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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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기행문] 관찰, 가려진 연결 찾기
인류학을 나눌레오(8)/241126/강평
관찰, 가려진 연결 찾기
동물원 가는 길, 미술관에서
마음만 바쁘다. 동물원은 어릴 때 소풍 이후 처음이다. 박물관은 그래도 몇 번 가봤다고 조금 익숙해진 편이다. 이번에 보게 될 것은 박물관의 고정된 전시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다. 낯선 관찰 대상 탓인지 후기로 뭘 쓸지 벌써 걱정이다. 기대나 설렘보다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 그런데 동물원 관람 전 미술관을 가게 되었다. 세미나지기인 오선민 선생님이 동물원 가는 길에 전시 안내문을 보시고 티켓을 사오셨다. 동물원 볼 시간도 짧은데, 미술관 추가라고? 돌발 상황 발생이다. 그 순간 나에게 미술관은 동물원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런데 나는 동물원 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미술관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실용이라는 단일한 목적에 갇힌 나의 시선’을 보게 되었다.
미술관에서는 ‘연결’을 주제로 대안적 건축 58채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는 의뢰인인 건축주의 가족 구성과 취향을 고려하고 밖의 하늘, 나무, 주위 다른 건물, 이웃과도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전시실 초반 5채쯤 보고 있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저런 건물은 환가성이 없어, 팔 때 건물에 들인 설계비, 건축비는 매몰 비용이라 회수 못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왜 건물을 환가성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만 평가했을까. 그것도 확신에 차서, 5채만 보고, 빠르게 판단했을까. ‘대안적’이라는데, 들어나 보지. 미술관이 애초 목적지였다면 사정은 조금 달라졌을까. 나는 자주 시계를 봤다. ‘관람한 전시물/전체 전시물’을 공정율로 계산했다. 이 속도로 가다가는 공정율 100%에 도달하는 시간은 1시간 반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곳에서 동물원은 답사 후기를 위한 ‘실용’이었고, 미술관 전시물은 ‘그 밖의 것’으로서 나의 시선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문득 나는 일행들의 발걸음을 보게 되었다. 초조하고 바쁜 나의 행동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전시회 작품, 소개 글, 만드는 과정을 담은 스케치 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옆 사람과 조용히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팔짱을 끼고 두리번거리며 전시물에 멀찍이 떨어져 건성으로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시간에 전시물과 만나며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서로 설명하고, 듣고, 나누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만 바쁘고 초조해하며 고립되었다. 그들 역시 나처럼 미술관 가는 길에 어쩌다보니 동물원에 들렀다. 나와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멀뚱히 서 있는 나와 달리 모여서 재미있게 전시물을 보고 있는 그들을 본다. 나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단일한 관심 Vs 다양한 관심
나는 무엇을, 어떻게 볼까. 눈길 가는 것을, 보던 방식으로 본다. 그래서 나는 집을 환가성이라는 기준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환가성 기준이 대세라고 하더라도 건축가와 예술가는 환가성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본다. 그 전시회가 내세운 ‘대안’은 벽돌 틀로 찍어내듯 똑같은 아파트를 찍어내는 현실에 대한 예술적 성찰이다. 집은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 환가성을 아무 때나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의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에서 문화란 “타자로부터 얻는,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개는 구세대로부터 습득하는 지식과 습관을 의미할 뿐이다. 문화는, 같은 종이더라도 집단이 다르면 행동도 달라지는 까닭을 설명해준다”라고 한다. 인간/동물, 문화/본능이라는 이분적 구도의 문제점을 말하며 문화를 재정의한 문장이다. 나는 미술관 사건을 겪으며 이 인용문 중 ‘집단이 다르면 행동도 달라진다’를 나에게 적용해보았다. 나는 같은 인간 종이지만 효율을 따지는 집단에 있기 때문에, 실용에 특화된 행동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원시 부족이 ‘쓸모’란 실용 차원뿐만 아니라 ‘관심’이란 지적 차원에서도 관찰했다고 말한다. 말리노브스키도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서 쿨라 교역이 단순한 실용성이나 이윤의 계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의례라고 했다. 요컨대 원시 부족은 관심이 두루두루 있지만 나는 관심이 실용이라는 단일 기준에 쏠려있는 셈이다.
