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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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형식으로 만들어가는 일체감
형식으로 만들어가는 일체감
2024.9.9. 최수정
나는 ‘형식’이라는 것을 싫어했다.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겉으로 보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 형식이란 어쩐지 빈약한 마음을 부풀리고 애써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쓰이는 화려한 포장지처럼 느껴졌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심지어 결혼식의 형식들이 크게 의미가 없었다. 때가 되었으니, 누구나 저절로 입학하고 졸업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 외에 내가 어떤 의미를 더 생각해 볼 수 있었을까.
인문공간세종이라는 공동체에서 몇 년 동안 공부하면서도 이와 같은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도서관 수업에서 처음 만난 오선민 선생님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면 강의가 어렵게 되자 온라인 카페를 개설해 강의하신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카페에 가입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인문공간세종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같이 공부하는 스텝이 되달라고 하셔서 그냥 그러겠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저절로 스텝이 되었던 그때만 해도 그것이 어떤 지위나 역할을 맡는 일이 아니었고, 그냥 가볍게 함께 공부하는 사이라는 의미였다. 그때만 해도 나와 오선민 선생님은 사적 관계였다. 그 후 계속 인문공간세종 가입자 늘고 세미나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졌지만, 불어난 일은 정기적으로 세종에 모이는 선생님들 중심으로 결정되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며 감사하기만 해도 됐다. 점점 일이 많아지며 한발 떨어져 있던 나에게도 역할이 생기고 자리가 배당되었지만 나에게 공부공동체라는 것은 내가 공부할 상황이 안되거나 그럴 마음이 사라지면 언제든 내 의지대로 그만둘 수 있는 곳이었고, 그럴 때 어떤 특별한 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가볍게 스텝이 된 것처럼 그것을 내려놓을 때도 딱 그만큼의 무게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조용히 스텝이 모여있는 온라인 대화방을 나갔다. 내가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공부인데, 내가 잘 살지 못하게 됐을 때 공부는 뒷전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갑자기 들이닥친 내 삶의 위기에 당혹해하며 그 난관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이지 않은가. 원래 아무 의례적 형식 없이 들어왔던 그 자리를 인사 없이 조용히 나간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부담감도 없었다. 그 공간, 사람들, 모든 것을 잊고 난데없이 벌어진 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온 힘을 쏟아붓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에게 차츰 변화가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그곳에 돌아갈 수 없을까 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난처한 이 상황이 해결되면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길이 끊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나와 되돌아본 그 자리는 더이상 나와 오선민 선생님이 사적으로 맺었던 그 자리가 아니었음이 보였다. 인문공간세종이라는 공동체는 이미 오선민 선생님 혼자 만들고 지키고 앉아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 안에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들도 나와 사적으로 친밀해서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모이는 순간 친밀감과 유대감이 만들어졌던 것이지 처음부터 저절로 어느 누구 한 사람이 나와 친한 사이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문공간세종을 사적 관계라 생각하고 아무런 형식 없이 나왔지만 다시 돌아가려니 공적 형식이 필요했다. 그저 ‘나 왔어!’라고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무작정 몸을 들이밀 수 는 없었다. 지금까지 모든 형식을 무시하며 살아온 나에게 그것은 좀 당황스러웠다. 나올 때는 맘대로였을지 모르지만 들어갈 때는 맘대로 할 수 없었다. 그곳은 어느 누가 대표로 앉아 있는 곳이 아니었고 모두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곳이었다. 내가 다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모두의 동의를 얻는 어떤 특별한 형식이 필요했다.
형식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내가 이제는 그 형식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수많은 형식에 둘러싸여 있다. 도대체 왜 거추장스럽고 번잡하게 느껴지지만 딱히 어떤 인과적 효용 같은 것도 없어 보이는 형식들을 만들고 따르며 사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인문공간세종의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통과의례 형식에 참여하게 된 김에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형식이 왜 필요할까
‘범고래 체력장’은 일명 통과의례다. 명목은 내가 돌아갈 길을 만드는 형식이었지만, 이를 통해 인문공간세종은 다른 공동체와 다른 의미와 목적을 만들려고 했다. 나의 개별적 통과의례인 동시에 공동체적 통과의례로서 어떤 성장과 변화를 상징했다.
