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 다시 보는 돌
다시 보는 돌
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쌓아 올린 돌들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 여기저기에서 탑을 이루고 있고, 누군가 거기에 마음을 보태고 있다. 산을 오르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다. 산뿐만이 아니다. 바다, 강, 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지천에 널려 있는 게 돌이고, 쌓아 올린 돌들이 희귀한 종류의 암석도 아니고 별 특별한 모양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들은 왜 흔하디흔한 돌을 쌓아 마음을 빌까.
인문세에서 ‘잃어버린 대칭성을 찾아’라는 주제로 떠난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에서 나는 ‘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박물관에 가면 여기저기 발에 차이는 별 쓸모도 없는 돌들이 귀한 유물로 둔갑해 유리 전시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나 같은 일반인은 아무리 봐도 그 돌이나 땅에 널린 자갈돌이나 별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요 앞에서 주먹도끼같이 생긴 돌을 본 것도 같고, 사냥돌은 그냥 아무거나 좀 큰 돌을 주워 던지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 긁개인지, 찍개인지는 어딜 보고 어떻게 아는지 좀처럼 유리 안의 돌 유물에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이랬던 석기가, 3박 4일 동안 선사유적 박물관들을 답사하면서 마지막 날 즈음이 되자 어느 순간 다르게 보였다. 작은 좀돌날과 격지, 찌르개들이 예쁘게 보여 목걸이에 하나 걸고 다니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지금 당장 발굴 현장에 투입되어도 석기들을 종류별로 구분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인류에게 돌이란 내가 지금 떠올리듯이 별 볼 일 없는 자연물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만 년 동안 인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다양한 석기들, <울진 후포리 신석기 유적관>의 인골과 함께 매장된 잘 마연된 매끈한 돌들,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의 주춧돌은 이러한 생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답사 동안 만났던 돌들을 통해 인류에게 돌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였을지 한번 생각해보자.
석기, 인류의 만능 도구
충북 단양의 수양개 유적은 중기 구석기부터 원삼국 시대까지 인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특히 수양개 유적의 Ⅰ지구에서는 50여 곳의 석기제작소가 발굴되어 후기 구석기의 석기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의 제 2전시관에는 주먹도끼, 사냥돌, 좀돌날과 좀돌날몸돌, 긁개, 밀개, 슴베찌르개, 주먹자르개, 찍개, 톱니날연모, 홈날석기, 새기개 등의 도구들이 종류별로 구획을 달리하여 전시되어 있었다. 다른 박물관이 주먹도끼나 슴베찌르개 와 같이 대표적인 유물 몇 개만 전시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석기의 이름과 설명, 제작 방법의 영상까지 볼 수 있었다.
유리관 너머 전시된 석기들은 사실 그 석기가 사용된 시대와 내가 있는 지금의 헤아리기 어려운 간극만큼이나 아득하고 멀고 낯설다. 공구함만 열면 잘 연마된 각종 도구들이 가득한데, 저 정교하지도 않고 뭉턱하기만 한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어 보이는 돌덩어리가 무슨 생각을 불러온단 말인가. 그런데, 석기 도구들만 전시된 여느 박물관들과 달리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에서 석기의 종류별로 그 제작 방법을 영상으로 보자 생각이 좀 달라졌다. 영상을 유심히 보다 보면 아무 돌이나 집어서 마구 두드리고 깨어서는 그 도구를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단양역에서 집으로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중 손유나 선생님이 인근 공원 구석에서 직접 석기를 만들어본 이야기를 해 주셨다. 함께 따라가 본 나는 같이 바닥에 주저앉아 종류가 다른 돌들 부딪혀 보고 깨뜨려 보며 박물관에서 본 ‘홈날 석기’를 만들어 보았다. ‘홈날 석기는 격지 또는 돌날의 어느 한 부분에 오목한 홈을 낸 석기로 홈의 폭이 좁은 것이 특징이며 주로 나뭇가지나 뼈를 다듬거나 잘라내는 데 쓰였다.’(<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 유물 설명) 우리는 함께 만든 홈날 석기로 화단의 풀들을 잘라 보았는데, 이도 쉽지 않았던 것이 얇고 가늘다고 해서 잘 잘리는 것도 아니어서 풀에 따라 다른 도구를 사용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기 제작 영상이 자극이 되어 직접 손에 쥐어보고 깨뜨려본 돌은 나를 그 아득한 시간 속으로 데려가 주었다.
석기들은 도구별로 용도도, 사용된 암석도, 만드는 방법도 다 달랐다. 그리고 그것은 무작위적으로 이리저리 두드려보다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었다. 물론 처음부터 주먹도끼는 약간 길쭉한 모습으로 손에 쥐고 물건을 자를 때 사용하는 것으로 격지를 비스듬히 떼어내고, 찍개는 사냥한 동물이나 나무, 뼈 등을 찍는 용도로 둥근 돌의 한쪽 면이나 양쪽 면을 만든다 등의 공식이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시작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석기를 사용하면서 각 용도에 맞는 성질의 돌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공유하며 그 형태가 정형화되어 갔을 것이다. 그들이 생활의 지천에 널린 돌들을 얼마나 자세히 살피고 그 특성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돌, 오랜 시간 인류의 도구
선사인들에게 돌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그들의 삶에서 석기가 전부이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남겨진 석기들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유추해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적지마다 발견되는 비슷한 모양의 석기들과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혀 발견되는 석기들은 분명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다.
