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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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팽팽한 시간 속에서
팽팽한 시간 속에서
시간은 흐르지만, 기억은 시간을 뒤로 잡아당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먹는다’라는 행위를 통해 앞뒤로 팽팽하게 움직이는 시간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주인공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며 시작되고, 3부에 가서는 먹는 행위 자체를 완전히 거부한다. 영혜는 이제 동물이 아닌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영혜의 언니 인혜는 영혜를 먹게 하기 위해 숲속에 있는 정신 병원에 방문한다. 인혜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인혜는 영혜가 어린 시절 좋아한 복숭아와 수박을 내놓으며 먹어보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이 모든 걸 거부하는 영혜를 보며 ‘죽고 싶냐’라며 분노하기도 한다. 급박한 순간순간 인혜는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앞뒤로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인혜의 마음에서 질문이 시작되었다.
퇴화하는 영혜의 몸
영혜는 기존 관습과 문화에 저항한다. 냉장고에 있는 모든 고기를 꺼내 채식을 하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남편의 회사 부부동반 모임과 가족 모임에 참석한다. 이런 저항은 반복되는 꿈 때문에 시작되었다. 꿈속에서는 고깃덩어리, 피 웅덩이 같은 빨갛고 무서운 이미지가 반복되었다. 이런 꿈을 꿨던 이유는 영혜가 어렸을 적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영혜의 다리를 문 개를 폭력적으로 죽였고, 동네 아저씨들이 모두 모여 이 고기를 함께 먹었다. 영혜는 개의 두 눈을 기억하며 이 고기를 먹었다. 하지만 당시 영혜는 “아무렇지도 않더군”(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63쪽)이라는 말처럼 무감각했다.
시간이 흘러 아무렇지 않은 일이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영혜는 육식을 통해 폭력의 가해자임을 깨닫는다.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같은 책, 72쪽)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관습에 저항했지만, 이제 먹지 않음으로써 생명의 시간에 저항한다. 그녀의 몸은 삼십 킬로그램도 안 나갔고, 생리도 멎었다. 영혜는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같은 책, 220쪽)이었다. 그녀의 몸은 점점 퇴화해 갔다. 병원 복도에서 그녀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고, 인혜에게 나무들이 팔을 뻗고 서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자신은 동물이 아니고, 나무로서 물과 햇빛만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에 중 단 몇 분에 불과하다. 어린아이로 퇴화한 몸처럼, 그녀의 세상은 점점 축소된다.
진화하는 영혜의 세계
인혜는 30분 안에 영혜를 설득시켜 뭐라도 먹이거나, 또는 튜브로 미음을 주입해 영혜를 살려야 했다.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영혜와는 다르게 인혜에게 밥벌이, 육아, 돌봄 등등 주어진 일이 아주 많다. 그러므로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고 정신없이 살아갔다. 인혜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갔지만,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건 인혜는 시간에 끌려다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저항하는 영혜는 인혜의 시간을 뒤로 감는다. 영혜의 어린 시절, 결혼의 순간, 아이와의 대화를 되돌려본다. 퇴화된 영혜의 몸 앞에서 인혜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막을 수 없었을까.’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이해할 수 없다고 덮어두었던 남편의 예술, 영혜의 두려움, 아이의 성장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영혜는 나무를 순수하다고 믿었지만, 인혜는 나무에서 서늘함과 잔인함을 본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있을 뿐이었다.” (같은 책, 248쪽) 나무는 바로 영혜가 거부한 짐승이기도 했다. 영혜는 나무를 이미지적으로 바라보면서 오직 물과 햇빛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땅에는 엄청나게 많은 미생물, 곤충, 동물의 목숨들이 깔려있고, 그것들은 썩어 거름이 된다. 나무는 뿌리로 그 목숨들을 흡수시킨다. 인혜가 보았던 것처럼 자연의 순환에 따라 나무 또한 거대한 짐승이다.
인혜의 시간에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바로 성장하는 성장하는 지우의 시간이다. 영혜가 응급실로 가기 직전 인혜는 옆집 여자에게 지우를 맡겨야 하는 전화를 걸어야 했다. 인혜는 동생 영혜와 아이 지우 모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영혜를 살려야 했고, 지우를 키워야 했다. 그러려면 인혜는 돈을 벌고, 아이를 맡기고, 밥을 먹으며 앞으로 가야만 한다. 앞으로 가기 위해서 이해될 수 없는 많은 사람과 사건에 직면해야 했다. 영혜를 통해 인혜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 모두 폭력의 사슬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 폭력의 사슬에서 아이를 키워야 한다. 인혜는 나무들을 항의하듯 쏘아보았고, 저항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화장품을 팔고, 지우를 돌보며, 영혜의 면회를 다녀올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인혜는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그녀는 가슴속에 질문을 품었다. 저항하는 시간에 맞서, 무너질 수 없는 일상을 부여잡고, 그녀의 세계는 더욱 자라날 것이다.
시간의 운동성
우리에게 영혜와 같이 질문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는지 떠올려보자. 그 사람은 나를 어떤 시간으로 되돌려 놓는가? 한강 작가는 노벨상 강연에서 “답을 찾기보다 질문을 완성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했다. 우리는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기도 하고, 때론 무료하고 느슨한 일상을 보내기도 한다. 질문은 우리의 시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2024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롬에서는 노벨상 행사가 진행 중이고,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개인적 시간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국가적 시간도 앞뒤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다. 환희와 좌절 사이에서, 폭력과 예술 사이에서, 일상과 정치 사이에서 분명한 건 시간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