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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인류학을 나눌레오] 암각화, 자기 변형으로서의 기도

작성자
조재영
작성일
2024-07-09 02:19
조회
156

암각화, 자기 변형으로서의 기도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울산 반구대 답사 길에 올랐다. 출발에 앞서 기도 한지가 언제였는지 또 무엇을 기도했었는지 생각해 봤다. 나의 기도는 대부분 내가 소원하는 것이 있을 때였다. 꼭 이루고 싶은 게 있을 때, 무형이든 유형이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 때이다. 나뿐이랴, 인간에게 기도란 바라는 무언가가 있을 때 그런데 그것이 나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불가능해 보일 때 나 자신 너머 더 큰 힘을 끌어와 그 성취에 보태려는 시도이다.

소소하게는 이런 것들이다. 지난 6월이 생일이었다. 마침 비슷한 날짜에 생일인 동료가 있어 가까운 지인들끼리 모여 함께 생일 축하 자리를 가졌다. 케이크 위에 초를 켜 두고 동료들이 소원을 빌라 한다. 나는 가족의 건강을 비롯해서 크고 넓은 작업실을 갖게 해달라는 요청 등, 그 짧은 순간에도 서너 가지 소원을 꾸역꾸역 담아 마음속으로 빌었다. 각자 기도 내용이야 비밀에 부쳐 서로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 둘에게 통일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기도할 때가 되자 바꾸는 몸의 자세였다.

생일인 동료와 나는 둘 다 마흔이 넘은 이 나이에도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곧바로 두 손을 모아 양팔을 테이블 위에 올린 다음 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인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전형적인 기도 자세를 곧바로 잡는다. 돌이켜 보면 이 같은 기도 자세는 생일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가서도 절에 가서도, 작은 차이는 있지만 눈을 감고 내 몸을 낮추는 모습은 같다. 각자 다른 국가, 다른 사회에서 다른 인종, 다른 종교를 가지고 살면서도 인간이라면 기도할 때 취하게 되는 공통의 모습들이 있는 듯하다.

기도할 때 만들어지는 이 같은 몸의 모양새는 기도하는 그 일시적 시간이나마 나를 현실로부터 분리시키고 다른 시공간의 세계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내 능력 너머 다른 힘을 빌릴 때 현실의 시공간과 거리를 현실 너머 다른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그 시공간에서 나보다 더 큰 힘과 접속하려는, 내 소원이 그 힘에 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울산에 도착하여 만난 7000년 신석기 인류도 그랬다. 자신의 몸을 다르게 바꾸어 현실 너머 다른 시공간 속으로 자신을 이동시킨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와 다른 점이 보인다. 몸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눈을 감은 채 기도하는 우리와 달리 신체를 더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두 눈을 선명하게 뜨고, 온몸을 사용하여 암벽에 고래를 새김으로써 말이다. 현대의 우리가 비교적 큰 미동 없이, 정적으로 한자리를 지키고 고요히 마음속으로 바람을 말한다면, 이들은 두 다리를 굳건히 세우고 팔을 움직이고 두 손에 힘을 가해 역동적으로 기도한다.

현대인들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 변형부터 온몸을 사용하여 특정 이미지를 암벽에 새기는 행위까지, 인류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기도를 하려면 먼저 너의 몸부터 바꾸라고 말하고 있다. 기도하는 인간에게 신체 변형이 왜 중요한 것인지 궁금하다.

 

고래잡이 어부, 예술가가 되다

울산 반구대 대곡리 암각화는 태화강 상류의 지류 하천인 반구천의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너비 약 8m, 높이 약 4.5m 크기로 중심 바위 면이 있고 그 양쪽 주변 약 10여 곳에 걸쳐 여러 그림이 새겨져 있다. 고래, 거북 등과 같은 바다 동물과 사슴, 멧돼지 등의 육지 동물을 함께 볼 수 있으며, 배를 타고 작살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모습이나 춤을 추는 샤먼 등 인간의 모습도 담고 있다.

