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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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말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말
2024.12.9. 최수정
소설의 내용 전개는 생각보다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했다.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언하는 영혜는 아버지의 폭력과 함께 연상되는 개고기 이미지가 싫어 육식을 거부할만했고,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인혜의 일상도 이해 못 할 것이 없었다. 영혜의 삶이나 인혜의 삶 모두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이웃 이야기였다.
영혜의 아버지처럼 사랑한다면서 때리는 사람이나, 남편처럼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그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말이 주는 혼란은 듣는 사람을 이중구속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자신에게 부모의 사랑을 의심한다는 죄책감을 심어주고, 부모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질문할 수도 항의할 수도 없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랑한다, 이해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말의 이면을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동성에 처한다.
같은 일이라도 누구는 좀더 아파하고 누구는 좀더 견딘다. 내가 『채식주의자』를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로 읽은 것처럼 불합리함을 느끼지 못하거나, 달리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애써 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혜처럼 정신의 분열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두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자기 방식을 선택한다. 영혜의 말수 없음은 말을 해봤자 소용없고, 어디에 말의 진실이 있는지 알 수 없는 혼란, 말의 무용함의 표시였다. 반면 인혜의 사근사근한 말솜씨는 그녀 자신의 표현대로 이해심 많은 성실함으로 위장한 비겁한 생존방식일 수도 있다.
순수한 식물성의 허위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은 먹는 모티브를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음식을 가려서 먹는 일로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 자의 고통을 다룬다. 자기의 말이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방향을 잃은 주인공 영혜는 자기 생각을 몸으로 말하려고 한다. 육식의 거부를 채식으로 행동하며 자기 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도 영혜의 말에 관심이 없다. 모든 가족들이 걱정해주는 척 끝없이 고기를 먹으라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영혜에게는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고 입을 벌려 우격다짐으로 고기를 입에 밀어 넣는 그들이 자신을 먹어치우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 고기가 되어 먹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고기를 더욱 거부하게 만들고, 말을 하지 않게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제목에서부터 순수성과 죄 없음의 코드가 떠오르게 한다. 식물도 생명인 것은 잠시 잊고 채식주의자를 육식에서 결백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먹고 먹히는 세계에서 완전히 결백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가 갖는 순수 이미지가 은폐하는 또 다른 배제가 있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가 주는 푸릇푸릇함 속에 숨겨진 이면은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된다는 선별적 배제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은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이중구속 관계를 보여준다. 나를 위해서라며 먹기 싫어하는 것을 먹으라고 강요하고, 내가 나를 위해서 참기 싫다고 하면 참으라고 한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면서 어떤 말도 듣지 않는다. 영혜는 그들의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작가는 이런 낯익고 익숙한 풍경을 나무가 되고 싶은 채식주의자의 식물성으로 말하고 있다.
이 세계에 온전히 무구한 존재는 없다. 작가가 영혜를 채식주의자로 설정하는 이유는 그 채식의 이면이 말의 이면을 만드는 이중구속과 같기 때문이다. 육식과 대비되는 채식 이미지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에 위계를 나누고 있다. 동물과 식물 모두 똑같은 생명인데 어떤 것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할 수 없는데, 폭력을 거부한다면서 또 다른 폭력의 구도를 만들고 있다.
어떤 단어가 지향하는 의미에는 그것이 은폐하는 풍경이 있다. 『채식주의자』 영혜는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육식 본능을 은폐하고 있다. 그녀의 꿈이 암시하는 것처럼 영혜는 물컹한 고기와 피 맛을 즐기는 육식주의자였다. 영혜는 어린 조카들 앞에서 자신의 육식적 폭력을 노출 시키자마자 감춰둔 이빨을 드러내 눈부신 햇빛 아래서 살아있는 동박새를 물어뜯었다.
