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 석기가 품은 이야기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2024.09.25/손유나
석기가 품은 이야기
유독 울적하고 피곤한 날이면 나는 소고기뭇국을 먹는다. 경상도식으로 고춧가루 풀어 얼큰하게 끊인 소고기뭇국은 우리 집에서는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었다. 가족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뭇국에 들어갈 콩나물을 다듬었던 오붓함과 수능을 마치고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와 뭇국을 먹으며 느꼈던 따뜻한 위로가 떠오른다. 평범한 음식이 개인의 서사를 품어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화려한 금관이나 장신구와는 다르게 선사시대의 유물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쉽지 않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을 막대기, 나무줄기로 짠 광주리는 세월 속에 부식되어 사라졌고,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석기는 뒷마당에 있는 돌멩이와 다를 것 없어 보여 우리는 이 석기 전시관을 의미 없이 지나치기 일쑤이다.
하지만 물건 뒤에 숨겨진 사람들, 이 석기를 일상에서 손때 묻히며 사용했을 사람들과 땅속에서 꺼내어 묻은 흙을 털어내고, 깨어진 돌조각을 정성스레 맞추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석기는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이번 답사기를 통해 충북 단양군 유적지에서 발굴된, 어느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석기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구석기인의 도구
충북 단양군은 중기 구석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강물이 굽이쳐 흘러 유속이 느리고, 곳곳에 퇴적물이 쌓여 비옥한 충적지대가 생겼다. 산에는 석회동굴과 바위 그늘이 있어 구석기인이 살기 좋은 지리적 환경이었다. 답사 마지막 날, 단양강을 따라 잔도길을 걸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맞추어 내 마음도 평온해졌다. ‘느림보 강물’이라는 별명도 있다는데 과연 유구한 자연 앞에서 인간사의 조급함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강 너머 맞은편 기슭을 바라보니 4만 년 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강변에 앉아 자갈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을 구석기 사람들이 그려졌다. 나는 어릴 때 친구와 호수와 수평으로 돌을 던져 날렸다. 어쩌면 4만 년 전의 아이들도 물제비를 날리며 누가 더 멀리까지 가는지 내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근처 구낭굴 유적지에서는 인골과 함께 여러 동물 뼈, 특히 사슴 뼈가 많이 발굴되었다. 옛코끼리 뼈도 발굴되어 당시 기후와 식생이 현재와 달랐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동굴 입구에서 불을 피워 모기를 쫓고, 사슴을 잡기 위해 돌촉을 덧댄 나무창을 들고 초원지대를 달렸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벼락도끼 혹은 발에 차이는 돌멩이
석기는 삼국시대까지 일상생활에서 다방면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철기가 보급된 이후로 석기와 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흙 속에 묻혀 잊히고 말았다. 간혹 누군가 우연히 석기를 발견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 실록에 ‘벼락도끼’라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당시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돌을 도구로 사용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석기를 천둥과 번개의 신이 만든 도끼라고 믿었다.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다고 벼락도끼라 불렀고, 액운을 물리치고 만병통치약으로 믿어 임산부가 갈아 먹거나 왕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번개가 집 담장 밑에 떨어지면 혹시나 행운이 찾아왔을까 땅을 파보았을 사람, 모양 좋은 석기를 보면 부적 삼아 어린아이에게 건네주었을 사람을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고, 19세기 고고학이 자리 잡으면서 석기가 다시 조명받기 전까지 대부분은 깊은 땅속에 묻혀 있거나 사람들 발에 차이는 귀찮은 돌멩이였을 것이다.
