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의 선사유적 답사기] 답사, 대칭성을 찾아서
한반도 중남부의 선사유적 답사기/ 240915/ 보나
답사, 대칭성을 찾아서
잃어버린 대칭적 사고
인문공간세종의 학인들은 ‘우주를 느끼고, 인류를 관찰하고, 배움을 나누자!’라는 모토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답사를 하며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 인류학 공부는 만물의 얽힘과 관계성을 탐구하며 ‘인간 중심주의’, ‘나 중심주의’라는 인식의 한계와 편협함을 깨닫게 해주는 수련법이다. 이러한 수련 과정에서 배움이 무르익는다면 이전에는 몰랐던 잠재력을 발견하거나 활동 역량이 증대되어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갈 가능성이 열리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답사는 일종의 통과의례와 같다. 더욱이 답사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자신의 옮음을 고집하고 이질성을 배제하는 현대인들이 잠시나마 현실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것을 아우르려는 대칭성을 회복하는 배움의 장인지라 공부와 일상이 분리된 나에게 꼭 필요한 코스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답사를 배움의 장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조건이 있다. 구간을 통과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은 물론이거니와 공부의 밀도를 높이기 위한 사전 세미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꼼꼼한 계획과 유연함,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리듬을 맞추려는 노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구간을 잘 통과한다면 공부의 성취와 함께 학인들 간의 연대감이나 공동체의 소속감을 높일 수 있지만, 수많은 돌발상황과 개성의 차이,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공동체의 와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봄 건강 악화로 체력이 떨어진 이후에 답사 일정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얼추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생각되어 세미나에 복귀하고 반장을 맡았는데, 지적 리더로서의 본보기는커녕 동학들에게 폐만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공부를 통해 건강한 삶을 살아보자는 목적은 전도되어 삶에 우선순위조차 가늠할 수 없었고,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기에 급급해 공부는 공부대로 일상은 일상대로 더 철저하게 분리되어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번 답사에서 일상보다 더한 체력을 요구하는 빡빡한 일정에 겁이 났지만, 인문세의 스텝 활동과 세미나 반장, 공부력, 체력적 한계를 가늠하며 새로운 공부 방식을 모색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며 답사에 나섰다.
대칭성이 필요해
이러한 개인적 바람과 기우는 자연의 힘 앞에 한없이 무력해진다. 자연의 힘은 얼마나 거대하고 어찌나 변화무쌍한지, 꽤 긴 시간에 걸쳐 계획하고 준비해온 일본 조몬 유적지 답사 일정은 일본의 지진 여파로 ‘한반도 중남부의 선사유적지 답사’로 전면 변경되었다. 조몬 유적지 자료집을 준비하고, 사전 세미나를 참여하면서 ‘조몬 문화’ 탐방 기회에 한층 기대가 높았던 터라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가족과 지인들의 염려를 외면한 채 답사를 진행하는 것은 인문세의 비전과도 맞지 않았다. 스텝 회의를 거쳐 기후변화와 함께 달라진 조건에 적응하기 위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공부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스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만반의 준비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새로운 답사 일정을 조정하고 일정을 수행하는데 어김없이 드러난다. 답사반장님을 필두로 답사 원정대는 한반도로 눈을 돌려 답사 일정을 짜기 위해 정보 수집에 나섰고, 불과 몇일 만에 새로운 답사지와 자료집, 숙박 문제까지 고려하며 준비를 마쳤다. 급하게 마신 물에 체한다고 했던가? 지진의 여파에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던 학인들은 갑자기 가동된 플랜B의 답사 일정에 아직 어리둥절하다. 갑작스럽게 계획이 수정되는 과정에서는 여기저기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답사를 주도적으로 준비하는 입장과 계획된 답사를 따라야하는 입장차가 커지기도 한다.