그런데 통과의례라는 형식을 치른다고 해서 그 이전과 확실히 구분되는 효과가 있을까? 예를 들어 결혼식을 치른다고 해서 결혼식을 치르지 않고 사는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는 보장이 있는 것일까? 졸업식에 참석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더 좋은 직장과 나은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잘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결혼식 없이, 졸업식 없이 더 행복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통과의례를 치르기 전과 치른 후의 변화를 실질적으로 느낄 수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치르는 의례에는 원래 특정 행위와 의도된 최종 목표 사이에 명백한 인과적 연관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의례의 수행 자체가 목표가 아닐까. 그것을 수행하는 형식 외에 아무런 목표가 없기 때문에 의례의 절차나 행동, 의도, 결과가 무의미하게 여겨지거나 심지어 우습게 보이는 별 것 아닌 것들로 여겨지는 경우가 아닐까. 엄숙하다기보다 코믹하고 가치 없어 보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시간과 노력의 낭비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과관계가 확실하지도 않고 무의미한 형식들을 인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해 왔을까. 여러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아주 먼 고대인들에게도 장례의례와 축제의례, 여러 통과의례가 있었다. 이것들은 누구도 그 기원을 알 수도 없고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래왔던 것이니까 지금도 하고 있다.
의례 형식은 왜 필요할까. 형식이란 일단 형식의 수행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형식을 만들 때 형식의 일차적 수행자는 일단 형식 만들기에서 배제된다. 내가 나를 위한 형식을 만들어 자의로 그것을 통과할 수가 없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나를 위한 형식을 만든다. 이미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그들의 재결합을 위한 형식을 고심한다. 이것이야말로 겉으로 보기에 별 것 아닌 것 같은 형식의 가장 큰 의미다. 나는 나라는 개인보다 높은 층위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준 형식의 문을 통과해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문을 만든다. 체력장이라는 형식을 통해 내가 돌아올 통로를 만들어 내가 돌아올 길을 돕는다.
범고래 체력장의 통과 목표는 의외로 너무 쉽다. 너무 쉽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형식 뒤에는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합치고 길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와 그들 모두에게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만들어 서로를 수용하는 공동의 기억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형식과 관련해서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다. 내가 통과해야 하는 형식은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형식을 따르며 나는 그들의 정체성과 융합하고 그들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통과의례의 형식, 범고래 체력장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숨을 쉰다. 그러나 이토록 당연한 생각을 깊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인문공간세종> 범고래 체력장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숨을 헉헉 대며 ‘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답답한 가슴을 빨리 비우기 위해 맹렬하게 새로운 공기를 빨아들이고 내쉬면서 현기증을 느낄 때, 머리 속에서 무언가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명은 모두 하나의 폐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호흡을 해야 살 수 있는 생명은 모두 누군가 내뱉은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내가 들이마신 숨은 내가 그토록 증오하는 사람의 숨일 수 있고, 혐오스럽고 징그럽다 생각하는 파충류의 숨일 수도 있다. 내가 그들이 싫다고 해서 그들이 내뱉은 숨을 들이마시지 않을 수 없다.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된다. 그 속에서는 무엇과도 어떤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2024년 6월 18일 화요일, 새벽 5시 40분에 부천팀 4명은 진진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세종으로 출발했다. 이유는 단지 함께 걷고 달리기 위해서였다. 함께 보조를 맞추며 그들의 숨을 바로 곁에서 느끼고 그들이 내뱉은 끈끈한 숨을 받아 내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약속된 장소에서 8시 40분에 모두 함께 출발! <인문공간세종>이 있는 건물 1층에서 시작해서, 세종 호수 공원 4Km를 돌아 50분 안에 돌아와야 한다. 별로 어려운 미션이 아닌 것 같지만, 기온은 빠르게 오르고 햇빛은 더욱 하얗고 눈부시게 타오른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된다. 