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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동물원 기행문] 미술관 옆 동물원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10-28 17:44
조회
198

<동물원 기행문>

2024.10.28. 최수정

 

미술관 옆 동물원

 

 

내가 서울대공원 역에 내리자 곧바로 잘 정돈된 넓은 부지의 공원이 나타났다. 숲과 길이 조화롭게 꾸며진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가 보니 동물원보다 먼저 미술관이 보였다. 미술관 옆 동물이라니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조합이다. 비교적 이른 아침 출근 시간 전 한적한 숲길을 천천히 걸어오면서 동물원이라는데 참 넓고 깨끗하다 생각했었는데,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는 덕분인가? 정돈되고 말끔한 숲에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니, 나처럼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사람들에게 미술관과 동물원을 동시에 관람하도록 하는 배려인가?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여유롭게 천천히 거닐면서 색다른 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일석이조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모처럼 제대로 문화생활을 즐겨보리라 생각했다.

미술관에 들러 전시된 작품을 먼저 보고 나와 동물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동물원에서 유인원관에 들어서며 나는 미술관 옆 동물원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동물원이 미술관처럼 관람 시설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처럼 유인원들이 각 방에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작가가 구상한 작품이 작가의 의도대로 관람순서가 배치되었듯 살아있는 동물이 벽을 따라 나란히 줄지어 유리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동물원을 여러 번 왔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동물원이 달라진 것일까, 내가 달라진 것일까. 나는 여기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

황금 울타리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에서 동물을 의인화하는 일은 우리가 동물을 알기위한 수단으로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과 연속성이 공유하는 특징은 특히 유인원처럼 우리와 가까운 종을 대할 때 좋은 출발점이 된다. 드 발의 관점으로 동물을 보면 동물들도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 동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생태환경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생활양식을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오랫동안 인간과 동물의 연속성을 부인하고 동물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물은 우월한 문화를 가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으로 다루고 남획하며 그들을 사라지게 했다. “공공 동물원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은 일상생활에서 동물이 사라지게 되는 시기였다. 사람들이 동물을 만나고 관찰하고 구경하러 가는 동물원은, 사실 그런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곳이다.”(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펜스, 이한중 옮김, 지호, 25)

동물원의 시작은 인간이 동물을 동물원 밖에서 사라지게 한 사실을 기억하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위험하고 신기한 동물들이 동물원에 모여 내가 관심 가져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곳이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을 구경하면서 우월한 인간으로서의 아이들이 동물을 사랑하고 돌보고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물원 막사를 이동하며 갇힌 호랑이, 사자, 표범 같은 맹수들을 보면서도 그들이 두려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순하게 길들여진 애완견처럼 한 번쯤 쓰다듬고 싶은 존재였다. 원숭이, 침팬지 앞에 서서도 침팬지와 내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원숭이와 침팬지는 그저 인간을 닮았고 인간을 따라 하고 싶은 웃긴 동물이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인간의 손으로 인간 너머 건너편으로 갈 수 없게 쳐둔 울타리가 너무 높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쳐진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골과 높은 황금 울타리를 허물 방법이 있을까?

 

동물행동 풍부화

유인원관 입구에서부터 동물원이 계획한 순서대로 이동하며 동물들을 구경한다. 차례대로 앞사람을 따라 유리에 재현된 책장을 넘기듯 차례차례 그림을 넘긴다. 가로막힌 벽을 통해 보는 나의 눈은 유리벽 너머 맞은편 벽에 가로막혀 되돌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자연물처럼 그럴듯하게 재현된 콘크리트 나무와 돌에서 어떤 생명력도 느낄 수 없다. 인공의 공간에서 살아있는 것은 침팬지 한 마리뿐이다. 유리벽으로 가로막힌 벽 너머로 이쪽의 소리라도 들리면 좋겠다. 침팬지가 앉아 있는 방이 너무 차갑고 적막해 보여 길을 잃은 작은 파리 한 마리라도 그에게 달려들기를 기대하고 싶다.

