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 살과 뼈(단양 수양개 유적과 울산 후포리 유적)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2024.09.08./오선민
살과 뼈
너와 함께인 나
나에게 이번 한반도 남부 선사유적 답사는 죽음과 함께 하는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일차적으로는 답사의 내용 때문이다. 주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유적 박물관을 중심으로 둘러보았는데, 유적지 자체가 선사인들의 생활 터전이다보니 자연과 직접 맞닿은 고대인의 주거 생활에 대해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주거 유물 대부분은 장례 유물이었다. 이차적으로는 본 답사 전후에 몸풀기 식으로 둘러본, 해방기 부산의 흔적이 남은 아미동 마을의 죽음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아주 심오한 어떤 시공이 항상 내 옆에서 숨을 내쉬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답사 내내 흥분이 되었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쉴 곳이 필요하다. 인간의 하루가 열리고 닫히는 장소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으랴. 답사팀도 마찬가지였다. 유적지에서 다양한 유물을 공부하는 것이 한없이 즐거운 일이기는 해도, 내일 다시 박물관 오픈런을 하려면 밤에는 들뜬 탐구열을 좀 내려놓고 자신의 몸을 좀 돌보아야 한다. 사진을 찍느라 바빴던 손과 유물 앞에서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오래 서 있어야 했던 발바닥을 좀 문지르며 칭찬해줄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살들아 내 살들아, 오늘도 수고했노라. 그렇게 몸을 좀 돌보게 되면, 함께 돌아다녔던 친구의 부어오른 발도 눈에 들어온다. 아, 이 사람과 함께 걸었구나하는 감동도 밀려온다. 피곤해서 혼자 눕지만 어쩐지 마음은 옆 사람에게로 향한다. 집이란 이처럼 하루 동안 내가 함께 한 이들을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함께 한 이들이라.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을까? 유난히 뜨거웠던 8월 말의 하늘과 피처럼 정신을 돌게 해준 커피까지. 70만 년 전의 기억을 품고 있는 동굴과 몇 억 광년에서 빛을 보내고 있는 별들까지. 한이 없다. 나는 매일밤 숙소의 포근한 새 이불 아래에서, 삶의 전체가 신 즉 자연의 너그러운 호의로 영위됨을 느꼈다.
그런데 이런 성스러운 느낌을 평소에는 왜 잘 받지 못했을까? 여기서 선사 유적지마다 어김없이 중요하게 보존한 죽음의 형상들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집에는 내 얼굴만 비추는 거울만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취향과 욕망으로 도배된 물건 속에서만 살다보니 타인과 우주를 놓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사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항상 죽음의 형상을 놓치지 않고 생활 가까운 자리에 두었다. 그것은 뼈다. 살은 풍화되고 없지만 뼈는 남아 당시의 삶을 들려준다. 동물의 뼈든, 인간의 뼈든, 한때 피가 흐르던 그 육체는 숭고한 사물로 남아 삶의 신비를 들려준다. 이런 뼈를 고대인들은 생활 공간 가까이에 늘 두었다. 이제부터 뼈와 함께 하는 일상을, 유물 전시관의 설명과 기타 자료를 통해 재구해보자. 그리고 각각의 뼈들이 전해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보자.
영원한 건 절대 없어 – 70만년 전 뼈들이 말해주는 것(단양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
한반도 구석기인들의 기본 주거 형태는 동굴이다. 물론 후기에는 공주 석장리나 연천 전곡리 유적지에서 추론할 수 있듯 굽이진 강가에서 움집 등을 짓고 생활했을 것이다. 최초의 동굴 생활자의 모습을 떠올려보려면 단양 수양개 선사유적 박물관으로 가보는 것이 좋다. 충북 단양(丹陽)은 한반도 최대의 구석기 마을로 알려져 있다. 단양이라는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한다. 조양은 빛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다. 단양은 한반도인들에게는 신선이 살 정도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풍요로운 단양강이 흐르고 석회암 동굴이 많아 구석기 유적도 동굴을 중심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답사팀이 도착했던 날은 9월 1일로, 가을이라지만 여름의 남은 햇살이 펄펄 타올랐다. 조양력(調陽力)이 폭발했다고나 할까? 뜨거운 하늘 위로 단양 양방산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둥둥 떠 있어서 시원하게 느껴졌다. 단양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석회 동굴이 있다는데, 깊이와 높이가 대칭을 이루는 곳이 아닐 수 없다.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은 한반도 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전시관 입구로 들어가면 한반도 구석기시대 연표가 나온다. 이런 연표는 볼 때마다 새롭다. 매번 안 외워진다는 얘기다. 어쨌뜬 표는 70만년 전에 시작된 전기 구석기의 대표적 유적지로 단양 금굴 유적과 50만년 전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을 소개한다. 표에 따르면 연천 전곡리는 27만년 전 유적이라고 한다. 공주 석장리에서도 70만 년 전 석기가 나왔다고 한다. 모두 전기 구석기 유적지이지만 가장 연대가 앞선 유물이, 공주 석장리보다 단양에서 많이 나왔다. 그래서 단양은 ‘석기 제작소’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다.
