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 죽음으로 재생하다
죽음으로 재생하다
10년 전만 해도 80살까지 살면 장수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90살 넘어 사시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누구는 90살 넘어 사는 게 재앙이라고 한다. 90살이 넘어 사는 것은 개인에게 복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90살 이상의 노인층 인구가 많아지니 주로 노인들에게 적용되는 의료보험과 연금 등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젊은이들의 부담이 예전보다 늘어났다. 사회 시스템의 자원도 인구 감소로 인해 청년층보다 노년층 인구가 많아지면서 한마디로 입금보다 출금이 많은 상태가 되었고 머지않아 고갈된다고 난리다. 인간에게 삶은 개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다.
인문공간세종은 이번 여름 부산, 김해, 울진, 단양에 있는 선사유적을 답사했다. 패총유적지, 고분군, 집단 매장지와 여러 박물관을 둘러보며 신석기와 가야 그리고 그 이후 시대 사람들의 매장 방식과 부장품들을 통해 그들의 죽음관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각종 토기, 화살촉, 조개 팔찌와 도끼 등의 다양한 부장품들이 유골과 함께 묻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 이후에 세상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없다고 확신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와중에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죽음은 나에게 삶의 마침표이다. 죽음 이후에도 지금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삶이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나와 다르게 죽음 이후에도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들이 죽음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면서 나는 삶을 다시 보기 위해 죽음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고 싶어졌다.
조개껍데기와 유골
한반도에서 발견된 500여 개의 패총(조개무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부산 영도구 동삼동 패총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신석기를 대표하는 패총으로 약 6,000년 전부터 2,000년 전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 패총은 신석기 조기, 전기, 중기, 후기, 말기의 5개 문화층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주거지와 독무덤, 1,500여 점에 달하는 조개 팔찌와 패(貝) 제품, 불탄 조와 기장, 숫돌, 낚싯바늘. 작살, 사슴 문양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https://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3219).
조개껍데기는 조갯살을 먹고 난 뒤에 나오는 쓰레기인데 이곳에 사람의 뼈가 같이 묻혔다니 의아했다. 현대에서 쓰레기란 어떤 물건이 그 용도에 맞게 사용되고 난 후의 남은 흔적으로 버려지고 제거해야 할 것이다.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처럼 인골도 생이 다한 후의 쓰레기라 여겨졌던 것일까. 쓰레기란 개념은 상품 사회인 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했던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쓰레기란 없었다. 우리는 조갯살을 먹고 남은 껍질에서 새로운 조개가 만들어질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조개를 먹고 난 후 버린 껍질은 새로운 조개가 탄생하는 재생의 장소가 아니라 잘게 부서져 다른 용도로 쓰이거나 매립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분해되어서 흙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패총은 음식물들을 먹고 버리는 폐기장의 기능만이 아니라 다양한 동물의 영혼이 깃든 신성한 장소, 사후에 재생의 염원을 담은 장소로 인식되었다고 한다(이상균, 「한반도 신석기 묘제와 사후사회관」, 8쪽). 조개도 죽으면(?) 껍질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면 조개무지에 사냥한 동물의 뼈뿐 아니라 죽은 사람의 뼈를 묻은 것이 너무 이해된다. 동물의 뼈를 묻음으로써 다시 동물로 육화되어 사냥감이 풍부해지기를 사람들은 바랐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살았을 때의 모습이 꼭 아니더라도 다시 살아나기를 고인의 가족과 지인들은 기원했을 것이다. 조개의 뼈, 동물의 뼈, 사람의 뼈를 같이 묻음으로써 재생의 힘이 증폭되어 강렬해지기를 부족원들이 함께 기도하지 않았을까.
죽음과 입문
로베르 에르츠는 『죽음과 오른손』에서 말레이제도와 오스트리아 부족들의 죽음을 둘러싼 관념과 관습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죽음은 고인의 시신과 영혼, 그리고 살아 있는 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고인의 시신은 사망 직후부터 시체가 완전히 부패해 뼈만 남을 때까지의 임시 장례와 뼈만 남은 후 치러지는 최종 장례로 2번에 걸쳐 처리된다. 부패한 시체는 ’사람을 마비시키는 벼락‘에 비유되는 사악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위협한다고 여겨진다(로베르 에르츠, 박정호 옮김, 『죽음과 오른손』, 문학동네, 14쪽). 고인의 영혼은 시신이 부패하는 동안(임시 장례와 최종 장례 사이) 그가 떠난 세상의 삶을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배회한다. 살이 모두 썩어 뼈만 남고 나서야 고인은 죽은 자들, 즉 조상들의 세계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같은 책, 17~18쪽).
