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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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진실의 증거
진실의 증거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바라우미초등학교」에 나오는 ‘나’는 증거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믿지 않는다. 바라우미 들판에 해당화가 자란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증거를 찾아 나선 그는 해당화는 발견하지 못했고 우연히 여우초등학교를 발견한다. 여우초등학교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확실하게 봤으므로 이제 거짓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에게도 여우초등학교는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본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한 것, 즉 자신은 ‘정직’하니까 믿어도 된다, 믿으면 소문은 진실이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정직이 증거인 셈이다. 이것은 그가 학생에게 진실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인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진실의 검증은 교사가 하니까 학생은 맹목적으로 교사를 믿으면 된다는 것일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 진실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학교는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규칙을 지키며 학생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는 곳임은 여우세계나 인간세계나 똑같다. 여우의 학교에도 지구본, 닭 표본, 덫 표본, 총 모형 등 물리적 교육 자료들을 진열해두고 진실의 증거로 삼는다. ‘나’가 발견한 화산탄도 여우초등학교의 교장이 기증해달라고 부탁하여 두고 온다. 하지만 여우가 진실로 여기는 것과 인간이 진실로 여기는 것은 서로 다르다. 여우초등학교에서는 수신 과목 수업 중에 ‘정직’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자기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정직 즉 거짓 없음이 최고의 태도라는 것이다. 그 예로 ‘가장 좋은 덫’은 덫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덫이라고 한다. 속이지 않는 정직한 덫. 누굴 속이지 않는다는 뜻일까? 인간의 입장에서라면 여우가 속아서 잘 잡히는 것이 좋은 덫일 것이고 여우 입장에서라면 잘 알아보고 잘 피할 수 있는 덫이 좋은 덫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좋은’이라는 말도 실은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에게 좋은 것, 혹은 모두에게 진실 같은 것은 있을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에게 ‘좋은, 유리한, 편리한’ 덫을 여우에게도 좋은 덫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바라우미초등학교」에서는 인간과 여우가 대칭된다. 인간에게 찔레나무로 둘러싸인 담장은 진로를 방해하는 울타리일 뿐이지만 여우에게는 훌륭한 학교이고 집이고 자연이다. 인간의 학교는 당연하지만 여우의 학교는 당연하지 않다. 인간에게 여우는 덫을 놓아 없애야 할 대상이지만 여우에게 인간은 언제든 올 수 있는 손님, 즉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다. 인간은 덫으로 여우를 잡으려 하지만 여우는 인간이 덫에 걸려 넘어질까 봐 덫을 놓는 것을 금지한다. 인간에게 수렵이 임업을 위해 여우를 없애는 방법이라면 여우에게 수렵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다. 수업 참관을 하면서 점차 ‘나’는 기울어져 있는 비대칭성을 느끼고 혼란에 빠진다. 증거가 확실한,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흔들린다.
이 동화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얼마나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이 가꾸어 놓은 공간 안에서 인간의 기준으로 만든 진실인 것이다. ‘나’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들판’을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여우초등학교를 만나고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그런 여행을 하면 무척 피곤하고 특히 계산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계산은 인간의 규칙을 따라야만 얻을 수 있는 진실인 것이다. 해당화를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없다고 말할 수 없듯 우리가 여우초등학교를 보지 못했으니까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여우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우, 사냥 대상으로 보는 여우 말고 여우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여우를 생각하면 여우와 인간이 자연에서 동등한 존재로 살고 있다는 대칭적 사고를 하게 된다. 인간적 계산도 못하고, 대칭적 사고를 통해 복잡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간 ‘나’는 학교에서 어떤 정직을, 어떤 진실을 가르치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