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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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이중구속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이중구속
2024.12.1. 최수정
소설의 내용 전개는 생각보다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했다.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언하는 영혜는 아버지의 폭력과 함께 연상되는 개고기 이미지가 싫어 육식을 거부할만했고,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인혜의 일상도 이해 못할 것이 없었다. 영혜의 삶이나 인혜의 삶 모두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이웃 이야기였다.
영혜의 아버지처럼 사랑한다면서 때리는 사람이나, 남편처럼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그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옭아메는 이중구속으로 상대방의 말의 이면을 믿을 수 없게 입을 닫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말의 이면을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동성에 처하면서 정신분열증과 같은 증상을 겪는다. 이중구속을 받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말이 진짜 말인가를 알지 못하며 질문할 수도 없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같은 일이라도 누구는 좀더 아파하고 누구는 좀더 견딘다. 영혜의 말수 없음은 말의 혼란, 말의 무용함의 표시하는 몸짓이다. 아버지의 폭력을 뼛속까지 받아들인 영혜는 자기 몸을 파괴하고, 인혜의 성실함은 스스로 비겁함이라 표현하는 생존방식이 되었다.
순수한 식물성의 허위
자기 말을 방향을 잃은 영혜는 자기 생각을 몸으로 말하려고 한다. 육식의 거부를 채식으로 행동하며 자기 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도 영혜의 말에 관심이 없다. 걱정해주는 척 끝없이 고기를 먹으라는 똑같은 말만 돌아온다. 영혜에게는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고 입을 벌려 우격다짐으로 고기를 입에 밀어 넣는 그들이 자신을 먹어치우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고기가 되어 먹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고기를 더욱 거부하게 만들었다.
<채식주의자>는 제목에서부터 순수성과 죄 없음의 코드가 떠오른다. 식물도 생명인 것은 잠시 잊고 채식주의자를 육식에서 결백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먹고 먹히는 세계에서 완전히 결백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가 갖는 순수 이미지가 은폐하는 또 다른 배제가 있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가 주는 푸릇푸릇함 속에 숨겨진 이면이 있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은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이중구속 관계를 보여준다. 나를 위해서라며 먹기 싫어하는 것을 먹으라고 강요하고, 내가 나를 위해서 참기 싫다고 하면 참으라고 한다. 영혜는 그들의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작가는 이런 낯익고 익숙한 풍경을 나무가 되고 싶은 채식주의자의 식물성으로 말하고 있다. 식물성의 이미지가 너무 명확해서 아무것도 의심하지 못하는 나의 습관적 사고의 문제를 보게 한다.
순수한 식물성의 이미지인 나무도 타인을 먹으며 생존한다. 수많은 사체와 곰팡이가 뒤섞인 유기질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인간의 폭력이 싫어 인간보다 순수한 나무가 되고 싶은 영예는 어린 조카들 앞에서 자해를 하는 순간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이 세계에 온전히 무구한 존재는 없다. 작가가 영혜를 채식주의자로 설정하는 이유는 그 채식의 이면이 말의 이면을 만드는 이중구속과 같기 때문이다. 육식과 대비되는 채식 이미지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에 위계를 나누고 있다. 동물과 식물 모두 똑같은 생명인데 어떤 것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할 수 없는데, 폭력을 거부한다면서 또 다른 폭력의 구도를 만들고 있다.
어떤 단어가 지향하는 의미에는 그것이 은폐하는 풍경이 있다. <채식주의자> 영혜는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에 발을 몸을 내맡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는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육식 본능을 발견했다. 그녀의 꿈이 암시하는 것처럼 영혜는 물컹한 고기와 피 맛을 즐기는 육식주의자였다. 영혜는 어린 조카들 앞에서 자신의 육식적 폭력을 노출 시키자마자 감춰둔 이빨을 드러내 눈부신 햇빛 아래서 살아있는 동박새를 물어뜯었다.
이미지의 장막
그(영혜의 형부)는 다섯 살 난 아들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을 보며 처제인 영혜의 몸에 남아 있을 몽고반점을 상상한다. 그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이미지를 열망한다. 그는 ‘현실의 이미지를 견딜 수 없다.’ 삶이 넌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영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내면에는 어떤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그것과 일상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하고 있었다. 어떤 격렬함이 그녀 안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영혜는 고기만 안 먹으면 꿈에 보이던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얼굴은 그녀의 ‘뱃속 얼굴’이었다. 호시탐탐 그녀를 먹어 삼키려고 하는 그녀 안의 얼굴이었다.
영혜는 꽃이 되고 싶었다. 자신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의 식물성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온몸을 꽃으로 칠한다고 인간의 몸이 식물이 되지는 않지만, 자신이 식물이 됐다고 믿으며 잠시 안심했다. 그러나 비디오 작가인 형부가 그려진 꽃의 이미지 너머에 있는 그녀의 육체는 그녀를 더욱 정신분열 하게 한다. 영혜는 인혜에게 다시 가해자가 되었다. 자신의 피부 장막에 그려진 꽃으로 가려진 그의 육체가 인혜에게 폭력이 됐다.
<몽고반점>은 환상에 의해 조직된 편향적 이미지, 식물성의 허위를 온몸에 그린 영혜를 통해 보여준 이미지로 감추고 싶은 이미지를 드러낸다.
생명의 마주침, 차가운 불꽃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영혜는 육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나무가 되는 상상으로 물구나무서기 하며 말과 생각도 할 필요가 없는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말과 생각이 통하지 않은 세상에서 기껏 자기 몸을 해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영혜의 언니 인혜도 나무를 찾아간다. 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에 자기 몸을 매달기 위해서다. 인혜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본 나무가 전한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다. 얼음처럼 금이 가는 가슴을 안고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뜻한 온기를 담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차가운 한기로 타오르는 말이다. 인혜가 들은 생명의 말은 서늘한 푸른 빛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녀가 다가오지 못하게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인혜가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아이가 있는 곳이었다. 돌볼 사람이 있는 인혜는 삶으로 돌아왔다. 언니 인혜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 인혜에게 모성애를 느끼고 돌봤다. 남편을 돌보고 싶은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타인을 돌보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것이 되면서 영혜는 자신을 나무의 식물성에 매달지 않을 수 있었다. 차가운 죄의식이 남아 있는 자신의 피가 아직 타인을 온전히 안아줄 수 없지만 희미한 생명의 불꽃을 다시 되살린다.
자기 자궁 안에 ‘혀’처럼 매달린 폴립을 떼고 영혜는 자신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고통도 치욕도 견디며 언제까지나 살아가는 길 밖에 그것말고는 어떤 다른 길이 없었다. 입안의 혀가 뽑힌 것처럼 어떤 말도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끝없이 속으로 자신에게 물을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