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바다, 대칭성의 공간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초고)/240915/강평
바다, 대칭성의 공간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
답사 준비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몬 답사를 애써 준비했는데 답사 보름 전 일본 지진 소식으로 무산되었다. 급하게 부산 일대 유적지로 변경해서 처음부터 다시 동선을 짜고 예약을 하느라 시간이 촉박했다. 여기에 답사 일주일 전 스프링클러 오작동으로 물벼락이 쏟아져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비상이었다. 5분도 되지 않아 총무팀에서 배관 시스템과 화재 경보를 강제 차단했지만, 짧은 시간에 서버, 복합기, PC, 시스템 에어컨이 침수되었다. 업무가 셧다운되었다. 아직 답사 계획도 보완할 것이 남아있고, 회사 일도 어떻게 하든 마무리를 해야 답사를 떠날 수 있기에 마음이 급했다. 나는 고객들에게 보고서 납품 지연에 따른 항의와 향후 계획을 닦달받느라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바쁜 시즌에, 여태 한번도 벌어지지 않은 일이, 왜 하필 지금’이라며,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원망’을 내뱉었다. 또 나는 답사 준비 미흡에 대해 일부 팀원이 ‘원망’하자 어렵게 준비한 사람도 있는데 너무 ‘나 중심’ 사고가 아니냐고 말했다. 나는 이번 답사를 다녀와서 나와 그 팀원의 ‘원망’의 결이 ‘나 중심’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준비한 사람의 노고가 보이지 않느냐고 그 팀원에게 말했지만, 나도 그간 누군가의 도움으로 유지되었던 수많은 노고를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 중심’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번 답사는 ‘잃어버린 대칭성을 찾아서’를 모토로 하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는 ‘나만은’이라는 생각을 꼭 붙잡고 있었으니 잃어버린 대칭성은 가까이에 있었다.
이번 답사로 한반도 중남부 바다에 살던 사람들의 기록과 흔적을 만났다. 바다에서 고래 라는 ‘자원’은 인간과 같은 생명이고, 인간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생명을 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침해로, 최대한의 예를 갖춰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대칭성의 원리’이다. 한반도 선조들은 바다를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제의를 지냈고, 바다의 선물을 수확하기도 하고 때로는 바다 생물들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다. 바다길은 생존을 위해 식량을 구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지만 국가가 등장한 이후로는 세곡(稅穀)의 운반길이기도 했다. 국가와 문자는 함께했고, 그들의 삶은 문자로 기록되어 생생하게 그날을 펼쳐보이고 있었다. <국립 해양 박물관> 특별전 <임교진의 조행일록>을 보며 바다에서 제를 지내며 무사를 기원하고, 장애물 넘기를 하듯 공무를 수행하던 스펙타클한 그날들이 그려졌다. 그 기록을 보며 문자가 아니라 조개더미 속에서 조개 껍질, 토기 조각, 고래 뼈로 남겨진 선사 시대 유물 역시, 기록은 없지만 상상 속에서 스펙타클 하게 그려졌다. 한반도 바다에서 살던 선조들에게 바다는 내 뜻과 상관없이, ‘나 중심’이 아니라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번 답사는 선사 시대뿐만 아니라 역사 시대도 함께 공부하게 되어, 국가 중심 문자 사회와는 다른 무문자 사회의 특징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바다만 적응하면 되었지만, 역사 시대 사람들은 바다와 더불어 국가에도 적응해야 했다. 물론 국가가 때로는 울타리가 되어 생존 등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세금도 내야 했다. 나는 이번 답사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 선사 시대 고래잡이 배, 조선 시대 조운선, 작살포를 장착한 포경선이라는 서로 다른 배 3척을 탔던 사람들을 만났다. 한반도 바다 사람들은 모두 바다를 경외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 분투했다. 나는 상상의 탑승을 통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바다 위에서 내가 잃어버렸던 대칭성‘’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고래잡이 나무 배에서
선사 시대 동삼동에서 나무 배를 타고 고래를 잡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동삼동 패총 전시관>과 <장생포 고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무문자 사회의 것이기에, 문자가 아니라 유물로만 말한다. 이 유물들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시대와 비슷한 시기의 유물로서 암각화 그림을 설명하고 당시 생활상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삼동 패총 전시관>에 전시된 고래 뼈, 특히 귀 뼈는 죽어서 떠내려온 고래가 아니라 직접 사냥한 고래의 증거물이다. 고래는 죽고 나면 귀가 빨리 분리되는데, 만약 죽은 상태로 얻어 걸린 것이라면 직접 사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귀 뼈가 발견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고래 뼈로 그 고래는 혹등고래(humpback whale)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암각화에도 등장하는 고래이다. 혹등고래의 무게는 30~40톤으로 어마어마하다. <장생포 고래 박물관>의 복원된 범고래, 브라이드 고래 골격 크기도 거의 공룡 느낌이 나서 나는 쥬라기 공원에 입장한 느낌이었다. 저렇게 큰 고래를 선사 시대 동삼동 사람 몇 명이 나무배를 저어 작살을 던져 잡았다니 다시금 놀랍다.