전기구석기 때 공주 석장리에서는 주먹대패 도끼가, 연천에서는 주먹도끼가 나왔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20만년 전 쯤 출현해서 10만년 전쯤 아프리카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70만 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에렉투스로부터 진화한 종이니, 한반도에서 에렉투스로부터 사피엔스로 진화한 흔적이 있을까? 한반도 선사 유골의 DNA 분석결과 한반도 사피엔스는 아프리카계 기원이라고 한다(연천 전곡리 전시 자료 설명 참고). 공주 석장리나 연천 전곡리, 단양 수양개에서 살았던 이들은 호모 에렉투스로 북경 원인이 기원이다. 단양의 금굴이나 석장리의 들판에서 씩씩하게 활동했던 이들이 호모 에렉투스라니 그들은 집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한반도는 한민족의 땅이라지만, 멀리서 보면 에렉투스와 사피엔스라고 하는 다른 두 종이 공존했던 삶의 터전이다. 살았던 기간을 놓고 보면 70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까지로 대략 추산할 때 호모 에렉투스가 더 오래 머물렀다고 해야 한다. 과연 ‘누구’ 땅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럼 그 많던 호모 에렉투스는 어디로 갔을까? 멸종했다. 한반도 안에서 인류의 한 종이 사라져버리기도 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주함에 따라 단양에서는 에렉투스와 사피엔스가 주먹을 쥐고 다투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지금의 내가 인간 관계를 다투고 경쟁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어쩌면 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급변하는 빙하기 기후를 함께 돌파하려고도 했을지 모른다.
호모 에렉투스의 멸종은 고고학적 관점에서는 주로 기후 변화로 설명한다. 빙하기에 따른 급격한 기후 변화에 에렉투스는 계속 일격을 맞게 되었던 반면, 사피엔스는 그럭저럭 문제를 돌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이 소개하고 있는 동굴의 유물들을 보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단양 수양개 선사 유적관은 단양 구낭굴 유적의 출토품을 소개하고 있다.
“구낭굴유적의 발굴 결과 전체 8개 층위로 구성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이 가운데 석기, 뼈연모 등의 문화유물 및 원숭이, 사슴, 곰 등 짐승뼈화석이 3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구낭굴에서는 짐승화석뿐만 아니라 인골화석이 출토되었는데, 손가락뼈 2점, 손등뼈 1점, 발가락뼈 1점, 발뒤축뼈 1점 등 모두 손과 발 부위의 것이어서 체질적 특징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형태와 특징으로 보면 남자 어른의 것으로 추정된다. 3차 발굴에서 석기는 약 35점이 3층, 6층, 8층에서 출토되었는데, 외부의 석재를 쓰지 않고 대부분 굴 내부의 석회암 낙석과 종유석을 돌감으로 하였다. 석기의 종류로는 몸돌, 격지, 새기개, 자르개, 긁개 등이 있으며 대부분 조리용 도구이다. 그 외에 긴 대롱뼈에서 떼어낸 격지에 잔손질을 가한 뼈연모가 출토된 바 있다.”(전시 설명)
유적 전시실에 구낭굴 출토 짐승화석과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을 보니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다. 구낭굴 유적에서는 사슴, 짧은꼬리원숭이, 호랑이, 곰, 코뿔이, 다람쥐, 토끼 등 총 25종의 짐승화석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70만년 전 무렵 단양에서는 원숭이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에 지금의 동남아시아와 같이 매우 덥고 습한 시절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전시실 입구에 복원되어 있는 쌍코뿔이다.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에는 1976년~78년에 청주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 석회암 동굴 유적에서 발견된 쌍코뿔이 아래턱(L 56.9cm)과 머리뼈를, 역시 청주 두루봉 새굴에서 출토된 옛코끼리 상아(L 61.8cm)을 전시한다. 모두 진품이다. 아래턱만 봐도 성인 남자 머리 하나쯤은 꿀꺽 들어갈 정도다. 쌍코뿔이의 뼈는 북한의 검은모루동굴에서도 나왔다고 한다. 단양 금굴과 청주 동굴의 코뿔이는 따뜻한 환경에 어울리는 쌍코뿔소이고, 제천 점말 동굴에서는 털코뿔소가 아닐까 추정된다는 보고도 있다. 털코뿔소의 경우 유라시아 대륙에서 20만 년 전에 출현해 1만 년 전에 멸종했다고 하는데, 어깨높이 1.8m, 몸무게는 3톤에 이르는 큰 동물이다. 몸에는 거칠고 긴 바깥쪽 털과 미세한 솜털이 층을 이루어 체온을 유지한다. 그러니 코뿔소는 추운 기후에 적응한 동물이다.