이것을 위해 모두 함께 모였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할 정도로 흥분되고 고양감이 올라온다. 모두 어느 정도 들떠있고 왁자지껄 적당한 소란과 함께 가벼운 결기가 느껴진다. 각자의 들뜬 감정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넘나들며 서로를 격앙시킨다.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것이 누구나 가볍게 도달할 수 있는 형식일 수 있지만, 이 형식을 통과하는 데 나에게는 누구보다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지금 숨 쉬는 일을 잊고 사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형식을 멈췄을 때,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파장을 가져오는지 깨닫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형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함께’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함께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이 있었던가. 마치 숨 한 번으로 모든 관계를 들이마시듯 단 하나의 형식에 얼마나 많은 절차와 관계가 얽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문공간세종>의 스텝 모두가 함께 모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스텝이 아니다. 나와 옥현샘은 이 형식을 통해 새로운 스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흰 바탕에 검은 범고래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이 티셔츠야말로 정말 <인문공간세종>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준다. 동화인류학팀은 얼마 전 ‘타카하다 이사오 전’이 열렸던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다녀왔다. 전시 관람 수 그날 미술관 카페에서 달님과 이기헌 선생님, 나와 남연아 선생님이 웃고 떠들며 즉흥적으로 티셔츠를 제작해보자. 스티커를 그려 다리미로 다려 붙여서 범고래 티셔츠를 만들어 보자고 농담 삼아 했던 이야기가 이렇게 현실이 되어 우리가 모두 함께 입고 있다. 말의 실행력! 발화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실재성이 이런 것일까. 내용이 형식을 갖출 때 드러나는 현실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인문세>의 저력이다. 말을 하면 현실이 된다. 현실을 창조하는 사람들~
인문세 회원 정혜숙 선생님이 직접 디자인하고, 이기헌 선생님이 바로 제작 주문하신 검은 범고래가 그려진 흰 셔츠를 입고 햇빛 속으로 유영하듯 나아간다. 각오는 단단하다. 오늘 이 체력장 형식의 의례를 통과해야 말의 힘을 지닌 이들과 계속할 수 있다. 올라가는 기온에 따라 곁에 있는 사람들의 후끈후끈한 열기도 강해진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고, 숨을 섞으며 하나됨을 느낀다. 지금 여기 있는 선생님들과 4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공부하고 글을 썼다. 개인적인 문제로 잠시 이들을 떠났을 때 어떠했던가. 나는 어둡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들은 가시풀로 뜨개질한 스웨터를 입혀서 새로 변신한 오빠들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길을 만들어 준 동화 속 여동생처럼 나에게 범고래 티셔츠라는 옷을 입혀주었다. 나를 위해 뜨개질로 통로를 만들어 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떠맡아야 하는 것은 내가 왜 이 길을 달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멀리서 다시 돌아올 <인문공간세종>을 떠올릴 때 나는 달님을 떠올렸던가? 아니다. <인문세>라는 공간에서 각자 자기 재능이 되는대로 혹은 안되더라도 그냥 한번 해보면서 모든 일에 즉흥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언제나 새로운 형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는 그들이 훅훅 내뿜는 활기의 숨이 그리웠다.
오늘 <인문공간세종>의 범고래 체력장은 나를 위한 체력장이다. <인문세> 선생님들의 숨을 나누는 이 입문식을 통해 새로운 마음으로 스텝의 리듬을 맞추는 중이다. 주인이 따로 없는 이 리듬에 섞여 들어가기 위해 발맞추어 호흡을 따라가는 이 의식을 꼭 통과하고 싶다.
누군가는 묻는다. <인문세> 스텝을 하면 뭐가 좋아요? 무거운 책무만 있는 것 같은데 꼭 그것을 하고 싶나요? 가볍게 스텝 밖에서 공부만 해도 되지 않나요?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말씀. 스텝 밖에서 몇 달 있어 본 제가 잘 압니다. <인문세> 스텝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말을 하면 모든 것이 현실이 되는 그 현실성이 얼마나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지! 그동안 <인문세>에서 공부하시던 최옥현 선생님은 근거리에서 이를 알아보셨다. 그래서 그녀도 오늘 스텝에 도전! 꼭 함께 통과해서 새로운 스텝 동기가 되어 보아요.
나는 범고래 체력장, 나의 입문식을 통과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인문세>라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이 공간은 때에 따라, 문제에 따라, 스텝들이 스스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 갈 때 눈앞에 드러난다. 이곳은 모두가 함께할 때만 드러나는 장소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현실적 공간이다.