그들은 고래를 어떻게 잡았을까?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고래를 잡기 위해 제례를 지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생명을 잡는다는 것에 대한 부화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고래를 잡기 위한 도구 제작, 기술 연마는 물론 고래를 고래의 모습으로 온 신처럼 최대한 공경하며 잡았다. 작년 북해도 답사 때 아이누족이 곰 사냥에서 보였던 공경을 동삼동 선사인들은 고래 사냥에서 보였다.
공경하고 많이 준비했다고 해도 고래 사냥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훈련과 다른 실전의 긴박한 상황이, 매번 펼쳐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배가 뒤집어질 수도 있고, 고래와 충돌할 수도 있고, 고래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고래의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상어의 습격을 당할 수도 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고래잡이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힘들다. 되든 안되든 일단 바다로 나서야 한다. 빈손으로 돌아온 날도 많았을 것이다. 여러 날 빈손으로 돌아오다 보면 조급함, 욕심이 생겨, 평소와 다르게 타이밍이 아닌데도 요행을 바라고 작살을 던지기도 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사고가 났을 것이다. 아무리 갈고 닦는다고 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고래는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야자와 겐지 동화 <나메토코 산의 곰>에 나오는 곰 사냥꾼 고주로처럼 말이다. 고주로에게 곰이 잡혀준 것처럼, 선사 시대 한반도 고래도 때로는 선사인들에게 잡혀준 것일 수도 있다. 잡혀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 안잡혀주면 어쩔 수 없다.
동삼동 선사인들이 고래잡이에만 몰빵한 것은 아니었다. 조개껍질로 토양이 알카리성으로 변하면서 패총(貝塚, 조개무덤)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유물의 80%는 굴 껍질이었다. 조개는 날카로운 도구로 파야 하지만, 바위에 붙은 굴은 손으로 잡아 떼기만 하면 된다. 굴은 채집도 쉽고 영양분도 뛰어나다. 굴로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면 위험하고 힘든 고래잡이는 굳이 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쉬운 것부터 하고 위험하고 힘든 것을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가성비가 몸에 밴 내 생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패총에서는 일본 조몬 토기 조각과 일본 규슈 지방산으로 확인되는 흑요석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는 이미 한국과 일본 사이 대한해협이라는 거친 바다가 있던 시기이다. 부산에서 일본 대마도까지만 해도 직선거리로 45Km이다. 일본에서도 부산 동삼동 산(産) 조개 팔찌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두 지역간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래잡이 배는 고래를 끌고 육지로 와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근거리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흑요석과 조개 팔찌를 교역하려면 원거리 항해가 필요하다. 동삼동 선사인들은 그 먼 거리까지 왜, 어떻게 갔을까. 흑요석은 자연산 유리로서 날카로운 도구로 쓰이거나 장식품이다. 교역물인 조개 팔찌는 장식품이다. 사돈을 맺자고 거기까지 갔을까,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갔을까, 표류를 당해 어쩌다 알게 되었을까, 등대도, 지도도 없는데, 나무 배를 노 저어 갈 수 있을까. 선사시대 동삼동 사람들이 원거리 항해를 했던 사연이 너무 궁금하다.
동삼동 선사인들은 근해에서 고래를 작살로 잡고 일본까지 원거리 교역을 했던 사람들이다. 고래 잡는 기술, 원거리 항해까지, 이들의 능력은 가히 놀랍다. 그들은 놀라운 사냥 기술에도 불구하고,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고래를 함부로 대하거나, 무자비하게 대하지 않는 대칭성 사고를 보여준다.