단양은 원숭이 뼈와 코뿔이 턱이 함께 놓여 있는 땅이다. 내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생물학적으로 나고 자라 크고 노쇠하기 때문에 단선적 시간관을 가정하기 쉽지만, 자연 전체의 입장에서 시간을 과연 앞으로 흐른다고 할 수 있을까? 원숭이와 코뿔이와 함께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서로를 전혀 모르고 살았지만 이렇게 또 우리의 답사 안에서 함께 만난다. 나를 둘러싼 시공간의 범위는 그토록 크고 광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 생각을,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간에 옳고 마땅한 것이라고 고집하진 말아야겠다. 이번 여름은 예년보다 더웠다고 뉴스는 비명을 지르지만, 과거의 원숭이들이 듣는다면 이게 뭐가 덥냐고 할 것이며 코뿔이는 나보다 더 끔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고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진실이 한 공간에 섞여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또 하나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이 있다. 이들 뼈가 무엇과 함께 놓여 있느냐하는 점이다. 70만 년 전 유적부터 후기 구석기까지의 유적층에서 발견된 동물뼈들을 떠올리자. 인간이 동굴을 드나들지 않던 시기에 원숭이나 쌍코뿔이가 스스로 찾아와서 죽은 것이 아닐까? 자연사한 동물인지 인간의 사냥에 의한 동물인지를 알아보려면 뼈에 새겨진 돌칼 자국 흔적을 찾으면 된다. 보통의 경우 구석기 동굴 안에서 발견된 동물뼈에 인위적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동물들은 선사인의 생활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동물뼈는 선사인의 일상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구석기 동굴 안에 인골은 없는가? 남한에서는 구석기 인골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양 상시 바위그늘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의 머리뼈가 나왔다고 하지만 작은 조각일 뿐이다. 청주 두루봉 동굴에서 ‘홍수아이’라는 사람 뼈가 수습된 적도 있는데 출토 맥락이 분명치 않아 구석기로 특정하기 어렵다. 남한은 특히 산성토양이어서 인골이 오래 남아 있기 어렵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평양 주변 석회암지대 동굴에서 동물화석과 인골이 곧잘 발견된다. 북한 대현동에서는 머리뼈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를 ‘력포 사람’이라 부른다. 약 10만 년 전 화석이라 하니 호모 에렉투스일 것이다. 룡곡 동굴과 승리산 동굴에서는 호모 사피엔스의 머리뼈도 나왔다고 한다. 만달 동굴에서도 흑요석제 잔몸돌과 함께 온전한 머리뼈가 나왔다(『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 선사 시대』, 71쪽). 연천 전곡 선사박물관에는 이 만달인의 재현 마네킹이 있다. 넓적한 턱과 다부진 광대가 아주 듬직–핸섬한 사냥꾼이다.