변경된 답사지와 일정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비행기표는 언제 취소해야 하는지? 기차를 타고 답사 출발지인 부산에 가야 할 터인데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가야 할 것인지? 변수가 이것뿐이겠는가? 정말 희한하게도 마음이 급하면 아이가 갑자기 아프거나 해결해야 할 일이 몰아쳐 힘이 부치게 되고 인간의 마음은 편협해진다. 분별력을 잃고 사태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치달음에 대칭성을 잃어버린 근대인들은 생명체의 유지를 위해 본질상 밖으로 향하는 감각을 차단하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신하고 서로 불만을 토로한다. 이러한 입장 차를 이해해보려는 구성원 간의 절실한 노력이 없다면 공동체의 결속은 흔들리고 위계와 착취, 소외가 발생하는 국가가 들어선다. 자연을 통제와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며 관계하는 ‘비대칭적 사고’에서 국가에 대항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모순적인 것을 아우르려는 ‘대칭적 사고’의 회복이 절실할 때다.
과학적 사고와 신화적 사고
현대인은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 성(聖)과 속(俗), 삶과 죽음’ 등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자연과 비대칭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사카모토 류이치, 조혜영 옮김, 「『縄文聖地巡禮』의 부분요약 (인문공간세종)」에 의하면 이러한 비대칭성은 자연의 어떤 대상이든 심지어 인간의 마음 영역까지 측량하고 값으로 환산할 수 있으며 물건대 물건으로 등가교환이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죽음의 문제와 타자의 문제를 배제한 채 물건을 교환하고, 정보와 가치가 이동하는 시스템의 형성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공고히 다졌다. 국가가 생겨나기 이전의 ‘물건을 줄 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마음에 관계되는 요소를 서로 주고받았던 증여의 경제 원리’는 잊은 채 등가교환의 원리만이 상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절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베푸는 자연의 선의조차 어리석은 행위로 여겨진다.
『대칭성의 인류학』의 나카자와 신이치에 의하면 이러한 사태는 이질적이며 모순된 것은 양립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의 모순율(矛盾律)의 법칙에 의해 적당히 넘기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분법에 지배당한 인간의 편협한 사고법으로 인한 가치관의 대립이 원인이라고 생각한 문제가 적당히 넘기려는 경향이 강한 현대인의 사고법 때문이라니! 흔히 공생의 표준이라고 배웠던 정반합(正反合)의 모델이 비대칭적 사고에서 기인한 방식이라니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다름과 다양성을 지각할 때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봐야 한다는 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에 나카자와 신이치는 비대칭성을 합리주의에 기반한 과학적 사고로 대칭성을 신화적 사고로 구분한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와 신화적 사고는 모두 이진논리를 도구로 삼아 반복하며 복잡한 사고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학적 사고가 이진논리를 사용해서 모순되는 두 항은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이질성을 배제한다면, 신화적 사고도 이진논리를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이항 사이에는 분명한 비대칭적 관계가 성립되지만, 이질적인 두 항에서 연관성을 발견하는 ‘대칭성의 원리Principle of Symmetry’를 작동시켜 현실세계의 모순된 것을 자기 안에 끌어안는 사고법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대칭성의 원리가 작동하는 신화적 사고는 현실이 요구하는 것과 신화적 사고 사이에 일종의 타협안을 생각해본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인지고고학에 의하면 현생인류의 지적 능력은 3만여 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대뇌조직의 비약적인 변화 이후로 본질적인 변화도 진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름을 이해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도저히 양립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질성을 배제시키지 않으려는 호모 사피엔스의 노력과 사려 깊음에 깊은 감동이 몰려온다.