말레이제도 부족들에게 죽음은 지속적 과정으로 시체의 부패가 끝나야 완결된다. 죽음은 삶의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과도기로, 죽음이 진행됨에 따라 재탄생도 진행된다(같은 책, 31쪽). 최종 장례는 고인의 유해를 최종 매장하고 그의 영혼에 안식을 주어 죽은 자들의 세계로 들여보내는 의식이다. 고인의 시체를 정화하고 새로운 옷을 입힘으로써 고인의 과거는 사라지고 고인에게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이 부여된다. 그 덕에 죽은 자는 조상들의 세계에 들어간다. 새로운 삶에 입문하는 것이다(같은 책, 38쪽). 고인은 조상들의 뼈가 모여있는 곳에 최종적으로 묻힌다. 이제 고인의 뼈는 더는 공포와 혐오가 아니라 산 자들에게 풍요와 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경외와 신뢰를 받는 대상이 된다(같은 책, 39쪽).
나도 그들처럼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며 죽음 너머에 조상들이 사는 세계가 있고 거기서 새로운 삶이, 그것도 수렵할 수 있는 동물들이 넘쳐나고 먹을거리가 지천에 있는 풍요 속에 재개된다고 생각하니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다. 하지만 죽음의 과정은 고인과 산 자 모두에게 고통스럽다. 고인이 죽음 너머 세계로 들어가려면 살이 썩고 뼈만 남을 때까지의 사회적 죽음의 시간을 1년에서 최장 10년까지 견뎌야 한다. 이 기간에 고인의 가족과 친지들은 고인의 물건이나 사냥터에 접근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금기를 지키는 사회적 죽음 상태에 처하고, 최종 장례를 위한 막대한 비용도 마련해야 한다. 고인을 조상들의 세계에 보내는 데는 고인의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부족원들의 희생과 배려가 필수적이다. 고인도 사회적으로 자릿값을 가지고 평소에 부족원들과 관계를 잘해두었어야 했으리라. 장례는 개별적 사건이 아닌 부족을 통합시키는 의례였다.
죽음과 불안한 사회
이런 사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유적이 후포리에 있다. 후포리 선사유적은 바다 쪽으로 돌출한 해안단구 위 등기산 정상부에 위치한다(「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 자료집」, (인문공간세종), 9쪽). 유적지에 서면 앞으로는 동해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지금의 후포항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사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곳에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망자의 뼈가 씻긴 흔적이 발견되어 이차장으로 추정되는 집단 무덤이 있다. 남녀 약 40명 이상이 묻혀 있던 무덤이고 여러 차례에 걸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같은 자료집, 9쪽). 다른 신석기 무덤과는 달리 단독장이 아닌 집단 매장이며 무덤이 조개더미에 있지 않고 나지막한 산 정상에 있다.
옹관묘가 발견된 동삼동 조개무지는 바닷가 바로 앞에 있다.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깨던 바다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붙어 있었다. 조개무지는 사람들이 생활했던 곳에서 발견되어 무덤과 생활터가 분리되지 않았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 둔 것이다. 그런데 후포리 무덤은 바다와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 공간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있다. 죽은 자는 산자의 공간과 분리되어 매장되었다.
망자를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에 같이 두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무덤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 아래나 벽 사이 그리고 탑 안 등에 두었던 예리코 사람들은 죽은 자를 집합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묻고 부장품도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스티브 마이든, 성춘택 옮김, 『빙하 이후』 사회평론아카데미. 90쪽). 서기전 9600년 예리코에는 500명(집 50채)이 넘게 살고 몇백 년 후에는 최대 1000명(집 70채)에 달했다. 집은 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고 화덕이 집 안팎에 있었으니 마을 사람이 음식을 나눠 먹었을 거로 추측된다(같은 책, 88쪽). 수렵채집을 하고 곡물 재배를 하며 정주하던 기간이 오래되지 않았으니 500명 모두 같은 핏줄이지는 않았을 테다. 그래서 가족이 죽으면 집에 두지 않았을까? 그들은 1차 장례가 끝나고 살이 다 썩으면 다시 무덤을 파서 두개골을 마을 안 어디엔가 다시 묻거나 진열했다. 개인의 사망이 가족의 일이었다가 두개골을 다시 꺼내 공동 매장을 할 때는 공동체의 죽음이 되었다.