이런 여러 정황상, 구석기의 동굴은 동물뼈와 함께 인골이 함께 놓여 있는데, 바로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살기도 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나는 집에 먹고 남은 뼈를 보관하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치킨이나 없어서 못 먹는 갈비찜 같은 것도, 일단 먹고 나면 종량제 봉투에 담아 멀리 집 밖에 버린다. 그러나 선사인들은 동물의 뼈와 함께 살았다. 함께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뼈로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먹은 자와 먹힌 자가 동굴이라는 태고의 어둠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구석기의 동굴은 숲에서의 채집과 사냥을 마무리하면서도 가족과 친구와 함께 식사를 했던 곳이다. 먹기도 하고 쉬기도 했던 그 자리에는 어떤 구석에 늘 어떤 이의 뼈가 있었다. 여기서 ‘동굴’이라는 장소에 대해 더 생각해보자. 방방마다 환하게 전깃불 켜져 있는 집에서 생활하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동굴은 너무나도 어둡다. 이번 답사에서 액티비티 차원에서 다녀온 단양 고수 동굴 입구에서도 느꼈는데, 한낮에도 동굴을 등지고 그 입구에서 밖을 바라보면 의식이 저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동굴은 그 자체로 의식의 어떤 어둠과 공명하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단양의 동굴들은 모두 석회 동굴 특유의 습기 때문에 그 안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어떤 제의적 의식을 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물론 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였을 그들에게 어떤 상징조작적 활동이 있으리라고 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최초 철학이 동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동굴이 주는 심오한 어둠의 상상력이 호모 에렉투스에게 꾸준히 의식적 압력을 가했다고 가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낮에도 밤인 곳이고, 깊이를 알 수 없으며, 피우는 불빛에 따라 모든 것이 어른거리며 소리 또한 울리는 장소.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고 무의식의 저 바닥과도 같은 곳. 단양인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심오한 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동물의 뼈와 인골을 가까이 두며 살았다. 이들은 뼈와 함께, 내가 먹고 없앤 존재 그리고 나와 함께 한 모든 존재의 흔적을 자기 삶 안에 들이며 생활했다. 나고 죽는 모든 것과 함께인 오늘을 사는 것. 그런 삶의 태도를 배워야겠다.
네 머리 위에 죽음을 두라 : 신석기 2차장이 말해주는 것(〈울진 후포리 신석기 유적관〉)
구석기 유적지를 떠나 이제 신석기 유적지로 간다. 뼈의 새로운 위치 파악이 필요하다. 후포리 선사유적은 후포3리의 바다쪽으로 돌출한 해안단구 상면인 해발 45m의 등기산 정상에 있다. 등기산이라고는 하지만 보통의 산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인근 등기산 스카이워크 끝에서 바다를 뒤로 하고 돌아보면 해변에 나 있는 절벽의 조금 높은 언덕 정도이다. 고대에 존재했을 인근의 마을은 아마도 이 절벽 아래로 생긴 작은 해변을 끼고 여기저기에 자리 잡았으리라. 신석기 유적이라고 평가되는 후포리 유적은 이 바닷가 마을 공동체들의 공동묘지다. 발굴 당시 큰 바위 사이에 약 4m 직경의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 무덤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직경 4m면 작지 않은 크기다. 일부러 파고 일부러 안치한 죽음의 장소다.
보통의 신석기 무덤은 마을 안 조개무지에서 발견된다. 구석기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개를 먹은 사람들은 그 껍질과 함께 조상의 뼈를 묻고 살았다. 생활 공간 가까이에 조개껍질과 인골을 두고 생활했던 것이다.
“경남 해안지역 패총 유적에서는 다수의 신석기 시대 무덤이 조사되었다. 통영 연대도 패총은 여러 구의 인골을 매장한 집단 매장 유적이다. 무덤의 구덩이를 얕게 파고 시체를 펴묻거나 굽혀묻는 방식으로 안장을 했는데, 그 위에 잔돌과 검은 흙 또는 조개가루를 덮은 다음 큰 돌을 다시 덮는 형태다. 부산 범방 패총에서는 11~12세 전후 인골이 펴묻기 상태로 안치되어 있었는데, 목 부분에 연옥제 목걸이 1점과 목과 어깨 사이에서 사슴의 어깨뼈로 만든 뒤꽂이가 출토되었다고 한다.”(『복천 박물관 도록』, 23쪽)
그런데 후포리 유적은 해안가 마을보다도 훨씬 높은 자리에 마련되어 있다. 후포리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공동묘지가 마을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점과 세골장이라는 데에 있다. 세골장이란 2차장의 한 형식으로 사자의 시신을 1∼3년간 풀이나 이엉으로 덮어 육탈(肉脫)이 될 때까지 기다린 후 뼈만 추려 깨끗이 가다듬어 다시 묻는 방법이다. 시신을 바로 묻는 것에 비해 절차가 복잡하고 노동비용이 많이 드는 장법(葬法)으로 엄청난 노력과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피장자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짐작할 수 있다. 후포리의 인골들은 부패와 풍화가 심한 상태로 파편화되어 있어, 고스란히 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 무수한 파편을 대략 추산해보면 최소 40명 정도이며 나이는 대략 20~30대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전쟁 통에, 혹은 전염병으로 몰살되었는가?
