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1)]바다, 대칭성의 공간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1)/240925/강평
바다, 대칭성의 공간
무조건에 대해서
답사 준비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조몬 답사를 애써 준비했는데 답사 보름 전 일본 지진 소식으로 무산되었다. 급하게 부산 일대 유적지로 변경했다. 다시 시작이다. 동선도 짜고 숙소 예약하기도 빠듯하다. 그런데 여기에 답사 일주일 전 스프링클러 오작동으로 물벼락이 쏟아져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5분 만에 서버, 복합기, PC에 시스템 에어컨까지 침수되었다. 업무가 셧다운되었다. ‘여태 한번도 벌어지지 않은 일이, 왜 하필 지금’이라며,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원망’을 내뱉었다. 무조건 일정대로 보고서를 내놓으라는 고객의 닦달에, 왜 ‘나에게’ 이런 사고가 생겼나 원망은 깊어졌다. 돌아보니 이 물난리는 내가 어찌할 도리 없는, 천재지변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한탄할 일이 아니라, 고객이 막무가내로 요구한다고 나는 무조건 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왜 ‘나’는 이런 천재지변의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를 물었어야 했다. 이번 답사는 ‘잃어버린 대칭성을 찾아서’를 모토로 하는데, 답사를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는 ‘나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을 붙잡고 있었으니 잃어버린 대칭성은 나와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답사를 떠나 한반도 중남부 바다에 살던 사람들의 기록과 흔적을 만났다. 바다에서 고래라는 ‘자원’은 인간과 같은 생명이고, 인간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생명을 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생명이자 고마운 존재인 고래를 최소한의 침해로, 최대한의 예를 갖춰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대칭성의 원리’이다. 한반도 선조들은 바다를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제의를 지냈다. 동시에 바다 생물들과 생존을 위해 목숨 건 싸움을 했다. 바다의 선물을 얻으면서도, 해상 사고에서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생각, 무조건 내 뜻대로 될 것이라는 것은, 옵션에도 없는 외계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번 답사 일정 중 <국립 해양 박물관> 특별전 <임교진의 조행일록>을 보며 바다에서 제를 지내며 무사를 기원하고, 장애물 넘기를 하듯 공무를 수행하던 스펙타클한 그날들이 그려졌다. 그 기록을 보며 문자가 아니라 조개더미 속에서 조개 껍질, 토기 조각, 고래 뼈로 남겨진 선사 시대 유물 역시, 기록은 없지만 상상 속에서 스펙타클 하게 그려졌다. 한반도 바다에서 살던 선조들에게 바다는 내 뜻과 상관없이, ‘나 중심’이 아니라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번 답사는 선사 시대뿐만 아니라 역사 시대도 함께 공부하게 되어, 국가 중심 문자 사회와는 다른 무문자 사회의 특징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이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 선사 시대 고래잡이 배, 조선 시대 조운선, 작살포를 장착한 포경선이라는 서로 다른 배 3척을 탔던 사람들을 만났다. 한반도 바다 사람들은 모두 바다를 경외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 분투했다. 나는 상상의 탑승을 통해 바다 위에서 내가 잃어버렸던 대칭성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고래잡이 나무 배에서
선사 시대 동삼동에서 나무 배를 타고 고래를 잡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동삼동 패총 전시관>과 <장생포 고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무문자 사회의 것이기에, 문자가 아니라 유물로만 말한다. 이 유물들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시대와 비슷한 시기의 유물로서 암각화 그림을 설명하고 당시 생활상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삼동 패총 전시관>에 전시된 고래 뼈, 특히 귀 뼈는 죽어서 떠내려온 고래가 아니라 직접 사냥한 고래의 증거물이다. 고래는 죽고 나면 귀가 빨리 분리되는데, 만약 죽은 상태로 얻어 걸린 것이라면 직접 사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귀 뼈가 발견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고래 뼈로 그 고래는 혹등고래(humpback whale)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암각화에도 등장하는 고래이다. 혹등고래의 무게는 30~40톤으로 어마어마하다. <장생포 고래 박물관>의 복원된 범고래, 브라이드 고래 골격 크기도 거의 공룡 느낌이 나서 나는 쥬라기 공원에 입장한 느낌이었다. 저렇게 큰 고래를 선사 시대 동삼동 사람 몇 명이 배를 저어 작살을 던져 잡았다니 다시금 놀랍다.
