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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인류학을 나눌레오]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능력자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09-16 23:59
조회
57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능력자

 

2024.9.16. 최수정

 

주제문: 내가 우리

글의 취지와 의의: 삶에 직접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기쁨을 나누자

 

우리가 만든 인문세

돌이켜보면 인문세라는 것이 있기 전에 우리는 모여서 공부하고 있었다. 공부하는 우리가 모여서 나중에 인문세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선생님으로 만난 오선민 선생님이 도서관 밖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을 때 좋은 마음으로 그러겠다고 했다. 같이 공부하면 내가 몰랐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실 것 같았다. 선생님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을 많이 알고 열심히 배워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 같은 내 삶에 지혜를 얻고 도움을 받아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가 좀 달라진다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는 생각을 했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나의 삶에 도움이 될 사람으로 선생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하지만 그 가르침과 도움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얼마 전 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우리가 만들었던 인문세를 나왔다. 그 안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를 또 찾아 나섰다. 유명한 의사를 알아보고 시설 좋은 병원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에 직면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아무도 죽음 앞에서 누군가를 살릴 수 없음을 실감했다. 그것은 무능력자의 절대고독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에 처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죽음 앞에선 당사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삶이었다.

도움받을 곳이 아무데도 없다고 느끼던 그 극한의 지점에서 나는 삶이란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삶이란 백척간두의 죽음 앞에 선 것처럼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 내가 고립됐다고 느끼던 그때 우리가 만들었던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곳은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내가 그렇게 좋아했을까. 그곳이 이곳과 어떻게 다르길래 나는 그곳에 있는 것이 즐거웠을까. 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오선민 선생님은 내가 언제나 무언가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면 모르는데요?, ‘저는 모릅니다로 일관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 알면서, 왜 더 가르쳐주지 않으세요’ ‘선생님이시면서 누군가 물을 때는 더 알려주셔야지요.’ 라며 투덜거렸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처럼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고, 계속 질문만 던지시는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왜 기쁘고 좋았을까.

그 이유를 인문세 밖에서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해 뒤처진 공부를 따라가기 위해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알게 됐다. 친구들의 과제를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들과 리듬을 맞추지 못하는지에 보면서, 어떻게든 그들과 공부 리듬을 맞춰보려고 노력했다. 무기력하게 혼자만 뒤처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견딜 수 없었다. 병원 진료로 세미나를 놓치면 친구에게 녹음을 부탁하고, 어려운 내용은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면서 친구들의 호흡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면서 혼자 공부하는 양을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 문득 나는 내가 공부하는 이곳이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선민 선생님이 절대적 위치에서 누구의 공부를 가르치고 숙제를 시키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선민 선생님과 나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가 아니고, 함께 공부하는 사이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조건 안에서 자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오선민 선생님은 우리를 통해 배우고, 우리는 오선민 선생님을 통해 배우면서 함께 같은 주제를 공부하면서도 자기 경험과 조건으로 엮어내어 자기 글을 쓰고 있었다. 인문세라는 공동체는 오선민 선생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고 있었다.

 

형식이 왜 필요한가

인문세는 내가 우리를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우리를 내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곳을 나왔다. 그런데 돌아가려 하니 그 우리가 내가 나오기 전의 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를 거부한 내가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전의 로는 안된다. 우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때, 그곳에 있던 선생님들은 난색을 표시했다. 나는 잠깐 당황했다. 내가 만든 공동체인데 내 맘대로 돌아갈 수 없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곳을 나갈 때 나의 절박했던 마음을 왜 알아주지 않을까 섭섭하기도 했다. 그때는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고 정식으로 형식을 따져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는 것을 다 알지 않은가. 물론 선생님들도 나의 난데없는 퇴장에 당황하고 기분 나빴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부터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아 한순간 마음이 상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알아줘. 내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정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인문세라는 공동체가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알아주는 정서적 공동체였을까. 나는 인문세를 책 읽는 친목 동아리쯤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의존하고 거기서 심리적 안정을 찾기를 원했을까. 나는 평소에도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가 중요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런 말에는 마음이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주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그런데 누가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무쌍 움직이는 마음을 나도 모르는데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마음이 그렇게 중요할까?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런 결과가 나왔어라고 할 때는 그 마음이 왜 갑자기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될까.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일까.