우리나라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에는 인근 지역(수양개, 구낭굴, 금굴, 제천 등지)에서 발견된 석기들이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중기구석기부터 후기구석기의 석기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중기 구석기 이후는 기존의 크고 무거운 주먹도끼에서 작고 날카로운 형태로 석기가 변화하고 이를 뼈나 나무와 결합하여 도구를 사용함으로 문화가 발전하게 되는 시기다. 이로서 도구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복잡해진다. 구석기 유적은 한반도 전체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이 중 내가 본 곳은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가 있는데, 이 두 곳에서 전기구석기의 주먹도끼가 발견되었다. 우리는 ‘구석기’라 하면 뗀석기를 사용한 오래된 인류로만 떠올리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역사가 인류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기구석기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도구를 처음 사용한 약 300만 년 전부터 12만 년 전까지, 중기구석기는 그로부터 약 3만 5천 년 전까지, 후기구석기는 1만 2천 년까지를 말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처음 사용한 석기는 찍개였고, 주먹도끼는 약 100만 년 전 쯤 호모 에렉투스가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만 봐도 주먹도끼를 사용하기까지만 200만 년, 주먹도끼에서 다양한 종류의 정형화된 석기를 사용하기까지가 또 약 100만 년이다. 뿐만 아니라 석기는 철기가 등장하기 전, 청동기시대까지 일상 생활도구로 사용되었다. 도구 사용의 역사에서는 약 93%,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역사에서는 약 80%의 기간에 인류는 석기를 사용했다. 물론 돌 외에도 나무, 동물의 뼈 등도 도구의 재료로 사용되었지만 그렇다고 오랜 시간동안 인류가 돌을 도구의 재료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긴간돌도끼, 장례 부장품
<울진 후포리 신석기 유적관>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매장 유적을 볼 수 있다. 40여 명의 인골과 껴묻거리가 함께 묻힌 그곳에서는 특이하게도 사용 흔적이 없는 긴간돌도끼 130여 점이 발견되었다. 나는 답사 자료집에서도 매장 유적이 흥미로웠는데, 직접 본 긴간돌도끼는 더 기이했다. 성인 여성 팔뚝의 길이와 손목 두께만한, 표면이 맨들맨들하게 잘 갈려진 돌들이 무덤의 흙 위에 널려 있었다. 이 외에도 돌이나 옥으로 만든 꾸미개들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이는 다른 신석기 무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고, 긴간돌도끼는 그 모양과 130점이라는 많은 개수가 더욱 기이하게 여겨졌다.
나는 맨들하게 마연된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긴간돌도끼들을 보자 부산의 <복천 박물관>에서 보았던 ‘덩이쇠’ 매장품이 떠올랐다. 덩이쇠는 철기시대 매장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껴묻거리로, 시신의 아래에 철을 납작하게 만든 덩이쇠들을 열을 지어 묻었다. 당시에 철은 생활용품이나 무기 등을 만들기 위한 단단한 재료로 덩이쇠는 유용하고 중요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또한 덩이쇠와 긴간돌도끼 부장품의 공통점은 모두 사용되지 않은 것이었다는 점과 도구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점이었다.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을 함께 묻었다는 것은 실생활에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간돌도끼의 경우 일상에서 사용하기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어 그 자체로는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많은 수의 긴간돌도끼는 어떤 이유로 유골과 함께 묻혔을까? 돌은 오랜 시간 인간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고, 후포리 유적의 시기로 추정되는 신석기나 청동기에도 주된 생활도구는 석기였다. 그렇다면 철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에 덩이쇠와 토기, 장신수들을 넣었듯이 후포리 유적의 사용되지 않은 석기의 원형적 재료로 보이는 긴간돌도끼도 죽은 사람의 지위나 사후 세계를 위한 부장품이지 않았을까.
내가 딛고 선 땅
답사의 시작 하루 전에 나는 부산의 아미동 비석마을에 방문했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자기 한 몸 누일 곳을 찾아 모여든 곳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 부산으로 온 사람들에게 집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비석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묘지였다. <부산근현대 역사관>에서 만난 해설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나마 연줄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미군의 천막을 얻어서 임시 집으로 사용했지, 대부분 거적때기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고 한다. 이때 유용하게 사용된 것이 일본인들의 비석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일본인들의 묘지 위에, 즉 일본인들의 묘지에 있던 비석 위에 지어진 집들이 있다. 일본인 묘지의 상석이나 비석들이 가파른 언덕의 디딤돌, 옹벽 또는 집의 주춧돌 등으로 활용되었다. 죽은 자의 무덤, 그것도 치욕스러운 적의 무덤이라는 점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돌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해보며 나는 그날 보았던 비석마을의 주춧돌이 떠올랐다. 아슬아슬 쓰러질 것만 같은 집이 단단한 비석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말이다. 돌은 아슬아슬한 삶을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는 지지대 같은 것이었다. 지금이야 공장에서 옮겨온 시멘트를 틀에 붓기만 하면 되고 그런 재료들은 넘쳐난다. 우리는 집을 짓거나 보수하는 노력을 돈으로 해결하기에 땅에 대한 이런 감각이 거의 없다. 단단한 땅 위에 내가 서 있다는 느낌, 그 땅이 있어 내가 살 수 있다는 느낌, 그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
돌은 대지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지각을 이루는 암석의 종류에 화성암, 변성암, 퇴적암이 있고 그 생성과정이 어떻다는 과학적 지식을 선사인들이 알고 있지는 못했겠지만 나는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지각, 암석, 돌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