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공동체
범고래 체력장은 인문공간세종을 아는 많은 사람들을 함께 뛰게 했다. 인문세가 만든 무심한 형식을 모두 함께 놀이처럼 가지고 놀면서 그것들을 모두의 입문식으로 변화시켰다. 범고래 체력장이 뭐라고 이것을 통해 새로운 질서와 상징이 떠오르며 선명해졌다. 체력장 하나로 새로운 구심점이 생겨가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 멀어지기도 하고 다가오기도 하면서 재결합되는 것 같은 묘한 일체감이 있었다. 인문공간세종이 연결된 공동체 전체가 이 통과의례에 참여하고 있다. 그 열기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상의 습관에서 약간 벗어난 놀이와 같은 형식이 참여자를 열광하게 하고 그들의 모든 감각을 깨우는 것 같다. 이것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을 굉장한 뭔가로 순식간에 탈바꿈시켰다. 그들은 모두 인문세의 축제에 초대된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범고래 티셔츠를 입고 함께 뛰었다. 그들로 인해 갑자기 인문공간세종의 공동체적 범위가 확 넓혀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나도 뛸까 말까 하다가 남들이 하나둘 뛰는 모습을 보면서 나만 아직 가만히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강제도 아닌 것이 반강제가 되어 함께 노는 재미에 푹 빠져드는 모습이 갈수록 놀라웠다.
미국, 일본, 스웨덴에서, 서울에서, 부천에서, 저 멀리 남도 땅 장흥에서,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또는 맨발로, 돌 지난 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어른까지 미션에 성공하거나 실패했지만, 자기만의 통과의례에 참여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위치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범고래 체력장과 티셔츠의 상징성들이 끝없이 관계들을 변경하고 변환시키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작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오늘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의미가 되어 생생하게 회상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공동의 기억으로 하나됨을 느꼈다.
의미가 형성된 기억으로 연결된 존재를 개별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라는 것이 가능할까. 범고래 체력장을 통과하며 나는 나를 있게 한 것은 나의 내부가 아니라 나 바깥의 외부라는 생각을 했다. 나와 마주친 수많은 관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겉치레라고 생각했던 형식들은 나를 위해, 나를 그들의 세계에 들이고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된 의례였다. 억지 형식으로라도 다시 한번 자기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보며 실체 없는 실체를 생각해 본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나 바깥의 관계들을 떠오른다.
형식을 수행하며 만들어지는 일체감
인류학이란 정해진 것이 없는 공부다. 마땅히 배우고 따라야 할 절대적 개념 같은 것이 있다기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보는 공부다. 그것은 마치 범고래 체력장처럼 어떤 가벼운 통과의례 문턱을 넘는 일과 같다. 그 문턱에 서서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이 일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 된다. 제도화된 공부, 장치, 형식을 걷어내고 정해진 것이 따로 없는 새로운 형식, 약속된 질서나 형식이 없는 형식을 만들어간다.
범고래 체력장은 함께 인류학을 공부하며 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어떤 유사성을 공유하는 형식을 만들었다. 우리만의 언어와 리듬에 맞추는 의례가 고양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참가자가 개인적으로 커진 느낌을 공유했다.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은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결속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례의 와중에 생기는 이런 정서적 일치와 유대감 같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범고래 체력장을 통해 나는 의례의 기능이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더 친밀하고 더 역동적인 관계로 이끄는 것임을 발견했다. 마치 어떤 것과 공명하며 자기를 잊고 자기보다 더 큰 존재와 결속되어 하나가 된다. 어느 누가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순간 공동체에 받아들여졌음을 느낀다. 정서와 행동을 구성원과 공유함으로써 ‘나’와 ‘우리’의 경계가 흐려진다.
의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이미 필연적으로 그것을 따르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혼자서는 별 의미 없고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함께하는 사람들과 하나의 리듬을 만들면서 많은 난관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인생의 주요 순간을 성취하고 성장했다는 느낌은 언제나 어디선가 그들이 나와 함께 뛰고 있다는 감각을 갖게 만든다.
인문공간세종 범고래 체력장을 통해 나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고,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나를 넘어서고 싶었다. 나의 문턱을 넘어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다른 무엇과 연합하고 싶었다. 함께 의미를 만드는 형식을 기획하고 길을 만들어 준 나 바깥의 사람들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형식을 공유한 경험은 이제 나의 기억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기억이자 동시에 공동체적 기억이다. 기억을 공유한 나와 인문공간세종은 새로운 일체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난관을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다. 그것이 형식이 갖는 기능이었고 가치였다. 또한 그것은 내가 경험한 범고래 체력장이 만들어낸 의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