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동물원 답사기] 미술관 옆 동물원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10-21 17:47
조회
31

<동물원 기행문>

2024.10.21. 최수정

 

미술관 옆 동물원

 

미술관 옆 동물원에 유인원을 만나러 갔다. 왜 미술관과 동물원이 함께 있는지 모르지만, 어렵게 시간 낸 하루를 배려하며, 동물원도 구경하고 미술관도 관람하며 모쪼록 흡족한 문화생활을 즐기라는 것인가? 그러나 미술관과 동물원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미술관과 동물원의 조합은 동물원이 미술관처럼 관람 시설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처럼 동물원 동물을 인간의 방식이 빚어낸 작품으로 관람하라고 의도한 배치 같다.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라는 책에서 인간은 문화라는 안경을 벗고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인간 뿐만 아니라 어떤 생물도 자기 감각기관으로 접한 환경(Umwelt)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생활 양식에서 벗어난 세상을 볼 수 없다. 박쥐는 소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별코두더지는 민감한 촉각으로 세상을 본다. 인간이 박쥐와 별코두더지의 주체적 환경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프란스 드 발은 인간이 동물을 의인화하는 일은 필연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인간 중심의 의인화가 아니라 동물중심 의인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인화를 동물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써야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목적으로 쓰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동물원에 갇힌 동물을 보며 나는 어떻게 동물중심 의인화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인간이 만든 동물원의 형식에 종속되어 있는 동물의 관점을 인간인 내가 이해하고 알아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문화가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문화적 불이익을 담보로 한다는 생각이 여러 가지 질문을 준다. 동물원에서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동물의 관점일까? 아니면 그 동물에 투영된 인간의 관점일까?


서로 배우는 문화

인간은 오랫동안 인간만의 문화를 주장하며 문화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별해주는 우월성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에서 인간만이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고 한다. 동물도 그들의 생활양식을 만들며 학습하고 습관으로 유지해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동물들은 서로에게서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배우는 원초적 관계다. 자연의 모든 것을 다 먹어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당연히 가까이에서 보고 배울 타자가 많을수록 생존이 유리하다. ‘인간의 문화란 자연의 수많은 타자와 함께 살면서 배운 생활 양식이 바탕이다. 따라서 인간 문화의 우수성을 말하는 것은, 자연의 수많은 타자를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물원에서 원숭이가 있는 야외 울타리에서 원숭이는 우리 집 앞 놀이터에 있는 그 놀이기구와 같은 기구에 긴 팔로 매달려 여유롭게 공간을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낮은 소리로 , 저거 우리 애도 잘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달님이 듣고 저거 이름이 실제로 몽키 바로 불려요. 라고 가르쳐주셨다. 인간은 작은 놀이기구를 만들 때조차 원숭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데 인간의 수많은 삶의 양식들은 말해 무얼 할까?

나는 동물원의 울타리 너머를 바라볼 때 그 순간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전과 보호 명목의 울타리는 나와 동물 사이의 공간을 구획할 뿐 아니라 두 종 사이에 흐르는 정서와 감각도 차단하고 있다. 침팬지와 내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골과 높은 장벽을 어떻게 할까?


멀어진 관계

유인원관 입구에서부터 동물원이 계획한 순서대로 이동하며 동물들을 구경한다. 차례대로 앞사람을 따라 유리에 재현된 책장을 넘기듯 차례차례 그림을 넘긴다. 가로막힌 벽을 통해 보는 나의 눈은 유리벽 너머 맞은편 벽에 가로막혀 되돌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순간 나는 그 눈이 누구의 눈인지 헷갈린다. 멍하니 우리에 갇힌 동물을 바라보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동물과 나를 가로막는 유리벽보다 더 큰 벽이 몇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간의 손으로 인간 너머 건너편으로 갈 수 없게 쳐둔 울타리가 너무 높다.

서로 격리되고, 다른 종들과의 상호작용할 수 없게 된 동물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을 돌보는 관리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스스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의 자극을 줄 만한 외부 관계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다. 호기심을 유발하고 좇아 행동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미끈한 유리벽 너머 관람객들에게도 무관심하다.

커다란 고릴라 한 마리가 시선은 멍하니 다른 곳을 보면서 편평한 유리벽에 한없이 얼굴을 부비대고 있었다. 무기력한 얼굴 전체로 천천히 유리벽을 밀어내듯 차갑고 맨들맨들한 표면을 의미 없이 문지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분명 유리벽 바깥의 생명들은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들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가 보다. 자기 앞에 있는 존재들에게 아무리 자기 몸을 밀착시키려 해도 도무지 닿을 수 없어 모든 것을 체념한 것일까? 한동안 유리창을 사이로 나와 고릴라는 종이 인형처럼 납작하게 눌린 채 서로의 단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다음 우리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집이 작은 침팬지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유리를 두드리고 순식간에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너무나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쳤다. 투명 유리창의 효과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보이되 접촉을 차단하는 유리창이 나를 안전하게 했다. 눈으로 보기만 하고 모든 감각을 차단하는 유리벽이 제 역할을 다했다. 작고 날쌘 침팬지가 유리벽을 강하게 두드리며 나를 위협할 때 동물원의 효용성이 드러난다. 사납고 포악하고 위험한 동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 동물을 가둔다. 작은 침팬지는 나를 놀래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돌아서 외부로 나가 놀았다.