특히 약 50 가지 고래 이미지가 암벽 좌측에 촘촘히 새겨진 모습이 눈에 띈다. 뾰족한 도구로 찍어내듯 선을 지속적으로 그어 가며 귀신고래, 범고래, 북방긴수염고래, 흑동고래, 향고래 등 그 종류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수면 위를 튀어 오르는 고래, 수면 밖에서 수증기를 뿜는 고래, 새끼와 함께 유영하는 고래 등 바다에 사는 고래 모습들이 당시 울산 신석기인들에 의해 다채롭게 표현되어있 다. 석기, 돌망치, 뿔망치 등을 이용해 단단한 암벽을 쪼는가하면 지속적으로 갈거나 그어 암벽 위에 선과 면을 만들어갔다. 낮에 바다에서 고래를 잡던 신석기 어부들은 해가 저물어 이곳 암벽 앞에 설 때면 그렇게 예술가가 되었다.

이 어부 예술가들의 작품을 조금 더 감상해 보자. 돌 표면을 깎아 이미지를 새기는 방식은 한 면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부조 조각 같기도 하고, 평면 위에 선이나 형태를 그려가는 드로잉처럼 보이기도, 또 판화를 찍기 위한 석재 판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 예술 작품에는 엄청난 양의 노동과 긴 인고의 시간을 전제한다. 종이나 천위에 펜이나 물감으로 쓱쓱 선을 긋거나 면을 칠하는 드로잉 작업과 달리 한 덩어리의 돌에서 그 일부를 덜어내야 하는 작업은 벽에 형태를 새기는 동안 팔, 다리, 어깨, 손 등, 신체 어느 부분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암각화는 신체 전체에 엄청난 힘이 들어가는 육체적 수고를 동반한다.

또 암벽 표면에 고래 이미지가 새겨진 위치를 봤을 때 경우에 따라 지면에 발을 딛고 새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사다리 등 높은 곳에 팔이 닿을 수 있는 보조 도구가 있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안전한 지면 위에 두 발이 닿는 것과 아슬아슬한 나무 사다리 위에 서 있을 때의 신체가 감수해야 할 위험은 크다. 떨어질까 불안하기도 하고, 서 있는 동안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가면서 장시간 그곳에 있다 보면 몸을 지탱하는 두 다리의 힘도 점점 약해진다. 돌 표면을 조각하기 위해 한 손에는 새기개 또 다른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있을 것이므로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양손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만약 사다리가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매끈한 암벽조차도 잡아볼 새도 없이 곧바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또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달리, 동굴 실내가 아니라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말 그대로 사방이 뚫린 야외다. 추위와 더위, 비와 바람에 몸이 그대로 노출된다. 예술 하기 어려운 이 같은 척박한 조건 속에서 신체적으로 고된 작업을 하게 한 인류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이들은 단지 어부에 머물지 않고 고래 이미지를 돌에 새기는 예술가로 만든 것일까?

 

기도로서의 암각(巖刻)’ 행위

돌에 그리는 것, 아니 새기는 것은 다르다. 온몸을 써서 견고한 돌덩이 파거나 쪼거나 쳐서 그 일부를 덜어내는 동안 예술가는 낮에 봤던 고래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음미하게 된다. 오랜 시간과 고된 육체적 행위는 돌과 고래와 내 신체가 서로에게 엮어 들어가는 시간이다. 이 예술가들이 온 신체를 써서 딱딱하고 견고한 암벽 위에 고래 이미지를 새김으로써 서서히 고래가 되어 간다. 말 그대로 내가 고래가 되고, 고래가 내가 되는 순간이다. 이들의 암각(巖刻)’하는 예술적 행위와 그 과정은 그렇게 고래와 접신되는, 의례 그 자체가 된다. 울산 반구대 신석기 인류는 이 의례를 통해 고래 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암벽 위 고래를 새기던 어부 예술가는 이제 샤먼이 된다.

그런데 이들의 샤먼의 기도는 내가 평소 하는 기도와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예컨대 수십 년 전 88올림픽이 시작되던 해, ‘호돌이 인형을 갖게 해 주세요라는 나의 크리스마스 기도는 나를 변화 혹은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또한 내가 호돌이 인형이 되지도, 호돌이 인형이 내가 되지도 않는다. 기도 후에도 나는 기도 전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다만 내 손에 전에 없던 게 쥐어지길 바랄 뿐이다. ‘라는 존재는 그대로 유지한 채,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기도이다.

