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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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면] 일본 문화, ‘순수 상태’들의 무한 조합
일본 문화, ‘순수 상태’들의 무한 조합
레비–스트로스는 『달의 이면』에서 문화에는 본래 공통의 척도가 없다고 말한다. 해서 특정 문화의 성격을 규정짓는데 객관성은 필연적으로 결여될 수밖에 없으며, 그 규정을 위한 일시적 기준 역시 다른 문화에서 유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오히려 이러한 딜레마를 따르며 ‘인류학이란 관찰자의 문화와 가장 다른 문화들을 선택해서 묘사하고 분석하는 일’(17)이라고 정의한다.
레비–스트로스 본인도 이 책에서 일본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왜곡과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음 밝힌다. 그러면서도 일본 문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데, 음악, 판화, 음식, 신화 등 일본 문화 전반을 다루면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고 나아가 동양 내 어떤 국가와도 비교되지 않는 일본만의 독특한 특징들을 찾으려 애쓴다. 동양 일본 문화의 어떤 특이성이 서양인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를 매료시켰을까? 또 그가 일본 문화의 독창성을 어떻게 분석, 묘사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섞지 않는 순수 상태
레비–스트로스는 먼저 일본 음악에 매료된 순간을 고백한다. 자신이 음악에 대해 기존에 알고 있는 어떤 것들과도 공유 지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왜 자신이 빠져들었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일본 음악이 서양 음악과 달리 화음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일본 음악은 소리끼리 섞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자의 음, 소리가 섞이지 않는 이 상태를 이들의 본래 상태, ‘순수 상태’로 본다. 음이 섞이지 않는다면 그저 옆으로 나열되는 방식이 될 텐데, 일본은 순수 상태의 소리들을 조절해 가며 음악을 만든다. 즉 음의 높낮이, 박자, 음색 등으로 전체 조화를 만드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소리를 뒤섞지 않고 소리가 가진 위의 요소들을 가지고 그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며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태도에 일본 음악의 독창성이 있다고 한다.
이상적인 화음을 먼저 상정해두고, 음악이 시작된다면 그 화음에 어울리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분별하고, 어울리지 않은 음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필요하다면 각기 다른 음들을 섞어 그 이상의 상태를 실현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하여 각 음을 살리면서 전체 조화에 집중하는 태도에는 우리가 흔히 ‘소음’으로 치부해버리는 소리를 포함하여 그 어떤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는 먼저 전제되지 않고, 조화의 과정을 거쳐 그 이후에 드러난다.
소리, 음을 각자를 뒤섞이게 하지 않는 순수 상태로 두면서 이 들 사이의 조화를 만들어 내는 태도는 일본 회화에서도 발견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일본 회화를 일종의 ‘분할주의’라고 정의한다. 소리와 음을 다루는 태도가 그렇듯, 색을 뒤섞지 않고 여러 개의 순수 색 그 자체를 나란하게 배열하는 방식이다. 해서 색은 일본 회화에서는 한 화면에서 순수 색, 단색이 동등하게 같은 무게로 전달된다. 또한 평면 회화에서 ‘입체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본 회화의 특징 역시 색을 순수 상태로 두는 태도와 연결된다. 평면 위에 입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완성된 결과를 결정해두고 과정을 계획해야 한다. 입체성은 빛에 의해 드러나므로, 빛은 화면 내 유일한 중심이 된다. 빛에 따라 톤의 위계가 결정되고 그 위계에 맞게 톤을 위치시킨다. 톤과 톤을 섞어 각 위치에 맞는 톤을 만들어 낸다. 톤들이 분리되지 않고 매끄럽게 연결되면서 실제와 같은 입체성이 화면 위에 드러난다.
순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를 또 다른 순수 요소들과 배치, 조합해서 하나의 조화를 만들려는 태도는 ‘요리’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레비–스트로스는 일본 요리에도 자신이 완전히 빠져들었다 고백하는데, ‘자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놓고, 다른 것과 같이는 놓되 먹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선택하게 내버려’(70) 둔다고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또 이는 신화에서도 이 같은 태도는 예외가 없다. 레비–스트로스는 『고지키』의 ‘이나바 토끼’라는 우화를 한 예로 드는데, 이 우화와 비슷한 신화는 서양 아메리카에서도 발견된다. 지상에서 천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하는 존재들이 악어, 두루미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들은 ‘건네주는 자’이지만 조건을 동시에 달아 아무나 다 건네게 해주지는 않는, ‘사악한 자’들이기도 하다. 아메리카 신화에서는 이 두 성격이 하나의 인물 안에 합쳐져 표현되는 반면, 일본 신화에서는 각기 다른 인물로 나뉘어 묘사된다. 또 서양에서는 여러 모티프를 가지고 유일무이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반면, 일본에서는 각 모티프들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이들을 단순 병렬하여 이야기를 만든다. 서양 신화가 각 요소들이 전체의 틀 안에서 섞이며 통합되지만 일본 신화는 각 요소들을 섞지 않고 그저 나란히 놓을 뿐이다.
음악에서 화음을 먼저 고려한다면, 각각의 소리는 그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서만 역할하고 전체 속에서 그 각자는 묻히거나 사라진다. 회화에서의 색도 마찬가지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섞이면 녹색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노란색과 파란색 각자는 결과가 되는 녹색이 된 후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전체 속에 묻혀버린, 뒤섞여버린 상태의 음이나 색은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올 수 없다. 일본 문화는 그저 각 순수 상태를 구별하고, 병치하고, 그들의 짜임새를 배합할 뿐이다.