그래서 형식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모른다. ‘형식이란 눈에 보인다. 형식을 치르는 동안 그 순간만이라도 나의 마음이 드러난다. 형식을 표현할 때 마음이 형상화하는 시간이라고 해도 될까. 형식을 치르는 사람은 그 순간 그 형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결혼식을 하는 사람도 식이 진행되는 동안까지 계속 스스로 묻고 답할 수 있다. 이 결혼을 해야 돼, 말아야 돼. 식이 끝나기 전에 그것을 결정할까 말까를 계속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면 어찌 됐든 결혼이라는 이 형식이 끝나면 결혼의 의무와 약속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를 넘어 그 형식 안에서 살지 안 살지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형식을 치른 자는 나로서의 책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책임을 갖는다. ‘에게 무의미한 일이지만 해야 할 때도 있음을 이해하고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런 형식을 치른다고 해서 누구나 그때의 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결혼식의 형식을 거치고 그 자리에서 잘 살 것을 서약한다고 해서 이혼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졸업식을 한 후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형식이 필요하다. 형식이란 일단 형식의 수행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형식을 만들 때 형식의 일차적 수행자는 형식 만들기에서 배제된다. 내가 나를 위한 형식을 만들어 자의로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나를 위한 형식을 만든다. 이미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그들의 재결합을 위한 형식을 고심한다. 이것이야말로 겉으로 보기에 별 것 아닌 것 같은 형식의 가장 큰 의미다. 나는 나라는 개인보다 높은 층위의 우리가 만들어 준 형식의 문을 통과한다. ‘우리가 만든 형식의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내가 우리라는 정체성에 합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곳은 그곳에서 우리로 존재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고, 어떻게든 우리로 살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한다.

 

범고래 체력장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는 우리로서 참여하겠다는 마음을 펼쳐 보였다. 그러나 이 형식에 참여하기로 하면서도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있었다. 굳이 왜 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정말 나는 이들이 원하는 방식에 기꺼이 참여하고 싶은가. ‘우리라는 명목으로 라는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란 무엇일까.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면 될까. 끝없이 떠오르는 의심과 주저하는 마음과 함께 체력장의 출발점에 섰다.

그러나 일단 일시에 발걸음을 떼자마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함께 한 사람들과 숨을 나누고 호흡을 맞추며 달리자 얼굴에 부딪혀오는 바람과 함께 어떤 고양감이 올라온다. 이것이 뭐라고 별거 아닌 것 같은 가벼운 체력장에도 모두 얼마간 들떠 있다. 정말로 이것이 무엇일까. 함께 리듬을 맞추는 발걸음 소리만으로 어떤 일체감을 느낀다. 자세히 보면 각자 다른 사람들이, 다른 보폭으로, 똑같지 않은 템포로 달리는데도 어쩐지 묘하게 하나로 여겨진다.

사실 인문세를 위한 범고래 체력장의 날짜와 시간, 장소가 정해져 있었지만, 체력장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체력장 통과를 인증했다. 명목상 인문세의 범고래 체력장에 인문세만이 아니라 다른 공동체에서 참여도 많았다. 인문세가 아니어도 스텝이 아니어도 각자 자기 자리에서 뛰며 체력장을 통과했다. 인문세 공지를 통해 미리 범고래 체력장을 신청하고, 참가비 명목으로 돈을 내고, 범고래가 그려진 티셔츠를 받아 입고, 같이 뛰었다.

도대체 인문세가 어떤 곳이고 범고래 체력장이 무엇인데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을까. 어떤 힘이 미국, 일본, 스웨덴, 서울, 부천, 저 멀리 남도 땅 장흥. 돌 지난 아이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어른까지 연령과 상관없이 장소와 상관없이 함께하게 했을까. 그것은 어떤 연결이라고 하기보다 띄엄띄엄 각자의 자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범고래 티셔츠를 입고 뛰는 모습을 찍은 인증샷이 올라오는 순간 바로 그때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범고래 부족의 중심처럼 느껴졌다. 매일매일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중심이 이동했다. 중심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동심원이 그려지는 것 같은 그 역동성이야말로 범고래가 넓은 대양을 헤엄치며 순간적으로 바다 위로 내미는 숨구멍처럼 보였다. 범고래 체력장이 진행되면서 범고래의 중심은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 내일은 어디서 인증샷이 올라올까 저절로 기다려졌다.

왜 하필 인문세는 범고래 부족이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범고래가 인문세라는 몸체의 역동성, 능동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경계도 깊이도 알 수 없는 무규정성의 바다를 헤엄치는 범고래의 성질을 가져와 우리 정체성으로 입히고 싶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범고래 체력장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라는 의식을 떨치고 함께 몸을 움직이며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몸의 기억을 나눴다. 그 형식이라는 것이 너무 쉬워서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누가 보면 쟤들 뭐하는 거야 라며 우습게 보일 수도 있었다. 참으로 별 것 아닌 일에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이는 것을 보고 할 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범고래 체력장을 치른다고 해서 겉으로 보기에 무언가 눈에 띄게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한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 해본 것일 수도 있다. 체력장이 끝났다고 어떤 실질적 변화를 느낄 수는 없었다. 이것을 통해 드러나는 명백한 목표도 없었다. 그런데 이것을 통과하면 자격이 주어졌다. 그 자격이란 형식을 함께 치른 사람들이 경험한 공통의 기억이다. 스스로 그것을 통과하기 위해 행동을 실천하면서 자신에게 끝없이 질문했던 시간의 기억이다. 이것을 내가 왜 하고 있는가. 나와 그들은 어떤 관계인가. 범고래 부족이라는 우리와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내가 인문세다