그들은 고래를 어떻게 잡았을까?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고래를 잡기 위해 제를 지냈다. 기본적으로 생명을 잡는다는 것에 대한 부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래를 잡기 위한 도구 제작, 기술 연마는 물론 고래를 고래의 모습으로 온 신처럼 최대한 공경하며 잡았다. 작년 북해도 답사 때 아이누족이 곰 사냥에서 보였던 공경을 동삼동 선사인들은 고래 사냥에서 보였다. 공경하고 많이 준비했다고 해도 고래 사냥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훈련과 달리 실전에서는 배가 뒤집어질 수도 있고, 고래와 충돌할 수도 있고, 고래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고래의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상어의 습격을 당할 수도 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노력하고 원하고 절실히 필요해도 고래가 잡혀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패총에서는 일본 조몬 토기 조각과 일본 규슈 지방산으로 확인되는 흑요석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는 이미 한국과 일본 사이 대한해협이라는 거친 바다가 있던 시기이다. 부산에서 일본 대마도까지만 해도 직선거리로 45Km이다. 일본에서도 부산 동삼동 산(産) 조개 팔찌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두 지역간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래잡이 배는 고래를 끌고 육지로 와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근거리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흑요석과 조개 팔찌를 교역하려면 원거리 항해가 필요하다. 동삼동 선사인들은 그 먼 거리까지 왜, 어떻게 갔을까. 흑요석은 자연산 유리로서 날카로운 도구로 쓰이거나 장식품이다. 교역물인 조개 팔찌는 장식품이다. 사돈을 맺자고 거기까지 갔을까,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갔을까, 표류를 당해 어쩌다 알게 되었을까, 등대도, 지도도 없는데, 나무 배를 노 저어 갈 수 있을까. 선사시대 동삼동 사람들이 원거리 항해를 했던 사연이 너무 궁금하다.
나는 몇 해 전만해도 석기 시대 제례를 미신과 동급으로 취급해서, 과학 기술이 없기에 비는 것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동삼동 선사인들은 근해에서 고래를 작살로 잡고 일본까지 원거리 교역을 했던 사람들로 지식, 기술면에서 뛰어나다. 그들에게 제례는 수동적이고 기복적이기만 의식이 아니라 ‘나’를 고래와 함께 살고, 대적하는 주체로 보고, 바다에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는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다.
조운선(漕運船)에서
<조행일록(漕行日錄)> 전시의 부제는 ‘서해바다로 나라 곡식을 옮기다’이다. <조행일록>은 전라북도 함열(지금의 익산) 현감이었던 임교진(1803~1865)이 쓴 일기로 1863년 세곡을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운반한 과정을 담고 있다. 19세기에는 조창(漕倉, 세곡창고)이 속한 지역의 관리가 조세를 걷고, 운반하는 책임까지 함께 맡았다. 임교진은 관할 8개의 고을 현 전북 남원, 익산, 완주, 진안, 충남 금산 일대에서 세곡(稅穀, 세금으로 납부한 곡물)으로 거둔 쌀과 콩 1만 3천여 석을 12척 배에 나눠 싣고 한양 경창(광흥창)까지 무사히 운송한다. 지금으로 치면 익산 시장이 시정(市政)을 보다가 국세청 직원, 물류 팀장, 회계 보고, 인사 관리 등 총괄 팀장까지 하는 셈이다. 무리하게 운항을 강행했다가는 미션, 목숨도 끝나고, 그렇다고 마냥 안전하게 가다가는 납기일에 맞추지 못해 혹독한 문책이 예상된다. 