고래를 갖게 해 달라와 고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물론 현대의 우리 기도에도 되기의 기도는 많다. 좋은 엄마가 되게 해달라거나 훌륭한 선생님이 되게 해달라거나, ‘되기기도의 핵심은 그 기도를 통해 나 자신을 얼마나 비워낼 수 있는가, 자기가 비워진 자리에 자신이 되고자 하는 그 존재 혹은 힘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기도는 자신의 자아, 에고를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가 쉽다. 이전의 나를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모습이 더해진다. 내 모습은 그대로인데 더해진 것들이 불어나면서 그 크기만 켜져 버리는, 자아 비대에 이른다. 이때의 되기기도는 소유를 향한 소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울산 구석기 인류의 기도는 고래로 탈바꿈되는, 존재론적 변이 과정이다. 고래가 되려는 이들의 되기의 기도에는 기도 이전 자기 자신에 대한 적극적 포기를 전제한다. 자신이 비워진 그 자리에 고래를 들임으로써 고래가 되려는 기도가 성사된다.

 

기도에 신체 변용은 필수

그렇다면 자기 내려놓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오늘 내가 나를 내려놓겠다고 결심하고 의지 낸다고 그 즉시 자기 비우기가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라는 존재가 따로 있지 않음을, ‘가 개별자로 살아갈 수 없음을, 내가 자연 전체 생명의 그물망에서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때 비로소 주체화된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 가능하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의 저서 곰에서 왕으로에서 북아메리카 고원지대 톰슨 인디언의 야생 염소 신화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비워내고 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버지와 일곱 아들로 구성된 사냥꾼 일행은 야생 염소를 잡기 위해 산으로 간다. 그중 막내아들은 여자 야생 염소에 이끌러 이들 무리가 있는 동굴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여자 염소가 건네 준 숫염소 털가죽을 입자, 즉시 숫염소가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야생 염소 무리들과 생활하며 모든 암염소들과 관계를 가진다. 이제 암염소는 모두 자신의 아내들이며, 그녀들에게서 태어난 모든 새끼 염소들은 자신의 자식이 된다. 나는 인간인 동시에 염소가 되고, 내가 낳은 새끼 염소도 내 자식으로서 곧 인간이다. 그리고 내 자식은 나와 분리될 수 없다. 그렇게 인간은 염소와 친족이 된다. 한 가족, 부족을 이루며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유일하게 사냥할 수 있는 숫염소는 사실상 자신의 처남으로 생존을 위해 죽이지만 자신의 친척이라는 관계성을 놓치지 않으며, 필요한 만큼만 잡고 살갗을 해체하고 남은 뼈를 땅속에 가지런히 묻는 의식을 치른다.

 

훌륭한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는 활이나 총 쏘는 솜씨가 좋은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솜씨라는 것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인디언에게 있어 훌륭한 사냥꾼은 일종의 윤리문제에 대한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 자기 자신도 동물이 되어 동물사회의 풍습이나 생활을 체험하고, 나아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동물도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디언 사상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물은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인간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인간 역시 동물로의 변신이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곰에서 왕으로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53)

 

이 신화는 인간과 염소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단지 표면적으로 확인되는 겉모습이 다를 뿐이다. 더구나 그 겉모습도 절대적이지 않다. 산속을 돌아다니던 염소도 자신의 동굴로 들어가 밖에서 걸쳤던 털 가죽하나 벗으면 금세 인간이 되고, 반대로 사냥하기 위해 산속에 들어간 사냥꾼 인간이 염소 동굴에 함께 들어가 그들의 털옷을 걸치면 곧바로 염소가 된다. 털가죽을 입거나 벗거나에 따라 서로의 모습으로 재빨리 변화한다. 톰슨 인디언들에게 염소와 인간의 사이의 경계는 털가죽 한 장으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유연하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같은 이치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훌륭한 사냥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해서 훌륭한 사냥꾼의 덕목은 동물을 잡는 기술이 아니라, 산속에서 만나는 동물이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알고 인간인 그 동물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 즉 어떤 윤리를 고민하며 만들어 가느냐에 있다. 그리고 앞서 확인했듯, 이 윤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앞서 염소 털가죽으로 상징되는 사냥꾼의 신체적 변형은 필수임을 부각시킨다. 톰슨 인디언의 염소 신화는 염소의 생활 풍습, 염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염소 털가죽을 입어 염소의 몸으로 변형 될 때에, 해서 변형된 몸으로 그 무리 속에 들어갈 때 시작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구체적 신체, 총체적 인간