침팬지는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이불 더미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이불 더미가 동물원의 동물복지 프로그램인 동물행동 풍부화’(‘사회성 풍부화, 인지(놀이)풍부화, 환경 풍부화, 감각 풍부화, 먹이 풍부화등 총 5종류)의 일환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뜬금없었다. 낡은 이불이 어떤 행동 풍부화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동물을 위한 것일까? 이불로 무엇을 할지 궁금해서 참을성 있게 오래 지켜보아도 침팬지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들춰보다 하며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동물원에 갇혀 인간에 의해 행동 풍부화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침팬지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다음 장면은 커다란 고릴라 한 마리가 시선은 멍하니 다른 곳을 보면서 편평한 유리벽에 한없이 얼굴을 부비대고 있는 모습이다. 무기력한 얼굴 전체로 천천히 유리벽을 밀어내듯 차갑고 맨들맨들한 표면을 의미 없이 문지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분명 유리벽 바깥의 생명들은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들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가 보다. 자기 앞에 있는 존재들에게 아무리 자기 몸을 밀착시키려 해도 도무지 닿을 수 없어 모든 것을 체념한 것일까? 고릴라는 나를 보고 있는 눈에 초점을 잃고 모든 것에 무관심한 얼굴로 종이 인형처럼 납작하게 눌린 채 역시 무심한 얼굴일 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물원의 복지 정책에도 불구하고 격리되고, 상호작용할 수 없게 된 침팬지와 고릴라는 전적으로 자신들을 돌보는 관리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데는 변함이 없다. 스스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의 자극을 줄 만한 외부 관계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다. 스스로 호기심을 유발하고 좇아 행동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행동 풍부화복지는 단조롭고 재미없는 생활에 별 변화를 주지 못한 것 같다.

 

인간문화의 빈곤화

인간은 자연의 동물을 모방하고 배우며 자신들의 문화 범주를 넓혀가는 대신 인간의 문화를 위해 동물을 희생시켰다. 자신을 위협하는 동물들을 사냥하고 사슬을 채워 구경거리로 만들며 우월감에 도취했다. 자연의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고리에서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자연의 모든 우연을 차단하고 안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면서, 뜻밖에 출현하는 삶의 경이와 놀라움을 경험할 기회도 포기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연과 단절된 채 인간이라는 그 조건에 갇혔다.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세미나 시간에 달님은 의인화를 통한 감정이입이 이타의 핵심이라고 했다. 감정이입은 그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이 어떨까, 그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이입은 생각만으로 되지 않는다. 감정이입이야말로 함께 한 시간에 비례한다. 오랜 시간 주의 깊은 관찰과 모방을 통해 그가 되는 경험을 하며 그를 이해한다.

동물들이 사는 공간이 넓어지고 사각의 시멘트 방을 벗어나 좀더 넓은 야외 울타리고 나갈 수 있다는 것으로 인간이 동물에게 감정이입을 한 이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동물원의 동물들이 예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 있게 돼서 다행이라며 안심한다. 그러나 나는 이른 아침 동물원 입구에서부터 미술관을 거쳐 동물원에 이르면서 이렇게 넓고 쾌적한 공원이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름드리나무와 철 따라 핀 꽃들로 꾸며진 넓은 숲은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 다니며 자연과 문화를 즐길 나를 위해 조성된 것이었다. 동물들은 그토록 넓고 풍부한 공간을 작게 분할된 비좁은 공간에 갇혀있었다. 나는 유인원관 파충류관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내쉬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도 그토록 답답하게 여겨지는 공간에서 갇힌 동물들의 일상은 울타리 밖 넓은 숲과 거리가 멀었다.

인간의 문화를 동물의 문화와 분별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풍부한 다양성이다. 문화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시간 자연을 이해하고 배우려 했는지에 대한 지평이다. 때문에 인간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종들을 배척한다면 인간의 문화는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를 읽고 동물원 유인원관을 중심으로 관람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고릴라, 침팬지, 원숭이를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감만 느꼈다. 그렇다고 동물원 관람이 무의미했다고 할 수 는 없다. 나는 동물원에서 이전과 다른 것을 봤다. 동물을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을 바라보듯 보던 나를 보았다. 이는 내가 동물원에 와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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