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아시아 Asia
[달의 이면] 발제-일본의 이중 잣대와 대칭성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달의 이면』
2024.8.15. 최수정
일본의 이중 잣대와 대칭성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달의 이면』 에서 멀리서밖에 볼 수 없고 그 세부는 지각할 수 없는 인류학자는 이러한 ‘불충분성’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불충분성’ 덕분에 다양한 문화 속에서도 견지되고 있는 ‘불변성’에 민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불변성을 부각해서 보다 보면 차이들마저 흐릿해져 안 보일 수 있고, 이 착오 덕분에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멀리서 일본을 바라보면 일본은 아주 자연스럽게 신화 속에다 역사를 심었다. 신화에서 역사로의 이행이 마치 음악의 전주처럼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을 통해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의 구유럽 세계의 보이는 달의 표면적 역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달의 이면, 즉 일본학 연구자들과 아메리카 원주민학 연구자들이 다루는 역사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대 일본은 대빙하기 동안, 약 12만 년에서 18만 년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 대륙에 붙어 있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는 현재의 베링해협을 육교처럼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고 일본은 유럽과 태평양 사이에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했다. 두 세계의 만남과 혼합의 장소에서 유사하면서도 대칭적인 점을 가지고 서로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인류의 과거 가운데 가장 신비롭게 남아 있는 부분에 접근하는 데 있어 일본이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극동이라는 지리적 위치 및 간헐적 고립으로 인해 일본은 아주 희귀하고 섬세한 정수들만 증류하는 일종의 여과 장치 혹은 증류기 기능을 했다. 차용과 종합, 절충주의와 독창주의가 일본에 번갈아 나타났다. 그로 인해 다양성이라는 씨가 일본에 인공수정되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류가 직면한 두 가지 위험, 우리 뿌리의 망각, 그리고 인구수의 압박을 해결할 열쇠를 보았다. 즉 과거에 충실하면서도 과학과 기술에 의해 도입된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균형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보았다. ‘복원’이라는 수단을 통해 근대 속으로 들어오면서 동시에 전통적 가치들을 지켜나가는 일본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상호 보완 기능의 양립
일본의 신화는 ‘잃어버린 물건’이라는 모티프를 이용해 삶과 죽음을 양립시키고 환기한 다음, 중간항을 도입하여 그 양립을 중화하고 있다. 상호 보완 기능을 하는 형제가 나오는 신화에서 모든 만물의 거시적 생과 사의 기간을 인간의 삶으로 축약한다. 하나는 나이가 많고, 하나는 나이가 적은 ‘형제’라는 대립쌍을 등장시켜 시간상의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공간상의 차이를 부각시켜 하나는 사냥에, 하나는 물고기잡이에 전념한다. 산과 바다에 연관된 활동을 한다. 이 형제는 각자의 도구인 활과 화살, 그리고 낚싯바늘을 교환함으로써 기능적 양립을 중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교환은 실패한다. 하지만 바로 이 실패 자체가 일시적 성공을 가져온다. 형제 중 하나가 바다 공주와 결혼하는데, 이로써 땅과 바다의 대비가, 즉 양립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나 사냥꾼과 어부로서의 상반된 재능을 자신 안에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여자 중재자가 인간이라는 성격과 바다 괴물이라는 성격을, 즉 그 두 가지 성격을 큰 무리 없이 드러내게 된다. 중재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겁다. 부부는 헤어지고, 공간적 양립은 끝낼 수 없다.
