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동물원 답사기] 나의 감수성을 자극한 미술관 옆 동물원
<동물원 기행문>
2024.10.14. 최수정
나의 감수성을 자극한 미술관 옆 동물원
오랜만에 서울 대공원 동물원을 갔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울 대공원 동물원을 몇 번 다녀봤지만, 미술관이 함께 있었는지 몰랐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영화도 있었던 것 같은데, 미술관과 동물원이 어떤 낭만적인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잠깐 생각하고 있는 사이, 달님은 직접 행동하셨다. 어느새 미술관에 달려갔다 오시면서 ‘연결’하는 ‘건축’이라는 키워드의 미술관 전시 티켓을 내미셨다. 종이 설계도와 3D 모형이 함께 전시되어 있고 비디오 영상도 감상하는 입체적 전시였다. 건축을 위해서는 종이에 그리는 이차원 평면 설계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계도와 3차원의 모형이 함께 있으니 이 둘의 관계에 더 관심이 갔다. 글자처럼 종이에 얌전히 누워있던 설계도를 오려서 그대로 일으켜 세운다고 해서 3차원 형태가 되는 것이 아닐 텐데, 평면을 입체로, 입체를 평면으로 오가는 건축가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건축가는 건축주가 원하는 집의 이야기를 듣고 건축주의 지나온 삶과 다가올 삶의 모든 관계를 연결하고 이어 붙인다. 상상을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평면에 그린 다음 다시 그것을 하늘과 땅과 자연과 사람이 연결되는 삶의 공간으로 창조한다. 연결과 접속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공간을 구성하는 건축가의 놀라운 재능을 감탄하며 건축가의 연결 공간을 떠나 동물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물원 전체도 누군가 설계하고 차근차근 공간을 구축했을 것인데, 어떻게 동물들의 이야기를 구성했을까. 동물원에서도 나는 어떤 ‘연결’을 볼 수 있을까.
관계를 차단한 울타리
프란스 드 발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는 자연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첫 장을 연다. 저자는 인간만이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고 한다. ‘문화’란 타자를 기반으로 하는 인식의 지평이 전제가 된다. 타자와 ‘우리’를 변별하는 사회적 소속감이 ‘문화’를 만든다. ‘변별’은 역설적으로 ‘타자’를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타자가 없으면 나를 무엇으로부터 변별할 수 있을까. 인문세는 ‘범고래 부족’이다. 자연의 범고래 이미지를 가져와 다른 공동체와 구별하며 인문세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범고래를 의인화하여 우리 문화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우리가 공부 공동체의 일원이고, 자연의 일부임을 확인한다.
문화를 만드는 ‘변별’은 타자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인간의 문화’를 다른 무엇과 구별해 줄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문화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변별력이 많은 풍요로운 문화를 위해서는 더 많은 타자와의 마주침 속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동물원에서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유리 벽과 울타리는 동물이라는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인원관 입구에서부터 동물원이 계획한 순서대로 이동하며 동물들을 구경한다. 차례대로 앞사람을 따라 유리에 재현된 홀로그램 책장을 넘기듯 차례차례 유리창의 그림을 넘긴다. 투명 유리로 가로막힌 벽을 통해 보는 나의 눈은 유리 벽 너머 맞은편 벽에 가로막혀 되돌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순간 나는 그 눈이 누구의 눈인지 헷갈린다. 멍하니 우리에 갇힌 동물을 바라보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동물과 나를 가로막는 유리벽보다 더 큰 벽이 몇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간의 손으로 인간 너머 건너편으로 갈 수 없게 쳐둔 울타리가 서로를 가로막고 있다.
오늘은 어쩐지 인간의 안전과 보호의 명목이지만 동물원에 들어선 순간 나도 마치 동물원의 큰 울타리 안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내가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그 순간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울타리는 나와 동물 사이의 공간을 구획할 뿐 아니라 두 종 사이에 흐르는 정서와 감각도 차단하고 있었다.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골과 높은 장벽을 어떻게 할까. 동물들의 마음이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한 감수성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유리벽을 넘고 싶어
서로 격리되고, 다른 종들과의 상호 작용을 할 수 없게 된 동물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을 돌보는 관리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스스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의 자극을 줄 만한 외부 관계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다. 호기심을 유발하고 좇아 행동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미끈한 유리벽 너머 관람객들에게도 무관심하다.