누군가는 묻는다 인문세 스텝이 뭐예요? 왜 스텝이 되려고 하나요? 그냥 스텝이 아닌 채로 공부만 하면 안 되나요? 사실 나도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스텝이 뭐지 무슨 일을 하는 것이지? 인문세의 많은 일들을 나눠서 하는 사람인가? 그 질문이 있기 전까지 나는 스텝이란 주로 오선민 선생님이 시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공동체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고,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일부일 뿐이고 역량도 부족해서 어떤 일을 직접 만들고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때그때 부족한 일손을 메꾸는 방식으로 나는 인문세를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도왔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로 내가 한 일들이 나 아닌 누구를 위해서였을까. 스텝의 일이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많은 스텝 중에 나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문세가 이렇게 역동적인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문세를 나가 다시 되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너무도 당연히 스텝은 시킨 일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문세를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범고래 체력장을 준비하고 나를 위한 형식을 만들어가는 스텝 선생님들을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일을 만들고 해결하고 있었다. 언제나 변하는 문제에 따라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가며, 범고래 티셔츠를 만들 때는 이기헌 선생님을 중심으로, 체력장의 전체를 기획할 때는 강평 선생님 중심으로, 세부항목 정리는 이진진 선생님을 중심으로 등등. 끝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인문세라는 동심원을 매순간 새롭게 그리고 있었다. 그들은 인문세라는 공동체에 우리가 되는 것은 스스로 중심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몸소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만든 범고래 체력장이란 형식에 참여한다는 일은 곧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공동체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일이었다. 스텝은 변하는 중심을 만들어내는 인문세의 부분이자 인문세 그 자체였다.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라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스텝이었다. 인문세라는 공동체는 그 자체로 스텝들과 함께였고, 스텝들로 만들어지지만, 그렇다고 전체 스텝들의 어떤 목적이 따로 있지도 않다. 다만 매순간 내가 인문세가 되어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을 만들어낸다.

인문세도 분명 위계와 질서는 있다. 그러나 언제나 스스로 자기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고유의 역할이 있을 따름이다. 모든 스텝들은 가능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인문세의 요구에 따라서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알아서 자기 일을 찾는다. 스텝들이 모인 합이 인문세가 아니다. 스텝들은 계속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합해 가고, 그때마다 인문세라는 공동체의 모습이 바뀐다. 누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문세를 대표한다고 하는 오선민 선생님은 스텝들보다 우월하지 않고 스텝들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 따라서 인문세라는 공동체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때에 따라, 문제에 따라, 스텝들이 스스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 갈 때 눈앞에 새로운 모습이 드러난다. 누구 한 사람의 명령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리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밖에서 보면 거기 뭐하는 곳이냐고 묻게 된다. 각자의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며 부서지고 깨지기도 하면서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자가 중심이 되어 언제나 복수의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정확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끝없이 움직이는 유동성 안에서 스텝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성장한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 한없이 기쁘고 즐겁다.

 

비젼을 만들어가는 능력자들

나는 인문세라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끝에까지 이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스텝들은 모든 일을 처음으로 시도하면서도 그 한계가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자기 역량의 정도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한계를 만들어간다. 자기 한계가 어딘지 모르고 또 그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 스텝들이 하는 일은 불안정해 보인다. 이번 답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이번 탐구생활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범고래 체력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일단 시도해 보는 것은 좋은데 그러다가 인문세가 해체되는 것 아니야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언제나 실패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때로 아슬아슬하다.

범고래 체력장을 치르고 내가 다시 돌아온 인문세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옳고 좋아서가 아니다. 이들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걸러내지 않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범고래와 닮아 보인다. 나는 여기서 이 우리와 함께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통과의례를 끝냈다고 아무것도 보장되는 것도 달라진 것도 없었다. 내 삶의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오히려 더 많은 책임이 따라왔을 뿐이라고 할까. 너는 인문세의 스텝이라며 스텝이 뭐하는 사람인데라는 끝없는 질문이 따라다닐 것이고 나는 이 물음에 언제나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망설임 없이 단번에 할 수 있을까. 그때마다 다시 묻고 답하며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며 매번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보는 수밖에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는 일은 중요하다. 내가 있는 자리가 나를 말해준다. 나를 위한 우리형식을 만들어주고 내가 그 형식에 참여하고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 자리는 내가 누구를 위해 누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우리가 되어, 내가 결정한 방식에 책임을 지고 실행하는 절대적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 우리의 공간에서 누군가의 시킴을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내가 인문세의 부분이지만 또한 우리라는 전체라는 생각을 하고 싶다. 우리는 나의 참여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창조되는 공동체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살아갈 방식을 직접 만들고 참여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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