임교진의 조행은 선사 시대 노 저어서 작살로 몇십 톤 고래를 잡는 것과 난이도 면에서는 뒤처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임교진만 운 나쁘게 풍랑을 맞아 고전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운선은 풍랑을 맞아 자주 어려움을 겪었고 태종(1367~1422) 때 기록에 의하면 조운선이 침몰해서 선원 1,000명과 세곡 1만 석이 바다로 사라지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조행 전에 바다와 강에 제를 지내고, 사고가 나면 또 제를 지내 바다, 강에게 비는 장면이 나온다. 조행은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 또 노력했으니 바다더러 알아달라고 요구하거나, 왜 알아주지 않느냐고 원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충남 안흥량(지금의 안면도)은 상습 사고 구역으로, 당시 그 지역에서는 배가 고프다고 우는 아이가 있으면 조운선이 곧 좌초해서 쌀을 주을 수 있다며 달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그 바다에서 아마도 임교진은 공무 수행 중 바다에 경외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 같다. 어찌해도 인력으로는 안되는 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익산 현감이라는 고정된 땅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경험, 그 경험 자체가 바다가 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임교진은 항해 경험도 없고 고령으로 체력도 바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정무 경험을 조운에 십분 발휘한다. 운항은 물때나 풍랑 기운을 아는 도사공의 판단에 전적으로 따랐다. 내가 우두머리다, 하라면 하라고 단순히 일정표에 맞춰 강행하지 않고 상황 판단을 도사공에 맡긴다. 또 12척 배의 관리 상태 차이가 컸기 때문에 어떤 사공이 어떤 배를 운항할지는 제비 뽑기로 했다고 한다. 제비 뽑기는 특혜 논란을 불식시키는 공정한 방법이면서도 어떤 배도 뽑을 수 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겸허함도 포함되는 방식이다. 생각해보니 답사 숙소 배정할 때 우리도 제비를 뽑았다. 제비 뽑기에는 어떤 방에서, 누구와도 잘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좋은 방법이었던 것 같다.
<조행일록> 전시회를 보고 처음에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떠올리며, 국가가 쌀, 콩이라는 계량화, 저장, 운반할 수 있는 재료를 수탈하는 현장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임교진의 일기의 내용을 찬찬히 볼수록 국가의 수탈은 수탈이더라도, 그 현장에서 바다를 마주하며 겸허하게 제를 지내고 준비하고 또 돌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임교진의 노력에 고개가 숙여졌다. 나는 겨우 11명, 3박 4일 답사 대장을 하면서도 일본 지진에, 갑작스러운 개인적인 업무 차질에도 답사가 잘 되지는 않을까 부담을 느꼈다. 임교진이 12척 세곡을 가득 싣고 첫 항해를 2달여 했을 생각을 하니 그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작살포 포경선에서
<장생포 고래 박물관>에는 1986년 장생포에서 마지막 포경을 했던 진양 6호가 전시되어 있다. 이 배는 선사 시대 고래잡이 배나 조선시대 조운선에 비해 규모나 작동 방식이 다르다. 큰 동력선이다. 과녁을 맞춰 손으로 버튼을 누르면 빠르고 치명적인 작살이 고래에 적중된다. 이 동력선에서도 풍어와 무사 귀환을 비는 제사도 지냈겠지만, 선사 시대 동삼동 패총 사람들처럼 고래와 인간이 같은 생명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6년 포경 금지 전까지 장생포에서는 연평균 밍크고래 900마리 규모를 동력선과 작살포로 잡았다. 과녁 안에 들어오면 틀림없이, 무조건 고래를 잡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밍크고래를 잡아야 하는 경쟁도 생겼을 것이다. 또 선사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대규모 인원이 고래잡이에 참여하는 등 인구가 대규모가 되었을 것이다.
