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유적 답사] 죽음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창조
죽음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창조
일상에서 부재하는 죽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약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지병이 있으셨고, 그 지병이 수년간 지속되던 터라 돌아가실 때 쯤 가족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숨을 거두시던 때, 서너달 전 부터 서울에 사는 나는 아버지가 계신 부산을 수시로 들락날락 거렸다. 어느 밤이 되면 동생이 전화가 와서 “누나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내려와야겠다” 눈물을 흘리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기를 서너 차례, 2021년 3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려던 그 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가 오랜 지병을 앓는 동안에도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이라는 동생의 전화를 처음 받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진짜 마지막을 준비하며 그해 겨울 몇 개월을 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살았다.
이후 3일간의 장례, 그저 주무시고 있는 것만 같은 아버지의 몸이 관 속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얼마 후 하얀 색 항아리에 가루가 되어 우리 품에 안겼다. 그렇게 3일 장례를 마치고 나는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이후 살아생전 아버지의 모습, 또 내가 잘 해드리지 못했던 부족함들이 종종 생각나 나를 괴롭히고는 한다. 하지만 내 생활을 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고, 더 이상 아버지의 부재가 낯설지도 않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시체는 이제 내 눈 앞에 없고, 산소는 내 생활 터전인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대전에 있다. 그렇게 다시금 아버지의 ‘죽음’은 내 일상과 무관한 것이 되었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 중, 지난 달 동료작가들과 프로젝트를 위해 전라도 신안 증도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내내 심심찮게 여러 무덤들을 봤다. 삼겹살 가게 옆에도, 곡식이 파랗게 익어가는 논밭 옆에서도 말이다. 처음에는 살짝 섬뜩하기도 하고 조심스럽더니 짧지 않은 기간 머물며 반복적으로 보니, 그 무덤들에 익숙해졌다. 그저 밥 먹고, 일하고, 잠자는 그 일상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말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일상에서 사유하던 그 몇 개월이 떠오르며 궁금해졌다. 일상에서 죽음을 잊지 않고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럴 때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 같은 질문을 안고 한반도 중남부 유적 답사 길에 오른다.
토기, 생(生)과 사(死)를 운반하다
이번 답사 길에 방문했던 대부분의 박물관과 유적지에서 ‘토기’가 빠지지 않았다. 토기는 공기, 흙, 물, 불과 사람의 손이 만나는 접점이다. 자연의 원초적 힘으로 흙, 공기, 물, 불이 지상 위에 흩어져 있지만 그것을 결합하여 구체적 존재로 또 몸체로 빚어내는 것은 인간이다. 그리고 구체적 몸체를 가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몸체에 맞는 구체적 영혼을 담는다.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왜’ 등으로 시작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쉼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 질문의 과정에서 사유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그 무언가를 손을 통해 형상화한다. 해서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흙이라는 질료를 빚어 만든 토기는 단지 음식을 보관하거나, 담긴 내용물을 운반하는 그 이상으로, 인간의 질문, 상상, 사유, 염원을 담고 있다.
답사 길에 만난 토기들이 저장과 운반의 용도는 물론, 인간의 마음을 담는 사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제례와 장례를 위한 별도의 토기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한반도 신석기 시대 무덤들은 땅을 판 후 시신을 매장하는 ‘움무덤’과 항아리에 시신을 넣어 땅에 묻는 ‘독무덤’이 많았다. 땅에 시신을 뭍을 때는 장신구, 토기 등을 함께 넣는다. 신석기 무덤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이 무덤들이 집터나 패총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면서부터는 무덤에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순장 풍습이 생기고, 무덤도 집터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동기, 철기시대에도 무덤에 토기를 함께 묻는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산 <복천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옛 복천동 고분군 내부 모습이 생생히 살아 있었다. 이들 무덤 내부에도 직접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양의 토기들이 있었다. 토기를 무덤 안에 함께 묻는 것 외에도 <국립 김해 박물관>에서 여러 개의 ‘독무덤’ 유적도 확인 할 수 있었다. 태어날 때 신생아가 웅크린 그 모습과 같은 자세로 토기 안에 시체를 담아 땅에 묻는다.
토기가 죽음, 무덤, 장례 등과 분리되지 않다보니 흡사 이 토기들이 ‘영혼의 운반 수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조상의 영혼을 담아 하늘에 보내니 이 영혼에 새로운 생명, 새로운 몸을 주고 이를 토기에 담아 다시 지상으로 잘 돌려 보내달라는 염원을 토기를 통해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자궁은 새 생명을 담는 토기이기도 하다. 토기는 그렇게 지상에 사는 인간의 사를 담고 생을 담고 염원을 담는다.