톰슨 인디언 신화에 등장하는 사냥꾼의 윤리 문제 역시 염소가 되려는 소원의 과정으로, 울산 신석기 인들의 기도로서의 암각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인간은 기도, 의례와 의식을 통해 왜 반드시 자신의 신체를 고래로 혹은 염소로 만들어 내야만 하는가? 마음의 다짐과 결심, 바램만으로 이들과 접신될 수는 없는가?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는 같아’, ‘우리는 하나야’, ‘우리는 친족이야라고 말로만 해서는 소용없다는 것을 인류가 가르쳐 주는 셈이다. 실제로, 철저하게 내 몸이 염소, ‘고래가 되는 신체 변형의 과정을 거칠 때에만 우리의 기도가 통한다고 말하는 것.

인간과 동물이 심층에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영혼이라 할 때 표면적으로 드러난 다른 신체는 이 영혼에 접속하는, 혹은 그 영혼을 드러내는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을 갖는다. 톰슨 인디언 신화를 통해 확인했듯이 다른 부족의 사회에 들어가 그 풍습과 문화를 익히며 그 일원이 되려면 그 부족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 방식이나 형식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과 형식은 신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즐겁고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있어 인간이라면 이를 드러내 환히 웃거나 손을 마주쳐 소리를 낼 것이다. 개가 꼬리를 사정없이 흔드는 반면, 고양이는 꼬리를 바싹 세운다고 한다.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부족 내부에서 작동하는 신체 사용법을 모른다면 인간도 동물도,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걷기에 관한 해부학적 생리학적 이론처럼 기계적이고 물리적이기만 한 고찰이나, 반대로 심리학적 혹은 사회학적일 뿐이기만 한 고찰 대신 [생리학과 심리학, 사회학으로 이루어진] 삼중의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달리기와 수영 등 모든 사실에 관한 명료한 관점을 가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삼중의 관점, 총체적 인간의 관점입니다.(몸 테크닉마르셀 모스, 파이돈, 81)

 

마르셀 모스는 그의 저서 몸 테크닉에서 몸이야말로 인간 최초의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이자 인간 최초의 가장 자연스러운 테크닉 대상이자 수단’(87)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방법, 몸의 테크닉에 자연스러운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들 신체 사용법은 철저히 사회 관습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몸 테크닉은 단지 물질적인 신체 그 자체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신체와 연결된 심리적, 사회적 차원에서 총체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다. 특정 방식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변형할 수 있는 인간은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적으로 즉 총체적으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사회 내 신체 각각의 움직임은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와 가치, 그 자체가 된다. 인간과 동물은 서로의 신체 사용법을 익혀감으로써 상대의 사회, 문화를 배워간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가치관, 세상을 바라보들 그들만의 관점들까지도. 인류는 우리에게 말한다. 고래가 되고 싶은가? 고래의 관점을 갖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고래의 신체부터 갖추라고.

같은 내포(內包)라도 그것과 접속하는 신체적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각양각색의 신체 테크닉은 우리 의식 심층에서 우리가 하나라는 것, 연결되어 있고 다르지 않다는 것을 더욱 선명히 드러낸다. 인간과 동물은 상호 간 다른 동물, 다른 인간, 다른 몸을 넘나들면서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특정 존재가 따로 있지 않음을, ‘인간이 다른 동, 식물로 구성된 생명의 그물망에서 개별자로, 주체자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내가 고래가 되고, 염소가 되었다가, 새가 된다면. 내가 세상을 바로 보는 관점도 점차 다양해질 것이다. 이런 것이 곧 신의 관점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한계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오직 인간이라는 하나의 관점 속에서 살아간다면 신은 세계 내 모든 존재들의 모든 관점을 다 갖춘 자가 아닐까. 울산 반구대 암각화 신석기인들은 고래를 암벽에 새김으로서 고래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도는 고래 되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멧돼지를 새기고, 호랑이를 새기고, 사슴을 새겼다. 그렇게 기도, 의례로서 암각 행위를 통해 고래와의 접신뿐만 아니라 이 모든 동물이 되기를, 해서 신과 같이 모든 존재들의 관점들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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