후포리의 신석기 사람들이 사람이 죽은 직후에 망자를 집에 묻었는지 아니면 집과 떨어진 곳에 매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이 썩은 뒤 뼈만 추려 공동 매장을 했다는 점에서 죽음이 망자의 가족뿐 아니라 사회적 일이었으리라. 개인의 죽음이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일부분의 죽음이었다면 망자로 인해 기능하지 못하는 사회의 부분을 살리는 게 중요하지 않았을까. 사회는 서로 맞물려서 작동하기에 부재로 인한 부분만 단편적으로 잘라낸다고 부재 이전사회의 모습으로 복귀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이 또 다른 재생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사회는 불안해지고 위태로워진다.
돌도끼로 만드는 사회
후포리 무덤에서는 사람들의 뼈 위에 사용 흔적이 없는 돌도끼 180여 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같은 자료집, 11쪽). 도끼의 자루가 없을뿐더러 길이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10~15cm가 아닌 20cm 정도이고 40cm인 것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신석기 시대의 무덤이나 <복천동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덤에서는 주로 토기류가 매납되었던 것과 달리 후포리 등기산 유적에는 돌도끼가 있었다. 바다와 가까워서 후포리 신석기 사람들은 낚시하고 조개류를 잡으며 생활하고 동물 사냥도 병행했을 테다. 그런데 고기잡이와 사냥에 더 많이 쓰였을 것 같은 도구인 낚싯바늘이나 찔개살과 돌화살촉이나 간돌칼이 아닌 돌도끼가 묻혔다니 의아했다. 대개 일상에서 고인들이 많이 사용했던 도구들을 무덤에 같이 묻는게 아닌가.
선사시대 돌도끼는 작고 길이가 짧은 것은 주로 대팻날이나 끌로 나무를 다듬는 데 썼고, 큰 것은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는 용도로 썼고, 수렵과 전투용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https://www.emuseum.go.kr/m/detail?relicId=PS0100319700100028900000). 어쩌면 돌도끼는 죽은 사람들이 다른 세계에서 필요한 물건이기보다는 의례용으로만 사용된 것일 수도 있으리라. 돌도끼 하나를 만든다고 생각해본다. 긴 길이의 마땅한 돌을 찾는 건 차치하더라도 몸돌을 깨고 갈고 다듬고 하는 데만도 족히 수일은 걸리지 않을까. 그런 돌도끼를 180개나 만든다면 그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테다. 한 사람이 1개의 돌도끼를 일주일에 걸쳐 만들면 꼬박 3.5년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구하고 생활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만들어도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야 그 수량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돌도끼 만들기는 고인이 죽고 매장된 후 살이 썩고 뼈가 남을 때까지 2차장을 준비하는 사회 전체에 주어진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여 돌도끼 만들 듯 고인의 빈자리로 인해 달라진 공동체를 이리 깨고 저리 갈면서 다듬고 새로운 모양새와 기능을 갖추는 일이었을 것 같다. 그러면서 고인이 있었던 사회는 죽고 새로운 사회로 재탄생하지 않았을까.
나의 죽음을 생각해본다. 내가 죽는다고 사회에 어떤 흔적이나 남겠으며 그렇다고 내가 사회에 나의 자리를 각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죽음이 소멸이 아닌 어떤 것의 생성이기를 바라면서 무엇을 재생시킬지 생각해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주샘~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개인적 문제임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다’라는 주장과 죽음이라는 개인의 부재에 대해 사회 전체의 노력으로 새로운 사회로 재탄생된다는 선생님의 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돌도끼 만들기와 다듬기, 장례는 개별적 사건이 아닌 부족을 통합시키는 성스러운 의례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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