후포리 무덤터는 전체가 3개 층위 구조를 가지고, 한번에 모든 인골이 매장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무덤이 만들어졌다. 이런 이차장 관습이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 파커 피어슨에 따르면 인류가 조상 개념을 가지고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과 공동체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묶으려 했을 때 2차장의 형태가 출현한다고 한다. 인류 최초의 2차장은 예리코 지역에서 나왔다. 이 두개골들은 회반죽으로 새 얼굴을 만들어 붙이고 바다 조가비로 눈을 박았다. 우리는 이런 얼굴들이 돌아가신 각 인물의 기억된 얼굴을 재현하려 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어떤 형태의 두개골만 골라 회반죽 칠을 한 점으로 보아 한층 복합적인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눈과 함께 코와 눈썹도 세심하게 모양을 만들어 붙이고 칠을 했는데, 입은 빠지거나 최소한으로만 모양을 만들어 붙였다. 이는 회반죽 칠을 한 두개골 중 다수에 아래턱이 없는 사실로 설명이 될 수 있다. 다만 아래턱이 있는 경우에도 입은 여전히 빠져 있거나 격하되어 있다(마이크 파커 피어슨, 이희준 옮김,『죽음의 고고학』, 293쪽 참고).
이런 두개골들은 우리에게 거의 1만 년 전 인물들의 초상을 제공한다. 이렇게 회반죽함으로써 사람들은 죽은 자에 대한 표상을 새롭게 가진다. 산 자들이 조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리코의 시신들은 산 자들의 바로 발밑에 묻혔다. 하지만 그 두개골들은 계속해서 필요에 따라 회반죽 칠을 거쳐 산 자들의 생활 공간에 들어와 있었고, 그런 연휴에는 다시 집 안 구덩이 속에 다른 껴묻거리와 함께 묻혔다고 한다. 시신도 두개골도 사람들의 집 자리 밑이나 그 표면으로 왔다갔다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집자리에 파묻었다 들춰냈다 다시 파묻으면서 형성된 거주 표면을 ‘Tell’이라고 한다. 후포리 유적도 2차장에는 엄청난 노력이 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런 노력을 감내할 정도로 중요한 이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후포리의 2차장이 초기 예리코의 2차장과 다른 점은 집 안이 아니라 집 위에 모셔진다는 점이다. 아마 등기산 인근 마을 공동체들의 공동 조상신으로 모셔진 것이 아닐까? 또다른 차이는 예리코의 2차장이 두골의 재가공이었던 것과 달리 후포리에서는 다리뼈와 돌도끼가 나란히 출토되는 방식이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옥류의 유물이 나왔다는 점도 있어서 후포리의 2차장을 마을 제천의례와 연결시키기도 한다(최수민,「울진 후포리유적과 한반도 남부의 신석기 선도제천문화」, 선도문화(Journal of Korean Sundo Culture), Vol.34 No.- [2023]).
