식은 통상의 장례식과 다르게 최종 매장지로 단번에 가지 않고 임시 매장을 일정 기간 한다는 점이 다르다. 임시 대기가 필요한 것은 죽음으로 세상과의 인연을 바로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인이 저승길 대기표를 받은 자가 되고, 이승에서는 그의 출현 자체가 공포가 되는 귀찮은 손님으로 떠도는 단계가 1차장과 2차장 사이이다. 죽음은 그렇게 임시장인 1차장과 최종 단계인 2차장 사이에, 일종의 2차장 대기 기간인 중간 단계가 있다. 2차장은 더 부패될 수 없는 만 남았을 때 한다. ‘가 중요하다. ‘는 부패하는 불순한 살과 달리 사회적 불멸의 상징이자, 다음 생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뼈는 집단 지속성의 담보로서 소중하게 보관된다. 이렇게 죽음과 다음 생은 전체 공동체 차원에서 이전 생에서 남은 뼈로 연결된다. 남은 자들에게는 이 기간 엄격한 금기가 적용된다.

보르네오섬 다약족은 고인의 시신을 집 안 또는 집과 떨어진 고립된 장소에 안치한다. 최종 장례식까지 대기 기간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 7~8개월에서 심지어 10년도 걸린다고 한다. 이 기간은 시체가 완전히 부패해 뼈만 남을 때까지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뼈만 남기고 부패물만 관 밖으로 배출하는 것은 엄청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위생, 악취 제거 때문이 아니라 시체는 사람을 마비시키는 벼락에 비유되고, 특히 죽은 직후일수록 그 힘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뼈만 정성스레 남기는 것은 살아 있는 자에게는 고인에 대한 벼락같은 공포를 덜고 평화와 안녕을, 고인에게는 구원을 위한 일이다. 이 기간은 돈, 시간,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이 기간을 줄이기 위해 인신공양으로서 죽은 자의 머리를 바침으로써 이 기간을 단축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다. 화장은 다양한 임시 매장 방식과 시체 변형의 시간,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뼈만 남긴다는 면에서 일종의 1차장에 해당한다. 아이누족은 죽음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다라고 한다. 살이 붙어 있는 한, 즉 부패가 끝나지 않는 한 생명과 영혼은 무덤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재탄생을 위한 과도기이자 시작점이다.

 

2차장, 최종 의식

1차장이 고립된 장소에의 임시 매장이라면 뼈만 정성스럽게 씻고 치장한 후 최종 매장을 하는 2차장은 가족 연회로 진행된다. 이는 단순한 장소 변경이 아니라 죽은 이의 상태에 대한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다. 임시, 대기, 중간이라는 위치에서 새로운 세계에 나타난 침입자’, 기존 세계에 공포를 일으키는 귀찮은 손님에서 벗어나 새 세계의 신참이 되고, 그가 살던 마을을 지켜주고 돕는, 경외와 신뢰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이에 따라 남은 자들도 1차장 기간 적용되던 엄격한 금지에서 해방되고, 애도를 끝내고, 드디어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게 된다. 추장이나 중요한 인물의 경우 유골이나 두개골은 유골의 미덕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람이 사는 집에 안치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영혼은 천상에 일곱 세대 동안 머무른다. 한 세대가 끝날 때마다 다음번 재생을 위해 죽어야 하고, 일곱 번째 죽고 나면 버섯이나 열매 속으로 들어간다. 여자를 통해 직접적으로, 또는 동물의 몸을 통한 우회를 통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 죽음은 개인사의 유일한 일이 아니라 무한 반복이자, 다른 존재 형태로의 이행이다. 2차장으로 죽은 자들은 조상들의 세계로 보내고, 남은 자들은 산 자들의 공동체로 복귀한다.

빈빈가족의 경우 젊은 사람이 죽어 1년이 경과하면 고인의 아버지는 붉은 색이 칠해진 고인의 팔뼈 하나를 지참하고 부족 구성원을 불러 모은다고 한다. 신성한 노래를 부르고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그 전날 그 아버지는 나머지 뼈를 운반해서 나뭇가지에 운반해두고 그동안 그곳은 성스러운 공간이 된다고 한다. 와라문가족은 팔뼈 전체가 아니라 팔뼈 중 요골을 따로 분리해 부분으로 전체를 대체한다고 한다. 영혼과 요골 사이가 긴밀한 관계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요골을 애써 지키고, 의식이 거행되는 장소에서 미리 정해 놓은 롤에 따라 갑자기 포장을 뜯고 요골을 빼앗고 도끼로 산산조각을 낸 후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넣는다. 뱀 그림이 있고 이로써 죽은 자는 토템과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개인의 죽음을 그의 몸으로 환생했던 조상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혼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조건과 시간은 어떤가. 영혼 자신의 의향, 그리고 주어지는 기회에 따라 환생까지의 시간이 결정된다고 한다. 아룬타족은 뼈가 먼지가 되면, 구난지족은 비가 뼈를 씻고 정화하면 환생이 일어난다고 한다. 적어도 지금의 몸이 전부 사라져야만 환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최종 의식은 고인의 입장에서 고통을 겪고서야 입문할 수 있는 입문식이다. 장례식이 죽음의 업을 완전히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시 살아나도 다른 세계나 다른 종으로 살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문득, 없어지거나 무효화할 수 없이 계속 따라다는 것이 업이라면 지금이라도 업 관리(?)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 앞의 감정

원시 사회에게 죽음은 사회와 맺었던 그 사람과의 관계의 정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일테면 원시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던 추장의 죽음 직후에는 휘몰아치는 강력한 공포가 나타난다. 반면 공동체와 오랜 시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 이방인이나 아이의 죽음은 어떤 감정이나 영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개인과 개인과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와 개인의 관계가 죽음의 표상에서 드러나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에르츠는 죽음을 입문식이라고 한다. 마치 소년이 힘든 통과의례를 거쳐 성인 남성이 되고 부족의 신성한 신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원시 사회는 삶과 죽음이라는 이질적인 단계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차장은 중간 단계이면서 장례 의식의 기간을 연장시키는 기능을 한다. 죽은 직후는 여전히 남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죽음이 완성되지 않고 일종의 내적 고통을 통해서 조금씩 분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끊을 수 없는 유대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단계라는 개념이 나온 이유라고 한다.

빙하 이후를 읽고, 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래 사냥장면을 보고 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연학자, 해부학자, 기술자, 그리고 국가대표에 버금가는 신체적 능력자라는 생각을 했다. 돈이라는 매개를 벌고 쓰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은 직접신체를 써서 공동체 구성원들과 자연을 파악하고 필요한 것을 만들어 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반면 현대인들은 편리를 진보로 착각하며 신체를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하면서 점점 신체적으로 무능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죽음과 오른손<죽음과 이중 장례식>을 읽고, 조몬 유적지 자료 조사를 하며 이 시대 사람들은 철학자, 종교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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