나는 언제부터, 왜 실용이라는 단일한 기준에 시선이 갇히게 되었을까.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에서 드 발은 생각보다 원숭이로 대변되는 유인원이 문화를 많이 가지고 있고, 반면 인간도 본능적인 면이 많다고 말한다. 세미나를 할 때는 이 의미를 주로 본능에 충실할 것 같은 유인원에게도 생각보다 문화가 많다는 쪽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점점 나는 이 책에서 인간도 본능적인 면이 많다고 한 점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본능이란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눈길이 가면 멈춰서 들여다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다양한 관심이다. 뭐든 궁금해하고 알고 싶은 이 본능은 학교 과정, 문화라는 프레임을 통해 억눌리고 가려지게 된다. 나도 언젠가부터 지적 호기심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여유로운 사람 또는 전문학자들만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 시즌 마음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유인원, 원시 부족, 수렵 채집민, 그리고 어린이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실용/비실용을 구분하지 않고 관심 있는 것을 관찰했다. 다시 말해 실용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계산에 바쁜 것은 인류 역사상 아주 최근의 일이다. 최근이라도 아이는 실용/비실용을 구분하지 않고 분별없이 마음 가는대로 마음이 이끄는대로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관찰은 잊고 있던 본능적 감각을 깨우는 일이다. 계산에 가려져 있던 것, 내가 지금 누구와 살고 있는지를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 수면 위로 올리는 일이다. 그때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이 수면 위로 오르는지는 차치하고, 가리고 있었던 것이 계산된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계산은 어떤 생각과 행동이 효율과 상관 있느냐를 묻는 세계이다. 계산을 조금만 내려 놓으면 싫든 좋든 세상은 온갖 상관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시작은 마음이 이끄는 다양한 관심이다.
더 알 필요가 없다는 관찰
실용은 다양한 관심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실용은 회사원인 나에게 특화된 관심사이다. 물론 실용, 효율, 빠른 판단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내가 만약 회사에 걸려온 상담 전화를 일일이 다 끝까지 듣거나 관심을 둔다면 업무 진행이 어려울 것이다. 나는 원활한 업무를 위해 우선 용건을 빨리 파악한다. 나의 돈, 시간을 들이지 말지 그 용건에 따라 빨리 판단할수록 효율적이다. 일은 주어진 순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우선순위대로 하는 것이니까. 빠른 판단을 하느라 결과적으로 어떤 돈, 기회를 놓쳤더라도 포기하고 간다. 그런 기회까지 얻으려면 업무량이 훨씬 늘어나기 때문에 선택 사항일 뿐이다. 문제는 실용에 대한 관심 자체가 아니라 그 실용 중심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회사에서는 실용에 따른 빠른 판단에 일 잘한다는 평이 돌아온다. 회사 밖은 다르다. 아니, 회사도 자세히 보면 다르지 않다. 회사는 실용이 드리우는 그늘을 자주 은폐할 뿐이다. 실용이라는 단일한 기준이 아니라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다양하게.
미술관에서 전시된 5채를 보고 53채가 남은 상태에서의 빠른 판단은 어떤 이유였을까. 빠른 속도와 함께 빠른 판단도 효율의 주요 요소이다. 회사에서야 매번 다 해보고 있으면 동료들에게 ‘*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는 눈총을 받을 것이다. ‘매번’이라는 말에는 매번이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결과적’으로 같다는 전제가 있다. 시행착오가 없을 수는 없지만 이는 효율 면에서 비용만 드는 일이기 때문에 줄일수록 좋다. 매번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다양한 케이스가 있다. 다양한 케이스를 되도록 그룹으로 묶어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일 중 하나이다. 시행착오는 언제나 비용과 결과적인 측면에서만 최소한으로 용인된다. 이 경험이 쌓이면 ‘나는 다 안다’가 된다. ‘been there, done that’이다. 나는 다 안다는 ‘생각’이 문제이다. 결과라는 하나의 지점에 오는 동안 미처 보지도 못하고 놓쳐 버린 수많은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회사는 목표와 결과가 중요하다. 그래서 결과가 목표에 부합되면 과정은 따지지 않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아무리 회사 일이라도 마음과 감정이 남는다. 목표와 효율에 적당이란 없다. 자주, 대부분 무리를 향한다. 무리한 일은 직접 하기에도 힘들 뿐만 아니라 방관자로서 지켜보기에도 쉽지 않다. 나는 내가 당했던 것만큼 무리하게 하지도 않는데 왜 후배들이 나처럼, 나 때처럼 하지 않는지 답답해 한 적도 있다. ‘나’는 무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목표만 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늘 하는 이야기이다. 되돌아보면 목표를 향해 가는 직선적 사고는 가해자에게는 타인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답답함을, 피해자에게는 억지로 끌려간다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방관자에게는 알면서도 말리지 못했다는 마음의 빚을 남긴다.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는 섬처럼 분리된다.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는 없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도 빠른 판단이 몸에 밴 사람이니 알고도,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경우 모르는 사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가해자는 가해인지 모르고 가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점이 상황을 악화시킨다. 효율만을 앞세우면 관계는 뜯어지고 스스로는 고립된다.