대칭성을 찾으려는 시도
수렵·채집을 하며 유목 생활을 하던 구석기와 농경·목축을 하며 정주하는 신석기와 달리 조몬 문화는 변화하는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수렵·채집, 어로를 하며 정주했지만, 자연의 혜택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잉여를 축적하지 않았다. 자연의 위대함에 경의를 갖고 자연의 선의를 믿으며 주변의 조건과 환경, 자연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인간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더라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 사용하려는 노력은 조몬인들의 유물과 유적 곳곳에 드러난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와 과일과 채소를 사서 먹는 우리네 일상에 비해 수렵민은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갈 수 없음을 매일 자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위해 반드시 타자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어떤 마음을 품게 했을까? 단지 투박한 돌도끼를 사용하고 첨단 과학 기술을 사용한다는 차이로, 내가 아는 지식을 그들이 모른다고 해서, 축적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우월을 논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다시 답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갑작스레 변경된 인문세의 답사 일정에는 평소와는 달리 빈틈이 드러났다.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하고 이러한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한 발 더 먼저, 많이 움직이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내가 누리는 답사의 모든 순간이 누군가의 노력으로 이루어짐을 알게 된다. 동학들의 편의를 위해 강평샘과 기헌샘은 각자의 붕붕이와 함께 먼 길, 긴 시간을 달려 답사지에 하루 전날 도착했고 여행 내내 고단한 몸을 이끌고 기꺼이 운전대에 앉았다. 달님과 다른 스텝 원정대들은 어떠한가? 답사 자료집의 최종 정리를 맡은 수정샘은 각 조가 취합한 답사 자료를 편집하기 위해 새로운 사진 편집 기술을 익히며 100페이지에 달하는 한 권의 자료집을 완성했다. 뿐인가 달님과 함께 답사지를 미리 방문하며 학인들의 공부에 도움이 되는 선의를 베푸셨다. 진진샘은 어떠한가? 강평샘과 함께 답사 계획에서부터 전체 회계, 안내, 답사기 독려와 함께 답사의 시작과 끝을 조망하며 일정에 변동되는 조건에 유연하고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해 한발 먼저 움직이셨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답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생님들의 선의와 노고로 인해 한반도 중남부의 선사유적 답사는 약간의 의견차가 있었지만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무탈히 진행되었다. 대칭성의 원리를 마구 작동시켜 상상력을 발휘해보았을 때, 답사가 포함된 다음 학기 인류학 세미나에 답사 멤버들이 다시 모인 걸 보니 제법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겠다.^^
볶음밥, 너와 나의 연결고리<김해 봉황동 유적 패총 전시관>
이번 답사 여행에서 잃어버린 대칭성을 찾으려는 답사 원정대 노력의 상징물을 나는 볶음밥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답사 대장님은 모든 행위가 그러하듯 먹는 것에도 진심이다. 답사에 함께하는 동학들이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잘 자고 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덕분에 답사하는 내내 우리는 다양한 음식을 넉넉하게 잘 먹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다보니 우리에겐 1인 1인분의 양이 적당하지 않아 음식이 남는 경우가 생겼다. 더욱이 이번 답사에는 초등학생인 성하가 동행했다. 강평샘은 매끼 메뉴 선정에 심혈을 기울이셨지만 김해 박물관 답사를 마치고 먹는 저녁 메뉴는 성하가 정한 중국 요리점이 선택되었다. 테이블당 인원수를 고려해서 쟁반짜장, 짬뽕, 볶음밥, 탕수육을 주문했는데 쟁반짜장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배를 가라앉힌 소금이 나오는 맷돌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고스란히 남은 볶음밥은 보냉백에 담겨 다음 날 아침에 먹기로 했다.
우리의 볶음밥은 어디로 갔을까? 다음 날 아침 상황이 여의치않아 우리의 볶음밥은 김해를 떠나 울진 장승포를 거쳐 덕구 온천 331호실에서 하룻밤을 묶고 답사의 무탈함을 기원하는 제사상에 올랐다가 쓰레기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김해 봉황동 선사유적지에는 패총이 있다.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 자료집」(인문공간세종)에 의하면 패총이란 과거 인류가 식량으로 채취하여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오랜 기간 쌓여 만들어진 유적으로 마치 무덤처럼 쌓였다 해서 조개무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조개무지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바다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출현하는데, 우리나라에는 8,000년 전 무렵부터 패총이 만들어져 신석기시대 전 기간에 걸쳐 나타난다고 한다.