“이것이 땅과 바다 세계 사이에 더 이상 소통이 없는 이유이다” 일본이라는 섬의 특성은 땅과 바다 사이의 양립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그 양립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조몬 정신
레비–스트로스는 사냥꾼, 어부 혹은 토기 예술에 정통한, 그러나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닌 정주민과 수집가 문화는 우리에게 매우 독창적인 사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조몬 토기는 그 어떤 다른 토기와도 비슷하지 않다. 완성된 조각품인데도 소묘 같은 도안이 그대로 있기도 하고, 만든 이가 불쑥 영감에 사로잡혔거나 그 즉흥적 영감을 바로, 정확히 포착해낸 듯하기도 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조몬 토기에서 느껴지는 일본인의 ‘조몬 정신’이라 하는 것이 지금까지 잔존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신속성과 확신에 찬 집행성 등 일본 미학의 어떤 불변적 특징이 거기서 나오지 않았을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뛰어난 기술을 굳이 발휘하지 않는 절제력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완성해야 할 작품 앞에서의 오랜 ‘명상’이다. 표현력이 강하면서도 수단은 매우 절제하고 있다. 평면적인 느낌과 강렬한 선의 느낌이 대조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조몬 토기에서 양극단 사이를 오갈 줄 아는 놀라운 역량이 있는 문화를 발견한다. 기하학적 모티프와 자연적 모티프를 기꺼이 연합하고, 상호 모순되는 것을 병합하기를 좋아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차용과 종합, 절충주의와 독창주의가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신화와 역사를 상호 배타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독창적 혹은 차용일 뿐이다. 과학적, 기술적 진보와 함께 아방가르드적이고 혁신적인 나라이면서도 애니미즘 사고를 그대로 존중한다. 예술의 뿌리를 늘 태고에 두고 있다. 신토 신앙과 그 의례가 ‘모든 배타적인 것을 거부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우주의 모든 영혼과 정령을 인정하고, 자연과 초자연을 아우르며 인간과 동물, 식물 그리고 질료와 생生까지 모두 아우른다.
존재의 예측 불가능성
일본인은 아직 지치지 않은 인간의 상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온전한 믿음 속에서 활력이 있어 보인다. 자기 자신을 존엄하고 의미 있는, 주도적 중심으로 자각하는 사고에는 사물의 무상성과 존재의 예측 불가능성 같은 것이 있다. 이는 동양철학의 두 가지 거부 체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중 첫째는 ‘주체sujet’에 대한 거부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나’라는 것을 부인한다. 동양의 교리는 ‘나’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각 존재는 생물적, 심리적 현상으로 어떤 임시적 배합에 지나지 않는다. ‘아我’라는 것에는 지속적 요소가 없다. 외양은 헛된 것으로 흩어 없어질 운명이다.
둘째는 ‘언술discours’의 거부다. 그리스 시대 이후 서양에서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포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재와 상응하는 언술을 잘 구축함으로써 사물들의 질서에 도달하고 그것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반대로, 동양적 개념에 따르면 모든 언술은 어쩔 수 없이 실재와 합치하지 않는다. 이런 동양적 개념의 자연은 우리를 벗어난다. ‘자연’은 우리의 성찰과 표현 능력을 초월한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것도 말하지 못한다.
일본식 사고는 주체를 구심적으로 파악한다. 일본어의 문장 구성 방식은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나아간다. 일본식 사고는 주체를 과정의 끝에 놓는다. 사회나 직업상의 집단을 차례로 환기할 때, 가장 한정되고 협소한 집단이 제일 마지막에 온다. 이런 식으로 주체는 현실을 재발견한다. 주체가 외부에서부터 구성되는 방식은 언어에서처럼 사회 조직에서도 부각된다. 일본어는 인칭대명사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인은 대패질을 할 때 멀리서 가까이로, 객체에서 주체로 향하게 한다. 연장을 밖으로 미는 대신 자기 쪽으로 당긴다. 작업을 맨 처음 질료에서 시작하여 시작점이 아닌, 도착점에 와 있기. 주체는 언제나 이런 과정의 결과다. 장갑을 뒤집듯 주체 거부라는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돌려놓는다. 여기서 사회적 역동성이 생긴다. 차용한 것들을 자신과 잘 동화되도록 아주 정성스럽게 걸러내 최대한 미세하게 만들어 그 정수만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본 문화는 그 특수성을 잃지 않았다.
