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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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숲 속 방향과 소리
숲 속 방향과 소리
주인공 이치로는 들고양이로부터 엽서를 받고 ‘성가신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실제로 가서 참관한 이 재판의 내용은 이렇다. 빨간 바지를 입은, 삼백 개가 넘는 도토리들이 각자 자신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주장하고, 재판장인 들고양이는 이 많은 주장들 중 옥석을 가려 훌륭한 하나의 가치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들고양이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삼백 개가 넘는 이 도토리들끼리 합의하기를 유도하고 있다.
이때 명예 재판관으로 이치로는 이 분쟁을 해결할 지혜로운 답을 들고양이에게 알려주는데, ‘이 가운데 가장 어리석고 엉망이고 전혀 돼먹지 않는 자가 가장 잘난 것이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이들에게 전해 보라 권한다. 그러자 삼일 내내 시끄러웠던 숲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도토리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가치들은 뾰족한 것, 둥근 것, 큰 것 등이다. 반면 이들이 훌륭하다고 여기지 않는 가치들은 어리석은 것, 엉망인 것, 돼먹지 않은 것, 찌부러진 것 등이다. 인간들은 세상을 늘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그것에 선과 악의 가치들을 덧씌운다. 그리고 그 중 선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에 또다시 서열을 매겨 차례대로 줄 세우려 애쓴다. 서로가 제일 높은 곳에, 제일 먼저 위치하려 목소리를 높이며 분쟁을 만든다. 자신이 더 옳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쉬지 않고 증명하려 한다.
그런데 모든 분쟁의 시작인 선악의 기준, 이분법의 가치가 ‘본래’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치로가 들고양이를 찾아 길을 나서는 길에 만났던 숲속 존재들을 떠올려보자. 이치로는 숲속에서 밤나무, 폭포, 버섯들을 만나 들고양이가 간 방향을 불어본다. 이들이 현재를 판단하고 말할 때의 특이점은 ‘의성어’와 ‘방향’이었다.
길마다 표지판이 있고 랜드마크가 우뚝 선 도시와 달리, 사방이 울창한 나무, 풀과 바위로 둘러싸인 숲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기 쉽다. 동, 서, 남, 북으로 파악하는 공간 방향감은 사실 어디에서도 이 네 가지 방향, 그 자체로 규정되지 않고, 방향을 파악해야 하는 자의 위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확인된다. 동쪽에 서 있는 자에게 자신이 마주한 방향은 서쪽이고 오른쪽은 북쪽이고 왼쪽은 남쪽이다. 반면 남쪽에 서 있는 자라면 마주한 방향은 북쪽이고 오른쪽은 동쪽이며 왼쪽은 서쪽이 될 것이다. 해서 방향을 관측하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따져보지 않고, 맥락 없이 방향을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타인과의 거리는 얼마큼인지 등을 면밀히 살펴야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이치로가 숲속에 들어서자 밤나무는 동쪽을 말하고, 폭포는 서쪽을 말하고, 버섯과 다람쥐는 남쪽을 말한다. 방향만 본다면 모두가 다른 답을 말한다. 이때 서로 각자가 옳다고 한다면 도토리의 재판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들이 서 있는 위치가 어디였느냐를 파악한다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오답은 아닐 것이다. 방향을 지시하는 ‘단어’, 동, 서, 남, 북에 얽매여 그것을 절대화시킨다면, 또 그중에서 구성원 모두에게 통일된 하나의 가치를 선별하려 한다면 사회는 늘 시끄럽고 성가신 상태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다.
숲속에서 만난 밤나무는 ‘투둑투둑’ 열매를 떨어뜨리고, 폭포는 ‘삐–삐-’ 소리를 내고, 버섯은 ‘꿍따다꿍따다’ 연주하며 다람쥐는 ‘휙’하고 날아간다. 이 같은 의성어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해석과 상상의 공간을 마련한다. 서로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화자의 뜻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더 섬세하게 듣고, 여유를 두고 생각하게 한다. 청자에게 내 뜻이 전달되기 위해 글자를 더 신중히 고르고, 목소리의 크기와 속도를 신중하게 결정하며 조정한다. 이때 이들의 목표가 정해진 오직 하나의 정답을 찾기 위함에 있지 않다.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를 향해 가는 그 길에, 그 열린 시공간 속에 서로가 들어가는 것, 해서 화자를 통해 청자에게 단어,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생성되고, 청자를 통해 화자가 자신이 말한 바 그 이상을 더 상상하게 하는 것에 이 의성어 대화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숲속에서 만난 밤나무, 폭포, 버섯과 다람쥐는 이치로가 스님의 설교에서 들었다는 불교적 가치를 이미 실현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어리석고 엉망이고 전혀 돼먹지 않는 자가 가장 잘난 것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그토록 ‘옳다’고 박제한 가치들에 한방을 날린다. 어리석고, 엉망인 것이 절망 훌륭한 것이라고 전제할 때, 그때도 너희들은 내가 가장 훌륭하다고 큰 소리로 주장할 거야?라고 되물으며, 훌륭하다는 것이 뭔지,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는 뾰족한 것, 둥근 것, 큰 것이 정말 뭔지, 그것의 옳고 좋음이 뭔지, 과연 그것이 그토록 절대적인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누구나 자신이 잘나기를 바라고 잘못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잘났다는 기준이 어리석고, 엉망이고, 돼먹지 않았다는 것이라면 잘나기를 포기한다. 이들 분쟁에 가담한 도토리들은 어쩌면 정작 그 하나의 옳은 가치가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그 가치 뒤에 숨어있는, ‘내가 옳다’는 아상이 이 분쟁의 진짜 주인공이 아닐까. 아상은 특정 고정 값으로 세상을 묶어둔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이라는 말이 달 자체가 될 수 없으며, 달을 가리키는 손이 그것을 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지금 여기 사태의 진실은 보지 못한 채 말과 그에 담긴 제한적 가치를 절대화, 이분화하고 나아가 순위대로 나열하는 등, 그 껍데기에 매달려 분쟁을 일삼는다. 미야자와 겐지는 이 소설을 통해 이 같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마치 거울을 보듯, 인간 스스로 확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