자료집에 따르면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당시의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 봉황동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 뼈, 뿔도구, 석기, 가락바퀴, 불탄 싼(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등의 유물로 1~4세기 무렵 김해 봉황동에 살던 선사인들이 적갈색이나 회청색의 토기와 사슴뿔이나 뼈로 만든 칼자루를 사용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불탄 쌀로 짐작하건대 농경 재배가 시작되었고,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인 ‘화천’의 발견으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와 중국과의 왕래가 진행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번 답사에 방문한 패총은 <부산 동삼동패총>도 있다. 동삼동패총은 남해안지역 신석기문화의 특징과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이른 시기부터 해양 활동을 통해 일본 규슈지역까지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약 12,000년 전은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로 접어들면서 구석기시대에 비해 기후가 급속히 따듯해진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고 식물 채집, 사냥, 어로를 통해 식량을 확보하였다. 우리는 동삼동패총에서 출토된 사슴, 멧돼지, 굴, 다랑어, 강치, 고래 등의 뼈와 유물을 통해 신석기시대의 자연환경과 생업활동을 짐작해본다.
유적지를 답사하고 유물을 살펴보면서 흥미로운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부산의 동상동패총은 지금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바닷가 항만에 컨테이너 박스들과 높은 크레인이 가득해 지금도 교역이 활발히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김해 봉황동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1~3세기경의 김해만의 지도와 현재 지형도를 비교해보면 해안선의 경계가 확연히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1~3세기경의 김해만은 지금의 유적지와 달리 바다에 인접해 있었기에 중국과의 교류가 진행되었다는 추측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면 조개무지와 중국의 화폐인 화천이 없었다면 주변의 밭과 언덕, 평지에 구성된 집터와 창고들로는 중국과의 교역 상황을 짐작해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답사 자료집을 정리하면서 제일 많이 반복해서 사용한 단어가 ‘짐작하다’라는 말이다. 짐작하다라는 말은 ‘정확한 상황과 사실을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아는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하고 종합한 사실을 서술하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번 답사를 마치고 ‘안다는 것이 무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감각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신이 아는 것의 전부일텐데.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혹은 자연물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마음은 잠시뿐 우리는 여전히 일상적으로 사태와 사물의 단면만을 보고 쉽게 판단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덕구 온천 근처에서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볶음밥이 발견된다면 뭐라고 짐작해볼지 궁금해진다. 볶음밥의 흔적을 가지고 강평샘의 답사대원 성하를 위한 대칭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짐작할 수 있을까? 레비–스트로스는『달의 이면』에서 문화는 원래 공통의 척도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이 올 때까지 대칭성을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아마도 타자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연의 일부에 속함을 아는 학인이라면 낯선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기꺼이 한 걸음씩, 한 걸음만 더 내딛여야 하지 않을까?
1. 잃어버린 대칭성을 찾아서가 일이관지하려면, 과감하게 지금 흩어져 있는 에피소드와 정보를 잘라내서 <김해 봉황동 패총> 유적으로만 집중하면 어떨까요. ‘보나 샘의 정의’에 따른 대칭성, 대칭성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볶음밥과 성하 이야기는 주제와 꿰어지기 어려우니 빼는 것으로^^
‘인간 중심’,’나 중심’을 왜 알기 어려운가(실례), 그런 관점의 문제점, 패총에 남겨진 석기 시대인들의 흔적을 통해 대칭성을 찾아가는 여행, 그 여행에서 부대끼고 힘든 보나샘의 갈등을 포함해서 서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2. 이 글의 독자는 답사를 다녀오지 않은 인문세 회원, 예를 들어 바다 엄마 남연아 선생님으로 특정. 따라서 현대인, 근대인에 대한 신문 칼럼식 비평글이 아닌 소박하지만 진솔한 보나샘식 답사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