노동의 숭고함
레비–스트로스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인은 노동을 통해 자기 존재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노동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진정한 협력이라 생각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세계 창조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는 ‘손으로 하는 노동이 다 신성한 것’이라고 하며, ‘노동의 진정한 시적 가치’를 말한다. 노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 형태가 드러나고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이 신의 행위와 같다는 말일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본 일본인의 노동은 서양식 관점처럼 인간이 무력한 질료를 대상으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형상화하는 일이다. 어떤 ‘노(勞)’들은 소박하고 보잘 것 없는 가사일에도 고귀함을 부여함으로써 노동에 시적인 가치를 싣는다.
일본인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놀라움을 발견한다. 노동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수많은 관점들이 새롭게 드러남을 인식한다. 일본인들은 자연미에 대한 숭배로 인해 자연환경의 극단적 난폭함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를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자연에, 어떤 때는 인간에게 우선권을 부여한다. 만일 그래야 한다면,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자연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원론으로부터 해방되기
레비–스트로스는 앙드레 말로도 인정했다는 ‘센가이 기본’선사의 그림을 설명한다. 서양인이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그의 그림을 다른 각도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젠’, 즉 선불교의 스님이었던 센가이는 그 정신적 계보에서 다도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는 까칠까칠하고 울퉁불퉁한 질료나 불규칙적인 형태에 대한 미적 취향, 즉 ‘불완전한 예술’ 취향이 있었다. ‘아름답다’와 ‘추하다’는 대립되는 말이 아니다. 섬세함과 투박함을 또한 구분하지 않는다. 선택할 것이라곤 없다. 규칙과 조건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 이 즉흥적 그래피즘에 무심함과 우아함이 섞여 있다.
센가이의 그림은 현실과 어떤 동작의 즉흥적인 만남이다. 충돌 아니 혼융을, 두 일시적 현상의 만남을 찬미한다. 형태, 표현 혹은 태도, 분방한 붓놀림, 선불교의 회화는 자기 방식대로 불교 사상의 핵심인 제행무상을 표현한다. 존재와 사물의 항상성을 거부한다.
‘각성’을 통해 존재와 무, 생과 사, 텅 빈 것과 꽉 찬 것, 나와 타자,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구분이 모두 사라지는 상태에 이른다. 같은 원리로,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면 모든 수단이 다 좋다. 선禪은 초월적인 명상과 말장난, 조롱 간의 가치를 서열화하지 않는다. 언어유희 및 동음이의어를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이중적 의미가 현상들 간의 경험적 연관 고리를 끊어버리고 초감각적 현실에 접근하게 해준다.
불교에는 자아도취는 없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은 없다. 왜냐하면 각 질문이 다른 질문을 불러내고, 그 어떤 것도 고유한 본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계의 실상은 다 일시적이며 덧없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지고 뒤섞이므로 정의라는 그물코로 현실을 잡을 수는 없다. 센가이의 그림도 완성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붓이 흔적을 남긴 짧은 순간이 표현된 것뿐이다. 작품이란 공간적 형태라기보다 시간적 형태로, 늘 일관적인 것은 거의 없다. 선사는 자기 스스로가 비실체적인 ‘곳’이 되기를 원한다. 세계의 어떤 것이 그를 통해 표현된다.
일본의 해결책
인구문제와 관련해, 일본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해결책을 찾아낸다. 해안가 지역에는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산악 내륙 지역에는 거의 아무도 살지 않는다. 두 정신세계가 대조되어 있다. 하나는 과학, 산업, 상업의 세계, 또 하나는 고대부터 계속 쌓여 온 신앙의 세계다. 이 “이중 잣대”는 시간의 차원을 갖는다.
일본은 신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 먼 태고를 류큐의 작은 섬에서, 그 수풀과 바위, 동굴, 우물, 성소와 샘 옆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주민들에게 신화적 사건들은 어제고, 오늘이고, 또 내일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발을 디딘 신들은 매해 다시 오기 때문이다. 섬 전체에 걸쳐 의식이 있고, 성소가 있어 그들의 현존을 입증한다.
일본은 독창적인 무엇을 만들기 위해 다른 데서 많은 요소를 가져와 ‘전통으로’ 정교하게 다듬을 줄 안다.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고 통합하는 기예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