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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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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

작성자
유나
작성일
2024-12-01 19:16
조회
53

미야자와 겐지/2024.12.01/손유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

 

세상은 혼탁하다. 흑과 백, 참과 거짓, 허와 실이 함께 섞여 모호한 빛깔을 띠고, 우리는 이 탁한 세상에서 진실과 가치를 분별하는 눈을 길러야 한다. 깨달음의 순간은 기쁨보다는 고통을 동반하여 선물처럼 우리를 찾아온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에서 등장하는 이기리스의 해안은 우리가 사는 세상처럼 사물의 경계가 허물어져 혼탁하게 섞이는 곳이다. 강줄기는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산악지대를 가로질러 해안가로 보이는 곳에 다다르고, 사루가이시 강과 기타카미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약간 하류에 위치했다. 주인공은 이 기타카미 강의 상류에서 살다 여름방학의 농장실습 기간에 강 하류에 있는 이기리스의 해안에 방문한다. 이렇듯 이 해안에서는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 서로 섞인다.

동시에 이기리스의 해안에서는 사물의 식별이 불분명해진다. 강의 지형은 해안을 닮았고, 물결이 크게 일면 파도치는 듯 보여 바다처럼 느껴진다. 강변에 드러난 푸르스름한 응회질 이암은 햇빛 속에서 새하얗게 보여 감각적으로 체험되는 것과 사물의 본질이 다르다. 게다가 이기리스의 해안은 1백만 년 전 먼 시간 속에서는 짠물이 파도치던 바다였고, 현재도 조개껍질 화석과 같은 바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강가를 해안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느 시점에서는 타당하다. 진실이라 여긴 사실이 세월이 흘러 다시 보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듯이 기다 아니다를 절대적으로 적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이 강을 배경으로 서술되는 일화도 보통의 생각과 척척 들어맞지 않는다. 말을 탄 군인들이 강을 건너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시시하게도 군인들은 오지 않았다. 쇠지렛대를 들고 바위를 찔러보는 남자는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하얀 화산재층에 크기 5척이나 되는 무언가의 발자국이 발견되고, 풀 베는 낫으로 돌을 베려는 학생들이 등장하는 등 석연치 않은 일투성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농업학교의 교사로 여름방학을 맞아 이기리스의 해안에서 수영하며 여름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도 학교 업무를 처리하고, 누에를 치고, 농사를 지으며 현실을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이다. 아이들의 질문에 척척 대답할 정도로 지식도 많다. 하지만 만약 수영하는 아이들이 물에 빠지면 함께 빠져 죽겠다는 경솔하고 무책임한 생각으로 정작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주인공은 쇠지렛대로 바위를 쿡쿡 찔러보던, 자신이 모자란다고 평가했던 남자와 대화하면서 정말 어리석었던 사람은 자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남자는 구조요원으로 위험한 여울에서 노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자신의 담당구역을 벗어난 곳에까지 일부러 찾아왔고, 쇠막대로 바위를 찔러보던 행동은 바위가 구조에 사용할 부표의 추로 삼을 수 있을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 내막을 모른 채 주인공과 학생들은 이 남자를 바보 같고, 이상하고 꺼림칙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대화를 하며 이 남자의 속 깊음을 깨달은 주인공은 자신이 보고 판단하는 것과 본질이 다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깨달음의 순간은 매우 부끄럽고 고통스럽다. 주인공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 맨몸으로 하얀 바위 위에 서서 태양의 하얀 햇살에 야단을 맞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자신의 경솔함을 뼈아프게 책망한다. 나는 이 고통스러운 깨달음의 순간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의도해서 얻을 수 있는 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려 깊은 남자와의 만남은 우연히 찾아온 선물이고, 주인공은 선물이 동반하고 있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여, 모호함 속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분별력을 얻었다.

주인공에게는 앞으로 보리타작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보리타작은 까끄라기가 몸속으로 들어와 따끔따끔하는 괴로운 작업으로, 어떤 사람은 농사일 중에 가장 하기 싫은 여름의 병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보리타작을 하기 싫은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되며 어떻게든 즐겁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결실은 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보이는 것과 본질은 다를 수 있으니 여러 측면을 두루 살피는 현명함을 갖춰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이기리스 해안이, 해안처럼 보이지만 해안이 아니라는 사실처럼, 하지만 사실은 먼 과거에는 해안이었으니 어떤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수상쩍은 사람이 사실은 속 깊은 사람이었다는 진실처럼 말이다. 그리고 분별력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니 고통 뒤에 숨겨진 커다란 가치를 깨달을 필요성도 함께 일러준다.

     

    영국 도버해협 백악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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