흉내를 내 볼까

고대에는 동물을 인간보다 고차원적 존재로 여겼던 때가 있었다. 사슴은 인간보다 더 빨리 뛰고, 곰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 자체이기에 인간은 그들에 비해 열등한 존재였다. 따라서 인간은 그들에게 인간에게는 없는 힘을 얻어내기 위해 동물의 행동과 정서를 모방하는 의식을 치렀다. 사슴과 곰을 모방하는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동물이 가진 힘을 자기 몸에 입히려 했다. 그 와중에 때로는 위험하고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동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자기 신체를 통해 그들을 알고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문화로 전승했다. 그러나 현대인은 더 이상 자연의 동물과 함께 살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동물을 모방하고 배우며 자신들의 문화 범주를 넓혀가는 대신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나약한 인간을 위협하는 동물을 사냥하고 가두면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고리에서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자연의 모든 우연을 차단하고 안전한 존재가 되기 원하면서, 뜻밖에 출현하는 삶의 경이와 놀라움을 경험할 기회도 포기했다.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세미나 시간에 달님은 의인화를 통한 감정이입이 이타의 핵심이라고 했다. 내 감정을 타자에게 이입하는 것이 어떻게 이타적이라는 것일까? 감정이입은 그의 마음이 어떨까, 그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이입은 생각만으로 되지 않는다. 감정이입이야말로 함께 한 시간에 비례하고 그 시간 동안 주의 깊은 관찰과 모방이 있어야 한다. 고대인처럼 나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외부로 향하게 하고 이입하려는 대상에 닿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고대인처럼 가면을 쓰고 뱀이 되어 보고, 곰이 되어 볼 수 없다. 그래서 동물원 어린이 체험 활동에 그리기 체험과 만들어보기 체험이 있는지 모른다. 어린이들의 체험 활동처럼 자기 손으로 침팬지 신체를 그려보고, 따라 움직여 보는 것이 필요하다. 잠깐이라도 자기 신체로 다른 신체를 모방해보며 다른 감각을 사용해 보는 것이다. 흉내 내고 따라 하다 보면 자기 몸으로 그의 움직임, 자세, 균형, 접촉에 대한 감각을 상상하게 되고 관심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의 몸과 행동에 매혹되어 이끌리고 그 순간 상호 인정을 구하는 사랑의 멜로드라마가 시작된다.

 

함께했던 시간

나는 동물원에서 동물의 관점이 되는 것에 실패했다. 단 몇 분 울타리 너머에 있는 침팬지나 고릴라 원숭이의 관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벽이 있어 멀고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했던 나와 동물 관계가 사실은 나의 고정된 관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동물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를 놀래킨 그 침팬지가 생각났다. 그리고 침팬지가 얼마간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침팬지는 그 순간 분명히 나와 함께 있었다.

인간의 문화를 동물의 문화와 분별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풍부한 다양성이다. 문화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시간 자연을 이해하고 배우려 했는지에 대한 지평이다. 하지만 이제 인간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종들의 힘과 지혜를 배울 생각이 없다. 불공정한 도구를 이용해 동물을 사냥하고 가두면서 멀어진 관계가 회복하기 힘들 만큼 벌어졌다. 우리는 이제 동물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관계 맺는 생명이라는 사실도 잊을 만큼 둔해졌다.

오늘 나는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를 읽고 동물원 유인원관을 중심으로 관람했다. 그래서 동물원에서 고릴라, 침팬지, 원숭이의 마음이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바라는지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웠다. 나와 동물들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내가 그들 삶의 자리를 구성하는 관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불가능했다. 오늘 내가 동물원의 울타리라고 생각했던 벽은 내 사고의 장벽이었다. 그 장벽을 서서히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아무것도 보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인류학 답사 일정으로 동물원을 오게 되면서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가 왜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본다. 동물원에서 나를 놀래킨 침팬지는 나를 통해 친구들에게 몇 번 더 이야기될 것이다. 동물원에 다녀온 지 며칠 안 됐지만 벌써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하며 나도 모르게 침팬지가 어떻게 창을 두드렸는지 시연하고 있다. 나와 침팬지 사이에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는 책을 읽고 배웠던 것보다 나의 신체에 훨씬 오래 남아 있을 터였다. 그날의 날씨, 풍경, 시선을 주고받던 존재들, 함께 보고 느꼈던 사람들, 공유했던 감정들이 줄줄이 엮여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우리가 모두 함께한다는 연속성과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자주 오래 보아야 더 잘 알 수 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