조운선(漕運船)에서
<조행일록(漕行日錄)> 전시의 부제는 ‘서해바다로 나라 곡식을 옮기다’이다. <조행일록>은 전라북도 함열(지금의 익산) 현감이었던 임교진(1803~1865)이 쓴 일기로 1863년 세곡을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운반한 과정을 담고 있다. 19세기에는 조창(漕倉, 세곡창고)이 속한 지역의 관리가 조세를 걷고, 운반하는 책임까지 함께 맡았다. 임교진은 관할 8개의 고을 현 전북 남원, 익산, 완주, 진안, 충남 금산 일대에서 세곡(稅穀, 세금으로 납부한 곡물)으로 거둔 쌀과 콩 1만 3천여 석을 12척 배에 나눠 싣고 한양 경창(광흥창)까지 무사히 운송한다. 지금으로 치면 익산 시장이 시정(市政)을 보다가 국세청 직원, 물류 팀장, 회계 보고, 인사 관리 등 총괄 팀장까지 하는 셈이다. 조운선은 출발 기한이 엄격히 법에 정해져 있고 최장 운항 기간은 25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람과 조수가 맞지 않아 운항을 하지 못한 날도 많고 풍랑으로 좌초되기도 한다. 시간은 줄어들고, 아직 갈 길은 멀다. 무리하게 운항을 강행했다가는 미션, 목숨도 끝나고, 그렇다고 마냥 안전하게 가다가는 납기일에 맞추지 못해 혹독한 문책이 예상된다. <조행일록>은 구체적으로 지연 사유를 밝혀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 꼼꼼하게 기술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임교진의 조행은 선사 시대 나무 배를 노 저어서 작살로 몇십 톤 고래를 잡는 것과 난이도 면에서는 뒤처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임교진만 운 나쁘게 풍랑을 맞아 고전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운선은 풍랑을 맞아 자주 어려움을 겪었고 태종(1367~1422) 때 기록에 의하면 조운선이 침몰해서 선원 1,000명과 세곡 1만 석이 바다로 사라지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조행 전에 바다와 강에 제를 지내고, 사고가 나면 또 제를 지내 바다, 강에게 비는 장면이 나온다. 제를 지내며 간절한 마음으로, 혹여라도 자신이 잘못하거나 나쁜 생각을 먹지는 않았는지 살폈을 것이다. 조행은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 또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었다. 충남 안흥량(지금의 안면도)은 상습 사고 구역으로, 당시 그 지역에서는 배가 고프다고 우는 아이가 있으면 조운선이 곧 온다, 좌초해서 쌀을 주을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라고 달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좌초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조행일록>에는 나라 세금의 근간인 세곡을 걷고 바다로 운송한 날이 날짜별로 자세히 적혀 있다. 이뿐 아니라 그가 관찰한 바다, 해양생물, 어머니의 제사, 가족의 병환을 걱정하는 인간 임교진의 모습도 담겨 있다. 그 바다에서 아마도 임교진은 공무 수행 중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길고 험한 바다길 위에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경외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 같다. 어찌해도 인력으로는 안되는 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익산 현감이라는 고정된 땅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경험, 그 경험 자체가 바다가 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전시회 앞부분 임교진을 소개한 글 중 ‘건강체질이 아니며, 항해 경험 없음’이라는 특이사항이 인상적이었다. 위대한 기록과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사연처럼 보였다. 전시회가 끝나갈 때 이 소개가 관람객을 배려한 복선이었음을 알았다. 항해 경험이 없는 물류 총책임자의 고난을 예고한 것이었다. 임교진(1803~1865)이 조행을 나선 것은 1863년이다. 환갑이라는 고령이었는데 조운이라는 강행군이 타격이 되었는지, 조운을 성공리에 마치고 승진도 한 다음 해에 바로 사망한다. 그래서 앞서 체력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임교진은 항해 경험은 없지만 자신의 정무 경험을 조운에 십분 발휘한다. 운항은 물때나 풍랑 기운을 아는 도사공의 판단에 전적으로 따랐다. 내가 우두머리다, 하라면 하라고 단순히 일정표에 맞춰 강행하지 않고 상황 판단을 도사공에 맡긴다. 임교진은 항해 경험도 없고 배 운항을 모르니 어쩌면 당연하지만, 자존심과 자기 실적만 채우는 세상의 팀장들이 허다한 가운데 임교진은 오만하지 않고 모르면 묻고, 아는 사람 말을 따른다. 또 12척 배의 관리 상태 차이가 컸기 때문에 어떤 사공이 어떤 배를 운항할지는 제비 뽑기로 했다고 한다. 제비 뽑기는 특혜 논란을 불식시키는 공정한 방법이면서도 어떤 배도 뽑을 수 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겸허함도 포함되는 방식이다. 생각해보니 답사 숙소 배정할 때 우리도 제비를 뽑았다. 제비 뽑기에는 어떤 방에서, 누구와도 잘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좋은 방법이었던 것 같다.