혼합된 음이나 색은 전체, 결과 등 최종의 아웃라인이 미리 결정지어진 상태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각 요소 자체, 그 순수 상태에 집중하면 어떤 것도, 거리의 소음이나 쓰레기 위 곰팡이의 색도 그 배열과 조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한 음악 안에서, 또 회화 안에서 ‘순수 상태’로 음과 색을 나열하는 태도는 어떤 음과 색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각 요소들이 동등하게 중요한 무게를 가지며 자리한다.
기괴함을 넘어 경이로움으로
‘조몬 토기’에 대해도 언급도 인상 깊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조몬 토기의 불꽃 문양의 비대칭적 구성, 톱니, 깃털, 돌기 문양, 식물의 소용돌이와 굴곡 문양들이 토기 안에 엮어 들어가면 왕성한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토기들에서 당시 일본인들의 ‘즉흥적’ 영감, 또 그것을 묵혀 두거나 놓치지 않고 신속하게 집행하는 능력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조몬 토기를 조형적, 미학적 관점에서도 해석하는데 기하학적 모티프와 자연적 모티프 등, 얼핏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요소들을 병합했다고 분석한다. 소리, 색, 음식, 신화에 이르기까지 각 요소들의 순수 상태를 발견하고 이를 섞지 않은 채 병치, 조합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듯 보였다. 서로 이질적이어서 상충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각기 다른 순수 상태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낯선 조합, 그것이 촉발하는 위험과 모험을 즐기고, 그 위태로운 도전 앞에 주저함이 없는 태도 또한 일본 문화의 한 특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호 배치되는 것들을 배치 조합하는 과정은 다소 엉뚱하고, 때로는 기괴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순간 창발 되는, 즉흥적 영감을 포착하여, 그 영감에 이끌려 그것을 흡사 변덕 부리듯, 되는대로 발 빠르게 표현해가는 과정이나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질적 요소들의 조합 과정이 절대 마구잡이식이 아니다. 상호 배치되고, 모순되는 것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 결국 하나의 위대한 예술로, 전에 없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결국 그들 특유의 집요함과 꾸준함, 집중하는 힘과 절제력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즉흥성, 신속성, 집행성 앞에서도 뛰어난 자신들이 기술을 마냥 쏟아내지 않는 이들의 절제력과 흙을 하나의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는 명상적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절제와 명상적 태도로 엉뚱하고 기괴한 것들 사이에서 마음과 질료와 손 사이의 미묘한 힘을 포착하고 이들을 연결하며 균형을 맞추고 조화를 이끌어 이들을 경이로움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에서 일본 문화의 또 다른 특이성이 있다.
어떤 고정 값도 거부하는 일본
문화, 예술에서 확인되는 일본인들의 이 같은 태도는 그들 삶의 철학과도 일치한다. 전체, 결과 등을 먼저 상정하고 그것이 위계로 선행하고 나머지가 그에 맞게 부분으로 역할 하는 예술을 거부하듯, 주체, 주관자, 하나의 중심이나 하나의 위계를 거부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서양이 ‘나’라는 것을 제1의 명징한 사실로 여기는 것과 달리 동양, 일본의 세계관에서 서 아(我)라는 것은 언술, 개념적 표현일 뿐 그 자체에 지속하는 요소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각 존재는 생물적, 심리적 현상으로 어떤 임시적 배합에 지나지 않는다’(51)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 철학이 이 주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이 주체에 대해 원심적 사고를 한다면, 일본은 주체를 구심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모든 과정의 끝에 위치한다. 다양한 요소(순수 상태, 순수 조건)들의 배열, 배합과 구성의 임시적 결과로 ‘나’를 만나는 것이지, 주체자로서의 ‘나’가 이 조건들을 생성해고 주관하는 것을 아니라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삶에서 어떤 고정 값도 갖지 않는 인물로 선승이자 기인 화가, 도예가이자 서예가인 ‘센가이’를 소개한다. 당시 선불교 스님들은 소박하고 투박한 그릇들을 찾아 나섰는데, 마을에서 그저 장인들이 대강 만든 또 농민들의 보잘것없는 그릇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불규칙한 형태를 보이고 그 질감 또한 까칠하고 울퉁불퉁했다. 센가이로 대표되는, 당시 선불교 스님들이 연습했던 것은 자신들이 길 위를 걷다 그저 우연히 만나게 된 그 그릇들을 ‘아름답다’, ‘추하다’ 구분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애초에 이분화된 가치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이분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센가이의 그림들은 단연 계획되지 않는 ‘즉흥성’이 돋보인다. 그의 그림은 자신 앞의 그 어떤 현실들도 외면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또 미리 예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대로 그 현실과 자신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즉흥적으로 만나 빚어낸 결과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센가이 작품의 공간적 형태가 아니라 시간적 형태라고 강조한다. 공간은 시간이 멈춰 있는 고정 값을 가지는 반면, 시간은 그 자체로 멈춤 없이 변하고 있는 흐름이다. ‘시간’으로 세상을 이해할 때 거기에 일관되거나 항성적인 것은 없다. 레비–스트로스는 센가이 선사를 통해 일본 문화와 불교를 연결하며, ‘불교에서는 각 사물 혹은 각 존재라는 명백한 개별성이 연속된 물리적, 생물적, 심리적 현상들로 표현’(122) 된다고 말한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삶의 배경과 함께 일본은 고정되고 항상적 ‘오브제’로서의 문화와 예술을 거부한다. 이들은 아(我), 주체, 이분법의 실체 없다는 깨달음, 모든 존재, 예술이 여러 현상들의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조합이라는 깨달음이 일본인의 삶과 문화를 관통한다.
<달의 이면>이 어떤 책인지 선생님 글을 읽고 비로소 조금 알게 된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