수양개 유적지에서 석기로 다시 만나기까지
단양 수양개 유적지는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구석기 유적지로 꼽힌다.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이융조 명예교수는 이곳을 구석기 시대 ‘기술의 중심지’였다고 말한다. 규격화된 슴베찌르개가 서로 다른 문화층에서 110점 가까이 나와 전문적으로 석기를 만드는 장인 집단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의 석기 제작 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다른 두 구석기 유적지와는 달리 수양개 유적지 발굴은 쉽지 않았다. 수양개 유적지는 충주댐 수몰 지역으로 선정되어 구제발굴 조사로 시작했다. 하지만 충주댐이 건설되고 있었으니 이곳에서 문화재가 발굴되기를 누가 바랐을까. 문화재관리국을 어렵사리 설득하여 4개월 만에 첫 발굴에 나설 수 있었으나 상황은 열악했다. 숙소도 먹을 것도 마땅치 않았고, 집중폭우가 쏟아져 뱃사공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말릴 정도였다. 교수는 안전을 생각하여 철수를 고려했지만 함께 조사를 나간 학생들이 조사를 강행하길 원했다. 아마 다음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다행히 교수와 학생들은 고추밭, 마늘밭, 감자밭 곳곳에서 석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따라와 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오랫동안 간직했고,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이 건립될 때 당시 발굴 조사에 참여한 학생과 인부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를 세웠다.
유적지에는 석기가 빼곡히 깔려 있었으므로 추가 발굴이 필요했지만 당국을 설득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고고학의 거장 손보기 교수의 도움으로 겨우 추가 조사에 들어가 가까스로 3만 점에 가까운 유물을 수습했다. 하지만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됨에 따라 유적지는 결국 수몰되었다. 이융조 교수는 수양개Ⅰ지구에서 전체 유물의 출토 면적의 10%도 건지지 못하고 수몰되고 말았다며 당시의 허망함을 풀어 놓았다. 포기하지 않고 댐 수위가 낮아지면 드러나는 지역은 재차 발굴하였으나 영영 수몰되어 버린 곳은 아마도 긴 시간이 흘러 댐이 허물어지거나 가뭄으로 땅이 드러날 때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유리 진열장 너머의 이야기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을 방문하면 전시실 바닥 한쪽에 수양개Ⅰ유적지에서 발견된 50개의 석기 제작소를 재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투명한 유리를 밟고 올라서면 빼곡히 들어찬 둥근 돌무더기가 보였다. 순간 내가 고고학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유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당시 현장에서 발굴팀이 쭈그리고 앉아 돌을 하나하나 골라내었을 것을 상상하니 그들이 쏟았을 노고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제는 유리 진열장에 있는 돌은 그냥 돌이 아니다. 이 돌 너머로 온갖 사람들을 그려볼 수 있다. 이 석기를 손에 쥐고 나무를 깎고, 동물을 사냥하고 무두질을 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었을 사람들, 영험한 벼락도끼라 믿고 산삼을 발견한 듯이 기뻐했을 사람들, 농사에 방해된다며 짜증 내며 돌을 멀리 던져버렸을 사람들, 마당에 있는 돌이랑 똑같은데 뭘 보냐는 핀잔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발굴에 열중했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마음마저 느껴진다.
전시관에서 석기나 다른 유물을 보게 된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물건을 만들어 사용했을지, 누가 어떻게 발견하여 이곳 전시관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유물이 품고 있는 서사와 마음을 떠올리면, 유물의 외양 너머에 있는 더욱 풍부하고 깊은 의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수양개 40주년 회고와 전망,이융조 박물관학보 39 (2020.12.), 1~52쪽
최익현, 스승 당부 안고 살아온 50년 고고학 인생 “학생·동료 교수들 있어서 가능했다”, 『교수신문』, 2016.06.28,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681
서동철, 내 작은 박물관은 개발로 묻힐 유적을 후세에 알리는 최후 보루, 『서울신문』, 2024.08.22.,https://www.seoul.co.kr/news/editOpinion/column/Fireside-chat-sdc/2024/08/22/20240822029001?wlog_tag3=naver
참고문헌으로 박물관 학보 표기법 확인 필요합니다.
이융조, 「수양개 40주년 회고와 전망」, 박물관학보 39 (2020.12.), 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