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안산어촌민속박물관] 답사 후기 – 소금밭 사람들
이른 아침 도착한 안산은 안개가 끼고, 부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연한 봄 날씨였다. 이번 답사는 《안산어촌민속박물관》으로 다녀왔다. 계획대로 9시 30분에 박물관 정문에 집결했다. 앞마당에는 기차로 보이는 전시물이 있었는데, 노란색 운전칸과 연결된 바로 뒤 칸에는 짐이 실려 있었다. 전시물을 지나 큰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먼저 달님의 강의를 들었다. 우리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이면서 시간에 따라 크고 다양한 변화를 만드는 이곳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윤 선생님은 서해바다가 큰 조수 간만의 차로 유명하다고 했다. ‘평균조차는 5.84m, 가장 낮은 수위일 때 –1.02m로 그 차는 6.86m나 된다(『시흥 오이도와 인근 어촌 민속』(시흥문화원), 126쪽)’. 오전 일찍 도착해 전곡항에서 잠시 보았던 갯벌이 길고 넓게 펼쳐졌던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여러 질문을 품고 관람에 나서기로 했다. 경계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경계를 생각할 수 있는 유물은 무엇이 있을지, 채집이 용이한 바다는 어떤 곳인지, 채집 방법과 도구는 어떻고 육지와는 무엇이 다른지 등등.
나는 이번 관람에서 염전 미니어처가 인상적이었다. 얼마전 동네 지인이 5년 된 천일염을 한 포대 주었다. 포대에는 전남 영광군으로 출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답사에 와서 생각해보니 서해에서 온 소금이었다. 넓은 갯벌을 가진 서해는 소금을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농촌의 구획된 작물 밭처럼 어촌에도 소금밭이 있다. 소금밭은 위치마다 하는 일이 다른지 해주, 결정지, 증발지 등으로 이름이 구분되어있다. 일하는 것을 상상하면 왠지 염부들이 소금을 캐는 광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염전 옆에는 소금 창고 앞에서 소금 가마니의 무게를 측정하는 사람들과 소금을 운반하는 열차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바빠 보였고, 큰 염부 숙소가 위치해 있다. 각 영역이 어떤 일을 하며 소금이 만들어질까, 사이즈가 큰 숙소는 왜 필요할까,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 같네 등 이런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눈으로 보아서는 작업 시스템이 구분되어 염전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저곳에서 어떤 풍경을 만들어냈을까 궁금했다. 이 일대 염전과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안산의 동주염전은 1950년대에 만들어졌고, 조금 위에 위치한 시흥의 군자염전(1920년)과, 소래염전(1930년) 더 일찍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다. 염전이 생기면서 염부 생활을 하는 주민들도 있었고, 염전을 조성하고 일을 하기 위해 중국과 한반도 북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왔다고 한다. 미니어처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살고, 일했던 것 같다. 숙소가 큰 이유가 그것인가보다.
농촌에서는 여자들이 밭일을 하고 집안일도 하는데 이곳 염전에서는 일이 너무 고되서 그런지 여자들은 새참을 이고 나르는 사람만 보였다.
자료를 탐색하던 중에 나는 박물관 마당에서 스치듯 지나쳤던 그 열차가 염전에서 소금 가마니를 나르던 화물열차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미니어처와 그 모습이 조금 달랐다. 미니어처 열차는 석탄 연료를 쓰고, 마당에서 보았던 기차는 가솔린엔진으로 움직이는 화물열차다. 이 열차는 이름이 있다. 기관차에서 “가릉가릉”소리가 난다고 해서 ‘가시렁차’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시렁차의 등장으로 육로로 소금 운송이 용이해졌다고 하는데, 바퀴가 바쁘게 돌아가는 그때의 염전을 상상하게 했다. 우연히 발견한 옛 영화에서 이 열차의 또 다른 사용법이 놀라웠다. 바로 아이들의 통학용 교통수단이다. 원주민과 이주민으로 구성된 염전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삶의 방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다양성이 주는 삶의 풍성함보다는 불안과 번거로움이 먼저 떠오르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영화 <엄마 없는 하늘아래> 가시렁차 타고 등교하는 아이들(시흥 갯골)
” target=”_blank” rel=”noopener”>” target=”_blank” rel=”noopener”>
동주염전 소금궤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