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인류학을 나눌레오] 관찰의 기술
인류학을 나눌레오(2)/241015/강평
주제문 : 관찰은 다른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태도로서,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다.
글의 취지 : 기존의 렌즈를 벗어날 수 없는 가운데 실제 벌어지는 현실을 바라보는 기술 익히기
관찰의 기술
불안돈목(佛眼豚目)
얼마 전 인문세에서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 답사를 갔다. 답사팀이 동물원을 가기 전, 우연히 들른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는 주위 사물과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58채의 건축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흔히 보는 아파트와도 다르고 외관상 화려하거나 편리함을 내세운 건물과는 달랐다. 전시는 밖의 하늘, 나무와 최대한 어우러지면서도 주위 다른 건물이나 이웃들과도 어울리는 작품들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전시실을 들어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뜸 “저런 건물은 환가성이 없어, 교환 가치가 없어 들인 비용을 회수하지 못할거야”라는 취지의 말을 일행들에게 내뱉었다. 물론 직업적으로 건물 가격을 조사하는, 본업 본능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문학 주변의 풍월이라도 들은지 몇 년되었지만 자동으로 ‘튀어’나와버린 내 마음 뿌리 깊은 곳에 자리잡은 효율, 부가가치, 시장 가격 기준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그 건물들이 시장에서 건축가가 들인 ‘고심’을 가격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의견이 아니고 팩트이다. 문제는 나는 왜 작품을 보자마자 그 생각이 자동적으로, 광속으로 나왔다는 데에 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던가? 이 말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대화에서 연유한 것이다. 농담으로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돼지처럼 보인다고 하니, 무학대사가 이성계는 부처로 보인다고 했고, 이성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고 응수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대상 자체보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있다는 의미이다. ‘뭐 눈에 뭐만 보인다’는 말에는 다른 많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볼 때 자기 기준으로만 보고 그를 확인하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눈을 뜨고 있지만 사실 아무 것도 보고 있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이연숙 선생님께서는 인문세 한 세미나에서나는 “관점이 세상을 바꾼다. 그런 면에서는 인문세의 글쓰기가 그에 좋을 활동인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세상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 같다. 내 생각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글쓰기는 ‘사전 공부, 답사, 글쓰기’라는 공부 방법을 통칭하시는 것 같다. 쓰고 부딪쳐봐야 기존과 관점과 충돌되고, 그 불편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최근 화요 정통 인류학에서 읽은 프란스 드 발의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를 통해 애정, 호기심을 담은 관찰, 지리해보이지만 빠뜨릴 수 없이 그 자체로 소중한 관찰 과정, 그리고 사소해보이지만 큰 차이를 만드는 관찰 방법을 접했다. 관찰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적으로 나와 연결된 다른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자세, 태도를 통칭한다. 미술관에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기준의 시각을 알아채고, 불편하지만 나 위주의 시각이 무엇이 문제인지, 이제라도 조금씩 알아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려면 관찰이 필요하고, 나는 관찰의 기술을 알고 싶다.
시작, 대상에 대한 애정과 기대
관찰이란 무엇인가? 관찰은 단지 보이는 것을 보거나(see), 일시적으로 주목하는 것(look at)과는 차원이 다르다. 관찰(observe)은 어떤 목적이나 기대로 어떤 대상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관찰은 어떨 때 하는가? 호기심이 생기고 애정이 있을 때, 그리고 관찰 대상에게 거는 특정한 기대가 있을 때이다. 지금은 장성한 나의 조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강아지를 좋아해서 강아지를 보살피고 키우고 훈련시키고 애지중지하던 생각이 난다. 고모를 졸라 개 관련 책을 잔뜩 사더니, 몇 달 뒤 지나가는 개의 종과 특징을 걸어다니는 사전처럼 꿰고 있었다. 정말 당시 조카는 개만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프란스 드 발가 동물학자가 된 계기는 어릴 때 동물을 키우고 보살폈던 경험이 컸던 것 같다. 책에 소개된 저자 본인의 새 드로잉은 너무 정교해서, 사랑하지 않으면 그 정도로 세밀하게 대상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어, 수영만 일찍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릴 때 동물과 친숙한 경험을 하는 것도, 자기 기준이 더 굳기 전에 타자를 이해하기에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스 드 발은 문화를 인간만의 것으로 한정한다면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할 필요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관찰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알고 싶고 왠지 끌리는 것 이외에도 그 대상에 대한 특정한 ‘기대’, 드 발의 경우 동물도 문화가 있으니 행동을 자세히 봐야겠다는 기대도 관찰의 동기가 된다. 기대는 관찰했을 때 결론을 이미 정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미리 그려보는 그림 같은 의미이다. 나온 예상치가 기대와 달랐을 때는 기존의 자기 기준과의 충돌이 그 원인일 수 있기 때문에, 관찰의 방법을 달리하는 등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이 부분은 이 글 뒷부분에서 상술하도록 하겠다.
인간만 동물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도 인간을 관찰한다. 즉, 동물에게도 타자를 알려고 하는 감정, 사고가 있다. 구조견을 구조 로봇이라고 생각하면, 구조견을 훈련시키고, 훈련과 실전에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는 매뉴얼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의 수색 및 구조견의 선구자인 캐롤라인 헤바드는 구조견을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는 주체로 이해했다고 한다. 1985년 멕시코 지진 때 아무리 찾아도 시체 밖에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세퍼드 앨리가 우울증에 걸린 듯, 어떤 보상에도 움직이지 않고, 길게 쉬어도 회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앨리뿐만 아니라 다른 구조견들도 식욕까지 잃고 꼼짝도 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조견을 구조 로봇으로 봤다면 그저 오랜 수색 기간에 지쳤거나, 어딘가 몸이 안좋다고 생각하고, 다른 구조견을 투입하거나 아니면 구조견을 통한 수색을 포기했을 수 있다. 하지만 헤바드는 멕시코인 수의사(구조견은 바보가 아니기에 미국 수의사가 아니라 멕시코 수의사를 배치한 점도 눈에 띈다)가 생존자역을 맡아 잔해에 숨고, 개들에게 발견되게 만든다. 구조견이 칭찬과 먹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에 감정을 투입한다는 것은 관찰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다.
