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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

 

[국중박 인디언] 잡초에 대한 단상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4-07-15 22:54
조회
146

국중박 인디언(1)/240716/강평

잡초에 대한 단상

 

문명인들은 마음에 안 드는 식물을/ 잡초라 부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잡초라는 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풀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목적을 갖고 나왔다

쓸모없는 풀은/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회 중 체로키족의 말

 

잡초라는 이름

이자카야를 운영하는 한 후배를 몇 달 전 만났다. 알바들이 손님들에게 매우 불친절해서 매출에 악영향이 있는데도 알바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혼낼 수도 없다고, 자영업자의 극한 상황에 분통을 터뜨렸다. 나도 요즘 MZ세대들이 무성의하느니, 지밖에 모른다느니, 동병상련으로 후배와 MZ와 알바들의 행태를 성토했다. 그러다 며칠 전 한 선배를 만나서 요즘 알바이야기가 나와 그 주제를 안주 삼아 맥주 한잔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나눌 적절하지 않았던 주제라는 걸 놓치고 있었다. 거기에는 얼마 전 군 제대 후 복학한 그 선배의 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요즘 알바를 하는데 물가가 올라서 쓸 돈이 턱없이 부족하고 손님들의 반말이나 무례함으로 힘들다며, 그 알바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려 그 주제를 끝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선배의 아들은 그냥 알바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흘린 땀이었다. 후배 식당에서 일하는 무성의한 알바와 선배의 아들 **이는 전혀 다른 카테고리이다.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에 나오는 인디언은 한마디로 하늘과 땅에 감사한 사람들이다. ‘인디언이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사막부터 북극까지 기후가 다르고 그에 따라 생활양식이 다른 부족들이었다. 이 전시회의 설명에 따르면, 만약 하나의 단어로 그들을 칭한다면 북미 원주민이 맞을 것이라고 한다. 뭉뚱그려진 표현에는 화자의 무지, 무시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인디언과 같은 계열에 알바와 잡초가 있다. 알바는 성별, 나이, 하는 일 등 모두 다양하다. 잡초는 모르는 사람들이 뭉뚱그려서 부르는 풀의 통칭이다.

사실 전시회에서 체로키족의 잡초에 대한 글을 접하고 나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대학 신입생 때 받은 잡초는 없다, 쓸모없는 풀은 없다는 위로 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편지를 준 분이 체로키족의 말을 듣고 했을 가능성은 정황상 거의 없다. 내 기억에 그때 나는 그 편지를 받고 한편으로 격려를 받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잡초는 되고 싶지 않다’, ‘이름 있는 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거의 30년 만에 다시 생각해보는 잡초론은 어떨까? 지금 나는 잡초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에는 하늘과 땅에 감사한 사람들이 나온다. 하늘과 땅에 감사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북미 원주민들은 들소를 잡을 때 고기, , 힘줄, 기름, 가죽 등 버릴 것 없이, 생활의 풍족함을 주는 것에 깊은 감사를 했다고 한다. 생명이었던 들소를 부득이할 경우에 한해 최소한의 양을,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잡고, 최대한으로 감사해했다고 한다. 같은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햇빛,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들소는 단지 자신들에게 도움, 이익이 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생존에 꼭 필요한 생명으로 보았기에 감사함도 있었다.

아마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든 생각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도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앞으로도 계속 생각을 해봐야 하는, 간단하지 않은 무게가 있다. 사실 연결되는 것이 모든 것이라고도 해두고도 머릿속으로는 나에게이익이 되는 것, 익숙한 것, 좋아하는 것이 떠오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은 잘되는 것을 산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정시키는 전제가 있다. 베어져 목재, 그릇, 다리로의 쓰임없이는 생활이 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울창한 숲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다.

여태 나는 감사를 에게 도움주는 것, 그 도움받은 것에 대한 나의 인정정도로 생각했다. ‘모든 것에게 범위가 국한되었다. 이익에 따른 선호로 위계, 중심이 굳건했던 것 같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햇빛, , 공기의 소중함이 눈에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아낌없이 줘서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연결을 그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알아차리게 된 것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잡초를 떠올릴 때도 아주 먼 시간이 걸려 결국은 거름으로 쓰이게 된다든지, 알지 모르지만, 혹은 별로 알고 싶지는 않지만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상호작용할 것이라는 막연한 개념으로만 이해했던 것 같다. 내가 잡초, 알바로 부르는 한, 위계는 떠날 수 없을 것이고, 당연히 모든 것과의 연결은 어려울 것이다.

 

구체적인 노동

이번 전시회에서 체로키부족의 잡초 글귀와 더불어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나바호족의 직물> 제작 비디오였다. 직물을 만드는 것은 한땀한땀 어느 천 년에 완성될까 싶을 정도로 더디고 힘든 과정처럼 보였다. 완성품은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의 뛰어난 예술품이었다. 관객의 입장에서 직물 만드는 작업은 반복적이고 지루한데다 고되고, 게다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손만 분주할 수 없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기까지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비디오는 딴 생각하면 안된다가 아니라 나쁜 생각을 하고 베틀 앞에 앉을 수 없다는 설명을 하고 있었다. 나쁜 생각이란 무엇일까? 만 여기서 이렇게 고생을 하나 원망하는 마음, 얼마나 작업시간이 남았나 생각하면서 한숨이 나오는 목적지향적인 생각이지 않을까?

공장에서 찍어내면 양산 체제로 비슷한 무늬의 직물을 금방이라도 무한 재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나바호족의 직물 만들기를 생산성이 낮은 가내 수공업으로 치부하면, 이 작업은 원시적인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까막눈이 보기에도 그 직물은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구체적인 노동, 집중력,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생각 한 올이 들어가지 않은 정성이 빚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나바호 직물은 수석 디자이너가 입으로 설명하고 저임금의 견습생들이 영혼을 갈아 넣은 직물이 아니다. 잘은 모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을 알바라고 잡초라고 보지는 않을 것 같다. 잡초가 부르는 사람은 잡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이들을 잡초로 부르고 또 그렇게 봐야한다. 그래봐야 그도 그런 생각을 가지는 한 늘 자신이 말하는 잡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잡초라고 부르는 그 생각을 생각해볼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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