더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단일’ 기준과 연관된다. 이번이나 저번이나,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같다는 생각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특별하고 새로울 것이 없는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 세계는 고립으로 가는 길이다. 효율은 다양한 연결 끈을 효율의 관점으로 단순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감정, 마음은 표면 아래로 묻히게 된다. 실용이라는 단일 기준은 주위의 서로 다른 다양한 것을 보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앞만 보고 달리는 마음이다. 많은 것을 스쳐 지나는 풍경으로 만들고, 그나마도 자신이 늘 보던 방식으로만 보게 된다. 새로울 것이 없는 권태의 종착지가 고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알고 싶은 것이 늘어나는 관찰
권태는 모든 것이 거기서 거기라며 새로울 것이 없이 다 안다는 태도이다. 반면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묘사한 원시 부족 중 피그미족에게 세계는 매일 새롭다. 권태로운 사람에게는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똑같아 보이는 세계가 그들에게는 어떻게 달라보일 수 있을까. 실용에 도달해야 한다는 ‘계산이 없으면’ 생각보다 멀리 갈 수 있다. 피그미족은 엄청난 수의 식물, 조류, 짐승, 곤충의 종류를 식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하나하나의 습관과 행동에 관해 대대로 물려받은 지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주위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연구한다. 또 무슨 식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면 그 열매의 맛을 보고, 잎의 냄새를 맡고, 줄기를 잘라 관찰하고, 즉 오감을 동원해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그 서식 장소에 관해 검토하고 그 식물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언명한다. 또한 직접 쓸모가 없는 식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동식물의 수많은 명칭을 쉽게 열거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도 나뭇조각만으로도 나무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이 부족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대단한 자연학 연구 집단이다.
그들이 식물을 알아가는 과정 역시 교과서 진도처럼 정해진대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를 효율적으로 도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다보니’ 더 알아야 할 것이 생기고, 더 알아보니 동물, 곤충과도 연결이 되는 방식으로 관찰 과정에서 다방면으로 분기한다. 이 부분은 드 발이 동물의 행동을 기대하고 예상한대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과 통한다. 드 발은 동물의 실제 행동으로부터 새로운 관찰과 발상을 이끌어내는 ‘폭넓은 방향 감각’을 말한다. 그는 과학의 위대한 진보는 기대대로 실현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발상이 기대와 ‘어긋날 때’ 생긴다고 한다. 계획은 틀어지고, 기대는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 길에서 계획과 생각은 계속해서 분기한다. 그러니 출발선에서 마지막을 계산할 수 없다. 고정된 사실이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업무상 무관한 지인이 나에게 들기름 한 병을 선물했다. 들기름이야 마트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상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서사를 알게 된 뒤 들기름은 나에게로 와서 의미가 되었다. 깨 농사를 짓던 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평생 사무직에 종사하던 그분이 주말에 지방을 오가며 농사를 마저 지었다고 한다. ‘그 들기름’이 내 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요리를 잘하지 못해서 나물은 못해먹고 양푼 비빔밥을 할 때마다 호사스럽게 들기름을 듬뿍 넣고 있다. 들기름이 이렇게 맛있는 재료였나. 이런 실용 이외에도 들기름 비빔밥을 먹을 때마다 깨 농사를 지으러 오가는 그의 발걸음과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노동과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밭에 내리쬐는 햇볕과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이번 추석 내가 고객들에게 백화점 참기름 세트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참기름에는 내 마음속 계산서도 함께 갔을 것이다. ‘그 들기름’ 한 병으로 실용은 물론 그의 노동, 햇볕, 오가는 길, 백화점 참기름 상품까지 나의 기억과 관심이 확장됐다. 서사를 알면 뭐든 거기서 거기가 아니라 ‘그’ 들기름이란 고유한 의미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계속 꼬리를 무는 관심이 이어진다.