<조행일록> 전시회를 보고 처음에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떠올리며, 국가가 쌀, 콩이라는 계량화, 저장, 운반할 수 있는 재료를 수탈하는 현장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임교진의 일기의 내용을 찬찬히 볼수록 국가의 수탈은 수탈이더라도, 그 현장에서 바다를 마주하며 겸허하게 고래를 잡듯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암각화를 그리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를 지내면 하늘에 기도했던 임교진의 노력에 고개가 숙여졌다. 나는 겨우 11명, 3박 4일 답사 대장을 하면서도 일본 지진에, 갑작스러운 개인적인 업무 차질에도 답사가 잘 되지는 않을까 부담을 느꼈다. 임교진이 12척 세곡을 가득 싣고 첫 항해를 2달여 했을 생각을 하니 그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작살포 포경선에서
<장생포 고래 박물관>에는 1986년 장생포에서 마지막 포경을 했던 진양 6호가 전시되어 있다. 선사 시대 동해 바다 고래잡이는 불교 신앙심이 강했던 신라 법흥왕이 바다 짐승의 포획을 금지하고 어구까지 불태워버리면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불교가 억제되던 조선시대는 양반들의 착취가 가혹한 수준이라 백성들이 어렵고 힘들고, 죽 쒀서 뭐 주는 고래잡이를 착수하지 않았고, 어쩌다 죽은 고래가 떠내려오면 일이 많아질까 두려워 멀리 밀어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자연이 준 선물인 고래도 국가의 사상과 착취를 만나면 반사하고 싶은 애물단지가 된다.
신라, 조선을 거쳐 거의 사라져가던 한반도에 다시 고래사냥이 등장한 것은 1899년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에서 잡은 고래 해체 기지로 울산 장생포를 지정하면서였다. 이후 일제 시대부터 본격 포경이 시작되었다. 1986년 포경 금지 전까지 장생포에서는 연평균 밍크고래 900마리 규모를 동력선과 작살포로 잡았다. 고래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포경위원회 의결로 상업 포경은 전면 금지되었다. 나무 배를 타고 작살을 던지던 동삼동 선사인들과 ‘맞다이’하던 고래의 동해 바다는 국가의 수탈 장소, 동서양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터전을 내어준다. 이어 고래가 잡혀줄 사이도 없이 한반도인들에게 작살포, 동력선을 이용해 마구잡이식으로 도륙되어 멸종 위기에서야 비로소 숨 쉬고 바다를 유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박물관에서 작살포가 고래를 멸종시킨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장생포 고래 박물관> 이전 <동삼동 패총 박물관>에서 선사 시대 믹서기 ‘갈돌과 갈판’을 보고 내가 내뱉었던 ‘어느 천 년에’라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로스팅한 커피 콩도 전동 그라인더로 갈아서 사온다. 그걸 갈고 있을 시간이 아까워서이다. 전동 그라인더를 선호하고 ‘갈돌과 갈판’을 생산성이 낮은 도구로만 인식하는 내가 고래 잡이 작살포가 문제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맞지 않다. 그렇다고 작살포를 남획 도구로 칭하면서 갈돌을 대단한 도구라고 박수치는 것도 지나치게 낭만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이 글에서 갈돌과 작살포 중 택일하는 결단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선택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나는 작살포의 얼굴을 한 사무기기로 일하고 자동차로 출퇴근하고 있다. 갈돌과 작살포는 인구, 사회 규모가 다르고, 따라서 생산성에 대한 철학이 다른 도구이다. 동력선과 작살포로 고래를 잡아본 이상, 나무 배를 노 저어 작살을 내리꽂아 고래와 만나는 방법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작살포와 작살은 비가역적이다. 작살포를 쏘면서 한 생명이었던 고래는 과녁에 맞춰야 할 목표물에 불과하게 된다.