한반도 신석기 인류는 영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불멸하며 현생과 이생을 때에 따라 이동하며 순환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영혼이 이전의 몸을 버리고 다음의 새 몸을 받는, 그 사이의 시공간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해서 인간은 손으로 흙을 빚어 생과 사, 자연의 순환에 자신들의 마음이 가 닿기를 그저 빌고 빌 뿐이다. 토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는가 하면, 새로운 형상을 덧붙이기도 하고, 또 이들과 함께 의례를 치르기도 한다. 행여 영혼의 배달사고(?)가 나는가 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르고, 돌아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해서 이 의례를 통해 자연의 힘에 복종하고, 감사하며, 겸허해지는 마음의 자세는 필수이다.
새 모양 토기, 생과 사 사이의 중간자들
생과 사를 분리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영혼을 그 사이의 순례자로 생각하는 한반도 인류의 사유는 동물을 비롯한 구체적 형상을 표현한 토기들에서 더 선명해진다. <복천 박물관> 민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외에도 사물의 형상을 표현한 ‘상형 토기’들이 돋보였다. 상형 토기에는 오리, 말, 거북 등의 동물 모양을 비롯해, 수레, 집, 배, 신발 등의 사물 모양도 표현되어 있다. <국립 김해 박물관> 전시장 한 벽면을 가득 메운 ‘새 토기’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흙을 빚어 만든 ‘새’ 모양의 토기에서 땅에 있는 인간의 뜻이 하늘에 있는 신에게 가 닿기를 바라는 염원을 느낄 수 있다. 하늘에 직접 가 닿을 수 없는 인간은 이 같은 대리자를 흙으로 빚어 하늘에 보낸다. 새는 땅의 뜻을 하늘에 전하는 일종의 ‘전달자’로 역할 한다. 새가 죽은 자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날라다 준다고 믿었다. 나아가 새로운 생명도 이 새를 통해 이 땅위로 전달되지 않을까? 서양과 동양의 여러 우화들에서 새가 아기를 물어 주머니에 싣고 나르는 장면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새는 인간과 달리 날개가 있어 하늘에 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하늘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때가 되면 땅으로 내려와 먹이를 구하고, 쉬거나 잠 때는 나무 위에 내려앉는다. 이렇듯 새의 이동 반경은 하늘과 땅 구분 없이 자유롭다. 수레와 배 모양의 토기도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동하는, 일종의 교통수단을 상징한다.
답사 중에 함께 읽었던 나카자와 신이지의 「조몬 성지 순례」에도 중간자로서의 동물이 등장한다. 스와 지역에서 발견된 많은 토기에서 뱀 모양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나카자와는 이 점에 주목하며 스와는 뱀은 생과 사, 재생을 상징한다고 언급한다. 나카자와는 돌과 나무를 세워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며 전체적인 우주를 형성하는데 그 사이들을 묶는 것이 뱀이라고 한다. 뱀에 의해 우주 전체가 묶이고 연결되며, 생과 사는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순환되는 인류의 세계관을 일본 스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지상 위에 살면서도 인간은 절대 하늘을, 우주 전체를 잊지 않는다. 천상과 늘 연결된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천상이 내려준 뜻에 순종하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전달하기도 한다. 땅과 하늘, 생과 죽음은 그렇게 끊김없이 서로 소통하며 삶의 가운데서 공존하는 중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력’을 얻다
「조몬 성지 순례」에서 나카자와 신이치는 제일 먼저 방문했던 ‘스와’에 대해 소개하며, 이곳이 생과 사의 순환이 느껴지는 성지였다고 말한다. 스와인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했기에 매일 동물을 죽이고 먹는 것에 의해 자신들이 생과 사의 순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스와의 건축도 그렇다. 나무나 짚 등의 식물로 주거가 만들어졌다. 유약하고 곧잘 썩는 식물로 만든 집이 영구적일 것이라 기대할리 만무하다. 때가 되면 부서질 것을 염두에 두고, 집의 제한된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저 고치고 수리하며 집의 유한한 생명과 혹은 의심의 여지없는 집의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반면 오늘날 우리들 역시 동물을 매일 먹지만, 그들의 죽음은 우리의 일상에서,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과정이 제거된 채 식탁위에 올라온 동물은 영혼과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식용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애초에 식용거리로 제작 생산된 공산품처럼 말이다. 현대 건축은 어떤가? 폭풍이 와도 끄떡없는 철근과 콘크리트는 시간 앞에 한계를 모르는 듯, 영원히 살듯 견고히 서 있다. 약하지도, 썩지도 않아 사는 동안 크게 보수하거나 고칠 필요도 없다. 현대는 그렇게 삶에서 죽음이 완전히 소외된 채, ‘생’에 대한 관심으로만, 생의 영원성으로만 일상이 채워진 비대칭의 시대이다.