커다란 고릴라 한 마리가 시선은 멍하니 다른 곳을 보면서 편평한 유리벽에 한없이 얼굴을 부비대고 있었다. 무기력한 얼굴 전체로 천천히 유리벽을 밀어내듯 차갑고 맨들맨들한 표면을 의미 없이 문지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분명 유리벽 바깥의 생명들은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들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가 보다. 자기 앞에 있는 존재들에게 아무리 자기 몸을 밀착시키려 해도 도무지 닿을 수 없어 모든 것을 체념한 것일까.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풀 한 포기 없는 차가운 사각 시멘트 안에서 고릴라는 두려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공포로 있는 힘껏 크게 소리 질러 도움을 요청하지만 내 안에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꿈속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을까. 한동안 유리창을 사이로 나와 고릴라는 종이 인형처럼 납작하게 눌린 채 서로의 단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다음 우리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집이 작은 침팬지 한 마리가 순식간에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너무나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쳤다. 투명 유리창의 효과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보이되 접촉을 차단하는 유리창이 나를 안전하게 했다. 눈으로 보기만 하고 모든 감각을 차단하는 유리벽이 제 역할을 다했다. 작고 날쌘 침팬지가 유리벽을 강하게 두드리며 나를 위협할 때 동물원의 효용성이 드러난다. 사납고 포악하고 위험한 동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 동물을 가둔다. 작은 침팬지는 나를 놀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돌아서 외부로 나가 놀았다. 어쩌면 그 침팬지의 행동은 무료한 하루의 기분 전환용 장난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가 그렇게라도 스스로 자기 삶의 한 사건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몸으로 통하는 감정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 세미나 시간에 달님은 의인화를 통한 감정이입이 ‘이타의 핵심’이라고 했다. 내 감정을 타자에게 이입하는 것이 어떻게 이타적이라는 것일까 생각해 봤다. 감점이입은 그의 마음이 어떨까, 그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이입은 생각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감정이입이야말로 ‘신체적 모방’을 통해서 가능하다. 개가 호랑이 새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그의 몸으로 그의 움직임, 자세, 균형, 접촉에 대한 감각을 배우는 일부터 시작된다. 개의 몸이 호랑이의 몸이 되어보고 흉내 내면서 내 몸에 그의 감정을 입힌다. 개의 몸이지만 어린 호랑이에게 매혹되어 이끌리고 그의 모습을 따라 하며 그가 되는 그 순간 ‘상호 인정을 구하는 사랑’의 멜로드라마가 시작된다. 호랑이를 키우는 개는 어미개로부터 사랑의 기쁨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을 종에 상관없이 전한다. 그렇게 사랑은 무한히 원래 있던 본성처럼 전해진다.
고대에는 동물을 인간보다 고차원적 존재로 여겼던 때가 있었다. 사슴은 인간보다 더 빨리 뛰고, 곰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 자체이기에 인간은 그들에 비해 열등한 존재였다. 따라서 인간은 그들에게 인간에게는 없는 힘을 얻어내기 위해 그들의 행동과 정서를 모방하는 의식을 치렀다. 때로는 위험하고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동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자기 신체를 통해 그들을 알고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현대인은 더 이상 자연의 동물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동물들을 모방하고 배우며 자신들의 문화 범주를 넓혀가는 대신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나약한 인간을 위협하는 동물들을 사냥하고 가두면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고리에서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자연의 우연을 차단하고 안전한 존재가 되기 원하면서, 뜻밖에 출현하는 경이와 놀라움을 경험할 기회를 잃었다.
감수성을 준비하자
인간의 문화를 동물의 문화와 분별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풍부한 다양성이다. 문화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시간 자연을 이해하고 배우려 했는지에 대한 지평이다. 하지만 이제 인간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종들의 힘과 지혜를 배울 생각이 없다. 이는 내가 미술관에서 본 종이 위 설계도를 3차원 구조로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동물원의 유리를 통해 생명을 바라보듯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물을 보면서 그림 속 동물을 먼저 떠올리고, 단지 그 외형이 그림과 얼마나 닮았는지 다른지만 확인했다. 우리에 갇힌 동물들의 삶이 어떠하며 그들이 소외된 관계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없었다. 동물들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관계 맺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저 멀리서 구경할 구경거리로서 바라보며 생명 앞에서 생명을 보지 못했다.
우리에 갇힌 동물들 앞에서 생명은 나와 아이들뿐인 듯 행동했다. 놀랍고 신기하게 생긴 동물들의 모습에 아이가 어떻게 반응할지만 관심이 있었다. 거대한 덩치의 동물을 앞에 두고 유리문 밖에서 안전하게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우월감도 느꼈다. 사자가 아무리 크고 포악해도 작은 아이를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즐겁기도 했다.
나는 오늘 동물원에서 동물의 마음이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바라는지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웠다. 나와 동물들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내가 그들을 알기 위한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내 머릿속 그림책에 그려진 동물들을 일으켜 세워, 그들 삶의 자리를 구성하는 관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만 같다. 내가 그동안 동물원의 울타리라고 생각했던 그 벽은 내 사고의 장벽이었다. 그 장벽을 서서히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아무것도 보고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인류학 답사 일정으로 동물원을 오게 되면서 나는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그 장소에 있는 존재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느냐에 고민하는 것에 달려있음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존재들을 기억하며 그들과 내가 다시 만날 시간을 위해 감수성을 단련하고 준비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 침팬지를 다시 만나러 가보고 싶다. 그도 아마 내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