드 발은 동물과 인간 모두 본능적인 면이 많다고 했다. 그때 본능은 그저 타고난 것과는 다르다. 모방을 통한 훈련, 학습의 과정이 필요하다. 거미가 거미줄로 태어났다고 다음 날 거미줄을 칠 수 없다. 인기 스타 푸바오도 엄마 아이바오를 보고 따라하고 넘어져가면서 나무에 오를 수 있게 된다. 학교, 회사에서 고도로 훈련된 실용은 다양한 관심사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강력한 화력이 있다. 그래도 다른 관심사에 눈길이 가는 것은 본능이다. 물론 그 본능만으로 잊고 있던 관심을 바로 알 수 없다. 거미줄을 치고, 나무를 오르는 훈련을 하듯 잊고 있던 본능을 찾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실용이라는 단일한 기준이 몸에 완전히 붙어있다면 본능을 일깨우는 데는 훈련이 좀 필요하다.
나는 이번 ‘관찰’이라는 주제가 흥미로워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흥미, 관심만으로는 글이 되지 않았다. 막상 돌입하니 어디서부터 써야할지 막막했다. 많이 헤맸다. 중간에 내가 왜 날씨도 좋은데, 몇 주씩 앉아서 이러고 있나 답답했다. ‘먹고 사는 일도 아닌데’라면서. 빨리, 효율적으로 쓰고 싶은 마음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헤매는 동안 생각할거리가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그러면서 다양한 질문이 생겼다. 실용에 얽매인 나의 시선을 보게 된 것보다 그 ‘길 잃음 자체’가 주는 소중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헤매는 과정의 고유함에 대해서. 나는 실용이라는 단일한 기준이 ‘환산 가능’, ‘대체 가능’ 사고를 만들고, 이 동일함이야말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무서운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이 ‘대체 가능’의 구체적인 예를 하나하나 따져보고 싶어졌다. 관찰은 다음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은 새로운 관심으로 이끈다. 이렇게 계속 새로운 관찰이 시작된다.
계속 놀아보겠습니다
미술관에서 나는 5채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관람했다. 일행들과의 단체 관람이라 혼자 먼저 동물원에 갈 수도 없었다. 또 티켓을 사오신 오선민 선생님의 성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람을 이어간 이유는 보다보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58채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다른 58채였다. 같은 집은 없었다. 그 전시회의 주제는 ‘연결’이었다. 특히 김광수 작가의 <베이스 캠프 마운틴>이 인상 깊었다. 저예산으로 컨테이너를 주재료로 만들어 북한산 자락 이웃들과 ‘연결’하는 베이스 캠프로 탈바꿈한 사례였다. 그 집의 건축주, 설계자라고 건축비 등 ‘돈’을 떠날 수 있거나, 내가 우려했던 환가성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다만 가치의 무게 중심이 실용에만 집중되지 않았을 뿐이다. 가치의 우선 순위를 돈이라는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매순간 분기하며 확장해서 맺는 관계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 집은 상품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공간’이었다. 아마 나도 들기름 지인의 경우처럼 내가 서사를 알면 다양한 관심으로 분기해서 고유성으로 넘쳐나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관계들이 많을 것이다. 들여다 보면.
관찰은 잊었던 본능적 감각을 깨우는 일이자, 가려졌던 관계를 찾아가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드 발의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에는 세계 최강으로 딱딱한 기름야자 열매 껍질을 깨는 어린 침팬지가 나온다. 이 침팬지는 길게는 3년을 연습해도 깨지를 못하는데도 ‘조금도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계속한다고 한다. 침팬지는 바보인가. 열매 조각 하나도 얻는 것이 없이 말이다. 어미와 흉내 내는 ‘놀이’에 가깝다. 아이들이 지치지도 않고 똑같아 보이는 놀이를 마치 처음 해보는 놀이처럼 신나서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장의 보상이라는 목적이 없어도 순수하게 ‘사회 감정적인 관점’에서의 모방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도 딱딱한 열매 껍질 깨기가 있다. 함께 인류학 책을 읽고, 답사 가고, 답사 후기를 쓰는 일이다. 왜냐고? 나의 시선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기 위해서 혹은 더 나아가 갇힌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니다. 그냥 하다보니 하고 있다. 어린 침팬지처럼 다른 사람들이 3단 콤보를 하는 것을 잘 따라해보는 ‘놀이’ 중이다. 그러다보면 알게 되는 것도 있고, 없어도 상관없다. 보상으로서의 열매 조각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위해서’가 강조되면 계산이 된다. 계산하면 많은 것을 눈앞에 두고도 볼 수 없게 된다. 나는 단지 무리 속으로 들어가 그들 틈에 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