후포리의 유적은 동굴 유적과 다르다. 동굴에서 뼈들은 동물뼈와 인골을 구분하지 않고, 산 자와 죽은 자를 따로 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후포리 유적은 죽음을 위에 생을 아래 쪽에 배치한다. 죽은 이들이 산 자를 내리누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는 명확한 거리 두기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후포리 등기산 정상은 그 스스로가 누군가를 내리누르기에는 너무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의 절벽에서 더 높은 하늘과 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기에 그렇다. 이 유적지의 뼈들은 위압적이지 않다. 조상과 후손은 모두 후포리 앞의 검푸른 바다를 내다보며 나고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 자기 머리 위에, 나를 있게 한 부모님과 그 부모님, 또 그 부모님을 두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렇게 부족한 나에게도 생명을 허락한 부모가 있었다. 나는 나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며 누군가의 위대한 부모가 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죽음 위의 삶 : 〈부산 아미동의 비석 마을〉
한국의 예리코를 찾자면 아마도 부산 아미동이 될 것이다. 나는 친구들과 이번 본–답사에 앞서 아미동을 방문하며, 생이 죽음 위에 서 있음을 생생하게 경험해볼 수 있었다. 아미동은 영도를 앞에 둔 부산 서쪽 구릉인 아미산 중턱에 위치한 비석 마을이다. 말 그대로 비석을 주춧돌 삼아 집을 세우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의 남산 해방촌이 그렇듯, 산 언덕에 집들을 짓고 살아가다보니 골목이 구불구불 좁고 복잡하다. 그 구석구석에 기틀이 되고 이정표가 되는 것이 비석 파편들인데, 비석의 주인은 전부 일본인이다.
해방기 아미동의 집들은 비석과 그 주변을 둘러싼 제단석 위에 나무틀을 세우고 흙을 발라 단촐하게 지어졌다. 이 비석은 나를 먹이고 살린 이의 것이 아니다. 일제 시대 부산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의 것이므로 굳이 말하자면 치가 떨리는 적의 묘비다. 적의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다니, 아찔하고 답답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부산근현대 역사관〉에서 아미동의 유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가, 그런 모습에 관심을 둔 해설사님과의 대화에서 전혀 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적의 비석이건 또는 그 무엇이건, 낯선 부산에 와서 살길 막막했을 피란민들에게 네모 반듯하고 튼튼한 돌은 큰 의지처가 되었을 것이다. 당장 살길 막막했던 이들에게 비석은 일단 몸을 기댈 자리를 주었다. 정신 없는 해방촌 식구들에게 이 비석만큼 귀한 물건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미동 어른들은 이름 모를 묘비의 주인을 때에 맞춰 기리기도 하며 현재까지도 함께 산다.
조선인을 괴롭힌 일본인이라지만, 그들이 남긴 묘비가 누군가에게 살 자리가 된다. 선한 자의 죽음과 악한 자의 죽음 사이에 그을 수 있는 금이란 없는 것이다. 구낭굴의 쌍코뿔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기를 잡아 먹은 이들 근처에서 사후를 보내야 하니 원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코뿔이가 남긴 뼈는 그 모든 속세의 비극적 인과를 넘어서서 하얗게 빛난다.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던 일본인들이지만, 그들도 낯선 부산에서 살아보려고 온갖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겨우겨우 살아 남았으리라. 그런 이들이 남긴 비석인 것이다.
식민지인으로 살았다고 해서, 그런 나의 조상이 평생 순결하게 나쁜 일 하나 하지 않고 살았으리라고는 볼 수 없다. 원숭이뼈와 쌍코뿔이의 뼈가 말해주듯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역사의 모든 업보가 다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미동 비석 마을은 죽어도 끝나지 않는 삶의 인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어떤 동영상을 보니, 도시 계발로 철거되는 비석들을 바라보며 서운함을 느끼는 주민의 이야기가 나온다. 죽음은 우리 각자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의 역사적 조건을 걷어내고 본질을 보라고 한다. 우리는 결국 뼈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나를, 나를 먹은 자와 내가 괴롭힌 자가 기억해준다. 무섭고도 아찔하다.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사는 아미동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원숭이와 쌍코뿔이의 단양을 그리며, 나는 답사를 마친다.
『복천 박물관 도록』
『또 다른 세상으로 – 구석기인들의 죽음과 매장』, 석장리 박물관, 2010.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마이크 파커 피어슨, 이희준 옮김,『죽음의 고고학』, 사회평론아카데미
최수민,「울진 후포리유적과 한반도 남부의 신석기 선도제천문화」, 선도문화(Journal of Korean Sundo Culture), Vol.34 No.- [2023]
사진 1. 청주 청석골 구석기 동굴 사진
사진 2. 울산 후포리 바다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3. 울산 후포리 발굴 사진
사진 4. 부산 아미동 비석 마을의, 비석 위의 집
이거이 사진이 참 적절하지 않네요. 최종 원고 마감일까지 다시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