그런데 신이치는 현대의 이 같은 비대칭이 ‘물건과 물건이 등가교환 가능하다’라는 사고방식에 의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점이 조금 의아했다. 등가 교환과 죽음에 대한 사유, 생과 사의 순환과 무슨 관계일까? 신이치는 이어 ‘증여’라는 키워드를 던져 이 질문을 풀어가게 한다. 스와인들은 물건을 교환할 때 물건 그 자체만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의 ‘마음에 관계되는 요소’를 서로 주고받았으며, 또 이 교환은 ‘생명 작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등가교환이 아니라, 증여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에게 물건은 자신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나 통로의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증여 경제에서는 마음을 담는 물건을 주고받을 때 그 물건은 아니, 그 마음은 어떤 것도 같은 것이 없다. 해서 동등한 무게나 가치로 교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이치는 같은 책에서 자연에 사실상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의 구조가 생겼을 때 이미 다 나왔으며, 우리는 그것을 ‘재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과 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이’, ‘변화’에 동참하는 것뿐이다. 인류에게 창조란 그런 것이 아닐까?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이미 모두 출현해 있는 모든 것을 늘 새롭게 구성해 내는 것. 그리고 이미 구성된 것을 해체하고 분해하여 재배치하며 낯선 의미들을 엮여 내는 것 말이다.
무엇이 죽음일까를 생각해본다. 왜 우리 인류는 살면서 ‘죽음’을 늘 사유했을까? 이 몸뚱이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죽음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과 부활을 수시로 경험한다. 어제의 내가 죽고, 오늘의 내가 태어난다. 진정한 죽음은 매일, 매순간의 생과 사 속에서 얼마만큼 변했느냐에 있다. 어제의 내가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살아있는 한 오늘 새로운 나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 새로 태어나려면 어제의 내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일상에서 늘 ‘죽음’을 사유하는 인류의 의지는 생과 사, 그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실상 늘 새로워지는 변이, 생성과 창조를 향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또 실상 ‘생명’이란, ‘생명력’이란 늘 그렇게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워지는 그 자체이기도 하다. 존재와 존재, 물건과 물건 사이에 ‘등가교환’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어떤 물건도 다른 것으로 대체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같은 가치가 여기서 저기로, 질적 변이를 이루지 못한 채, 같은 것의 장소 이동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죽음’이 없다. 즉 그 물건들 사이에 어떤 차이를 창조해 내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동 중에 ‘차이’가 생성되지 못했다면 물건은, 존재는 다른 무엇으로 변화될 수 없다.
한반도 답사의 끝 무렵, 죽음을 사유하는 이번 답사 길에 서울에서 전화 한통이 울린다. 오랜 동료작가이자 친구의 전화, 우리들의 오래된 또 다른 친구 가족의 부고 소식이다. 각별한 사이였던 나는 고민 끝에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먼저 서울로 복귀해 서둘러 장례식장에 가서 슬픔을 공유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장례 절차를 마무리 하고 한숨을 돌린 친구에게서 감사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건네는 말이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한 이틀이 지났을까? 가족 중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한다. 이 생명의 영혼은 며칠 전 하늘로 보내드린 어머니의 영혼이 부활한 것이 아닐까. 새로운 몸체로 얻는 이 영혼은 이제 또 어떤 새로운 일들을 지상에서 펼칠까, 앞으로 지상의 많은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켜갈지, 우주 전체 변화에 어떻게 동참할지 궁금해진다.
1. 껴묻거리가 왜 토기여야 하는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2. 죽음이 부재한 삶과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등가교환’과 ‘증여’로 연결시킨 부분이 좋았습니다. 이 부분들을 각각의 소제목으로 좀 더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결론에는 서론에서 제기하신 ‘죽음을 일상에서 사유하면 나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라는 내용이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