고래를 남획했던 도구인 작살포를 보다가 <장생포 고래 박물관> 이전 <동삼동 패총 박물관>에서 선사 시대 믹서기 ‘갈돌과 갈판’을 보고 나도 모르게 내뱉었던 ‘어느 천 년에’라는 말이 생각났다. 나는 로스팅한 커피 콩도 전동 그라인더로 갈아서 사온다.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이다. 전동 그라인더를 선호하고 ‘갈돌과 갈판’을 생산성이 낮은 도구로만 인식하는 내가 고래 잡이 작살포가 문제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맞지 않다. 그렇다고 작살포를 남획 도구로 칭하면서 갈돌을 대단한 도구라고 박수치는 것도 지나치게 낭만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돌과 작살포는 인구, 사회 규모가 다르고, 따라서 생산성에 대한 철학이 다른 도구이다. 동력선과 작살포로 고래를 잡아본 이상, 나무 배를 노 저어 작살을 내리꽂아 고래와 만나는 방법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갈돌, 작살을 쓰는 사회는 소규모의 사람들이, 조금씩 먹고 사는 사회이다. 도구는 이렇게 사회 규모와 생산성과 연결된다. 고래는 버리는 부위 하나 없이 기름, 가죽, 뼈, 살로 해체되어 100여 개의 용도로 활용된다고 한다. 모르기는 해도 장생포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부위, 즉 해체 대비 활용도가 떨어지는 부위 일부는 버려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 시간에 고래를 더 잡는 것이 ‘부가가치’가 더 높다고 여겨지는 경우에 말이다. 부가가치는 생명이 아니라 상품이 되었을 때 붙는 꼬리표이다.
<장생포 고래 박물관>에는 고래를 지키기 위해 플라스틱을 버리지 말라는 캠페인이 진행 중이었다. 사실 단순히 생각해도 1986년이 마지막 포경이라고 보면 거의 40년간 고래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장생포 바다에는 고래가 엄청 많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남획의 원흉이었던 작살포가 사라진 뒤에도 그보다 더한 플라스틱, 비닐, 그물 등 해양 쓰레기들로 고래, 그리고 수많은 해양생물들이 쓰러져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작살포였지만, 지금은 작살포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의 편리와 사정만 생각하고 투기한 쓰레기가 문제였다.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
바다는 생명이 살고, 인간은 그 생명들을 자원으로 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생명들과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 이번 답사에서 나는 ‘갈돌과 갈판’을 보며 전동 그라인더가 효과적이라고 하고, 전동 그라인더와 다를바 없는 작살포는 안된다는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아마도 전공 그라인더는 내가 쓰는 편리한 도구이고, 작살포는 남이 쓰는 도구이자, 고래를 멸종 위기로 몬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대칭성의 문제는 생산성의 문제와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생산성은 높이되 욕심을 적정하게 자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전동 그라인더, 작살포를 쓰지 말자는 주장도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보다는 자기 편리 등 ‘나’만 생각하는 각자가 문제이다.
우리 답사팀은 한반도 중남부 지역 바다를 답사로 다녀왔다. 일본 조몬 답사가 무산되고 지난해 북해도 답사를 별 탈 없이 갈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느꼈다. 답사 일주일 전 벌어졌던 사무실 스프링클러 오작동에 대한 나의 반응은 뿌리 깊은 ‘나 중심’의 비대칭성을 보여줬다. 비대칭성은 나만 생각하는 것이다. 내 노고, 내 감정, 내 고통만을 말이다. 내 욕심대로 무조건 되기를 바라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여기까지 오기까지 보이지 않게, 조건 없이 자연이 내어주었던 선물들이 보이지 않고, 그러니 고마워하지도 않게 된다.
선사시대 한반도에서 바다와 맞서 싸우고 바다와 더불어 살던 사람들이 ‘나는 예외다, 무조건 일이 되어야 한다’는 나의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왜 ‘나만’, ‘무조건’이냐고 묻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의미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바다가 이렇게나 주는데, 바다가 이렇게나 무서운데, 그리고 매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데라며 당최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 것 같다. 원망대신 고마움이 많았던 그들을 생각해본다. 이번 답사 말미 손유나 선생님의 ‘답사란 이런저런 일을 겪는 것’이라는 말이 좋았다. 어떤 일도 긍정한다는 것은 ‘나 중심’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아낌없이 주었던 수많은 존재들을 떠올리는 일일 것이다. 이번 답사도 많은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공부하고 또 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사진1. <동삼동 패총 전시관> 고래뼈
사진2. 조행일록
사진3. 작살포, 포경선
사진4. 갈돌과 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