지루한 시간, 그 자체로 소중한 과정
동물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미 동물에게 무엇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반영된 것이다. 그 기대는 지적 호기심, 대상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은 관찰을 시작할 수 없다. 책읽기, 글쓰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인문세 줌에 앉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돈버는 일, 이해관계가 얽힌 일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할 수 있지만, 관찰은 강제로 할 수 있지 않다. 고시마 원숭이를 관찰하기로 한 이마니시와 그의 제자들은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요?’라며, ‘흥분에 못 이겨’ 길을 나서, ‘고된 일’을 시작한다. 드 발은 이 작업이 힘들고 수고스러운 일,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고구마 씻기 창안 원숭이 ‘이모’를 최초로 ‘미토’가 발견하고 이 놀이가 친구, 친구에서 가족 등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5년 이상 관찰한다. 행동 전파는 특별한 전수법이 아니라 함께 보내는 시간에 비례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을 밝혀낸 것도 원숭이들과 함께 보낸 학자들의 시간들이었다. 관찰에는 ‘보려는 눈’이 필요하다.
기대는 발견의 토대가 되지만, 기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대와 충돌하는 ‘실제’ 사실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드 발은 ‘과학의 거대한 진보는 이미 정리된 발상이 기대에서 어긋날 때 일어난다’라고 한다. 프란스 드 발은 지루하고, 긴 시간 동안의,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엄청나게 수고스러운 관찰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말하고 있다. 이 작업을 생략하고 이미 누군가 모아둔 데이터를 컴퓨터 작업이나 추론만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 발은 그런 대범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힘들고 소중한 기초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말벌’ 취급한다고 평한다.
최근 AI가 인간을 대신해서 귀찮은 일을 다 해준다고 한다. 청소도 빨래도 숙제도 다 한다고 한다. 기계를 다 시키고 인간은 무엇을 하나,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면 인간은 편리해질까, 일자리를 두고 기계가 경쟁하게 될까 궁금하기도 하다. 한편으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으로 보이는 것을 ‘기능적’으로 기계가 대신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때 말벌은 기계가 되겠지만, 참을 수 없는 ‘흥분’, ‘재미’, 설렘, 또 그 감정이 보게 될, 정해지지 않고 대체할 수 없는 작지만 큰 차이점을 과연 AI가, 그것까지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선사인이 주먹 도끼를 만들 때 미래에서 온 사람이 완성품 주먹 도끼를 준다면 어떨까. 기능적으로는 주먹 도끼를 쓰는 데에 문제가 없겠지만, 만들 때의 고심, 실패, 집중력, 그리고 엄청난 자부심까지는, 분명 대신해줄 수 없을 것이다.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
선입견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안경이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서 사고하기란 어렵다. 프란스 드 발이 인용한 콘라트 로렌츠의 ‘각인’이론과 니코 틴베르헨의 큰 가시고기의 공격성에 대한 실험은 상황 바꿔보기를 통해 선입견을 바꿀 수 있는 사례였다. 로렌츠는 거위를 일렬종대로 거느리고 다니다가, 새로온 여자 대학원생에게 그 지위를 빼앗겼을 때, 단지 거위를 변덕스러운 혹은 새것을 쫓아다니는 것으로 퉁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거위는 처음 태어났을 때 본 것을 같은 종으로 각인이 되어, 이를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처음 본 것은 인간의 생각과 달리 로렌츠 박사가 아니라 그가 신은 노란색 장화였다. 아마도 그는 사람, 장화, 장화의 색깔 등을 다양하게 바꿔보는 실험을 했을 것이다.
틴베르헨이 연구실 창가에 둔 큰가시고기가 우편 배달차가 정차할 때마다 맹렬한 영역 과시 행동을 보인 것은, 결론적으로 번식기의 큰가시고기 수컷의 배 색깔이 빨간색인데, 마침 그 우편 배달차의 색깔이 같은 색이었기에(게다가 그 고기의 배보다 몇십 배는 되었을테니 아마 그 큰가시고기의 예민함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거의 극한 체험 수준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반응했던 것이다. 문제가 트럭 소리, 도착하는 일정 시간, 색깔인지 다양하게 변수를 바꿔보며, 섣부른 의인화를 하지 않고 실험했을 것이다.
관찰의 기쁨
보이는대로 본다는 것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대로 보는 것이다. 건성으로, 자기 식대로 말이다. 인간은 자기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조건을 벗어날 수는 없다. 관찰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더욱 굳건히 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들여 오랜 시간 보고, 듣고, 접촉하고, 맡으며 알아보려 애를 쓰는 태도이다. 그러니 아주 어렵고 사소하고 지루한 작업이다.
나는 매번은 아니라도 자주 글쓰기 숙제를 하면서 나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고, 놀란다. 이번에도 미술관, 동물원은 즐겁게 잘 다녀왔는데, 숙제를 하면서 그 과정을 복기하다가 내가 갇힌 관점, 그 한계를 알게 되었다. 글쓰기 패턴이 비슷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데, 정말 다녀올 때는 잘 모르고 지나쳤던 어떤 장면이 글을 쓸 때면 현미경처럼 들여다 보게 된다. 미술관, 동물원의 타자를 외부로 보러 갔다가 결국은 내 안의 관점과 시선을 들여다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