갈돌, 작살을 쓰는 사회는 소규모의 사람들이, 조금씩 먹고 사는 사회이다. 도구는 이렇게 사회 규모와 생산성과 연결된다. 고래는 버리는 부위 하나 없이 기름, 가죽, 뼈, 살로 해체되어 100여 개의 용도로 활용된다고 한다. 모르기는 해도 장생포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부위, 즉 해체 대비 활용도가 떨어지는 부위 일부는 버려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 시간에 고래를 더 잡는 것이 ‘부가가치’가 더 높다고 여겨지는 경우에 말이다. 반면 동삼동 선사인들은 고래를 잡는데 목숨이 걸려 있기도 하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 고래든 도토리든 최대한 버리는 것이 없이 살았을 것 같다. 자연이 준 선물,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받아야 하는 자원을 막 잡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쌓아 놓거나 버리기보다는 그때그때 최대한 활용하고 없으면 기다리고 다시 연구해서 획득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자연이 준 것은 선물이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으니 버리고 또 잡으러 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칭성에 대해서
바다는 생명이 살고, 인간은 그 생명들을 자원으로 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생명들과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 이번 답사에서 나는 ‘갈돌과 갈판’을 보며 전동 그라인더가 효과적이라고 하고, 전동 그라인더와 다를바 없는 작살포는 안된다는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아마도 전공 그라인더는 내가 쓰는 편리한 도구이고, 작살포는 남이 쓰는 도구이자, 고래를 멸종 위기로 몬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대칭성의 문제는 생산성의 문제와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생산성은 높이되 욕심을 적정하게 자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전동 그라인더, 작살포를 쓰지 말자는 주장도 비웃음을 살 일이다. 대칭성과 생산성의 문제는 어려운 주제이다.
우리 답사팀은 한반도 중남부 지역 바다를 답사로 다녀왔다. 일본 조몬 답사가 무산되고 지난해 북해도 답사를 별 탈 없이 갈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느꼈다. 경로 변경이라는 뜻하지 않은 일 자체가 우리에게는 또 다른 여행의 길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답사 일주일 전 벌어졌던 사무실 스프링클러 오작동에 대한 나의 반응은 뿌리 깊은 ‘나 중심’의 비대칭성을 보여줬다. 비대칭성은 나만 생각하는 것이다. 내 노고, 내 감정, 내 고통만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까지 오기까지 보이지 않게, 조건 없이 자연이 내어주었던 수많은 선물들이 보이지 않고, 그러니 고마워하지도 않게 된다. 내 뜻대로 안되면 곧바로 원망으로 이어진다.
한반도에서 바다와 맞서 싸우고 바다와 더불어 살던 사람들은 ‘함께’를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죽음에 경외했고, 빌었고, 두려워했다. 원망대신 고마움이 많았던 그들을 생각해본다. 이번 답사 말미 손유나 선생님의 ‘답사란 이런저런 일을 겪는 것’이라는 말이 좋았다. 어떤 일도 긍정한다는 것은 ‘나 중심’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아낌없이 주었던 수많은 존재들을 떠올리는 일일 것이다. 이번 답사도 많은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공부하고 또 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사진1. <동삼동 패총 전시관> 고래뼈
사진2. 조행일록
사진3. 작살포, 포경선
사진4. 갈돌과 갈판
선생님이 생각하는 대칭성은 ‘나’ 중심을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것에서 다른 생명을 함께 생각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공간이 ‘바다’가 되는 것 같고요. 그 바다에는 1) 선사 시대 고래잡이 배 2) 조선 시대 조운선 3) 작살포를 장착한 포경선, 3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작살포를 장착한 포경선에서 발견한 대칭성 설명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 부분을 보완하거나 어떤 내용을 첨가한다면 글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더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