이미지의 장막
그(영혜의 형부)는 다섯 살 난 아들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을 보며 처제인 영혜의 몸에 남아 있을 몽고반점을 상상한다. 그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이미지를 열망한다. 그는 ‘현실의 이미지를 견딜 수 없다.’ 삶이 넌더리 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영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내면에는 어떤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그것과 일상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어떤 격렬함이 그녀 안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영혜는 고기만 안 먹으면 꿈에 보이던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얼굴은 그녀의 ‘뱃속 얼굴’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속으로 삼켜지며, 그 말이 소화되지 못하고 뱃속에 남아 호시탐탐 그녀를 먹어 삼키려고 하는 그녀 내면의 얼굴이었다.
영혜는 꽃이 되고 싶었다. 자신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의 식물성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온몸을 꽃으로 칠한다고 인간의 몸이 식물이 되지는 않지만, 자신이 식물이 됐다고 믿으며 잠시 안심했다. 그러나 비디오 작가인 형부가 그려진 꽃의 이미지 너머에 있는 그녀의 육체는 그녀를 더욱 정신분열로 밀어붙인다. 영혜는 인혜에게 다시 가해자가 되었다. 자신의 피부 장막에 그려진 꽃의 육체가 인혜에게 폭력이 됐다.
영혜의 몽고반점을 자신의 혀로 옮기고 싶다던 형부는 몽고반점이 옮겨진 자신의 혀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푸른 꽃, 푸른 멍이 새겨진 혀로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었을까? 식물을 탐하는 그의 모습은 ‘욕조 속에 옷을 입은 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인혜의 자궁에 붙어 있던 혀 모양의 폴립과도 오버랩된다. 그는 안락한 인혜의 자궁과 같은 욕조 안에서만 말을 할 수 있다. 그 원초적인고 순수한 공간에서만 편안하게 말을 하고 싶다.
<몽고반점>은 환상에 의해 조직된 편향적 이미지, 식물성의 허위를 온몸에 그린 영혜를 통해 보여준 이미지로 감추고 싶은 이미지를 드러낸다. 말하고 싶은 것을 혀 대신 이미지로 말하고 싶었던 영혜와 형부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무위의 이미지 안에서 공허하게 서로를 붙잡고 허우적거린다.
생명의 푸른 불꽃
온몸에 꽃을 그리고도 살아갈 길을 찾지 못한 영혜는 육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인간으로 돌아갈 길이 완전히 차단된 그녀는 말과 생각도 할 필요가 없는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인간이 서 있는 것과는 거꾸로 서 있는 것 같은 나무야말로 그녀가 되고 싶은 것이다. 말과 생각이 통하지 않은 세상에서 차라리 말과 생각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 소리와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을 강요받으며 고통받고 싶지 않다.
인혜가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아이가 있는 곳이었다. 돌볼 사람이 있는 인혜는 삶으로 돌아왔다. 언니 인혜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 인혜에게 모성애를 느끼고 돌봤다. 남편을 돌보고 싶은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자궁은 ‘혀’처럼 매달린 폴립에 의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혀는 남편의 ‘혀’였다. 남편은 그녀의 자궁 안에서 자리잡고 앉아 안식을 취하며 자기를 대신해 모든 말을 하는 영예의 말을 받아먹었다. 그 혀로 인해 영혜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빨아들였다.
자기 자궁 안에 ‘혀’처럼 매달린 폴립을 떼고 영혜는 자신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기생하는 혀를 뽑아낸 상처를 메울 길이 없어 나무를 찾아간다. 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에 자기 몸을 매달기 위해서다. 하지만 인혜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본 나무가 전한 메시지는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다. 얼음처럼 금이 가는 가슴을 안고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뜻한 온기를 담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차가운 한기로 타오르는 말이다. 인혜가 들은 생명의 말은 서늘한 푸른 빛이다. 푸른 빛이야말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이 세상 무엇보다 강한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나무가 받아줄 목숨은 어디에도 없다. 생명의 나무는 죽음을 품은 그녀가 다가오지 못하게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의 자궁에 들러붙어 피를 흘리게 하던 남편의 혀가 떨어져 나가고, 나무의 불꽃이 짐승처럼 몸을 일으켜 그녀를 돌려보내고, 그녀의 자궁에서 나온 아이가 그녀를 웃게 하고 살게 하는 말을 한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말을 하려고 한다. 무언가에 항의하려는 듯 나무들을 쏘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