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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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관찰, 일상을 다르게 보는 힘
인류학을 나눌레오(4)/241029/강평
관찰, 일상을 다르게 보는 힘
관찰을 관찰하다
책을 읽거나 답사를 갈 때까지만 해도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나 현상을 보기만 했지 출발점인 내 시선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책 내용이나 답사에서 본 것을 다시 생각하며 글을 쓸 때야 비로소, 나는 누가 이야기해줘서가 아니라 스스로, 문제는 내 관점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번 알아차림은 마음 인류학 시즌 읽은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을 통해 저자 프란스 드 발의 ‘관찰의 태도’에 대한 철학을 글로 정리해 볼 때였다. 나는 그의 관찰 철학을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하고, 자기 위주의 성급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지루한 노동일 수도 있는 세심한 관찰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내가 ‘해석’이라고 한 것은, 이 글을 쓰면서 그 책을 다시 찾아봤는데, 드 발은 연구자들이 지구를 반 바퀴 도는 항해를 향해 정보를 모으고, 머릿속에서 다시 배열해봤다든지, 몇 십 년 동안 조사를 했다고 썼을 뿐 ‘지루한’이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지루함’은 세심하고,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 연구 과정의 많은 예를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였다.
관찰(觀察)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봄’이다. 보이는 것에 대한 인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고 집중력 있게 오랜 시간을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대상은 동식물, 천체, 미생물부터 사회 현상 등 다양하고,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오감이 동원되는 접근이다. 인문세 홈페이지 연재 핫코너에서 임진왜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허남린 선생님의 연재글 중 ‘단조로움과 즐거움의 역설’이 떠올랐다. 수십 년을 임진왜란에 집중해서 자료를 찾아 헤매고 오감을 동원해 분석하고 글로 정리하는 선생님은 관찰자였다. 선생님은 하나의 주제에 집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그 끝에 보상이 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지루할 수도 있는 긴 시간을 보내는 사이 즐거움의 기대치가 작아지고, 그러는 동안 작은 것에도 매번 행복으로 쉽게 변할 수 있다는 해석도 덧붙이셨다. 내가 생각하는 따분하고 무료한 ‘지루함’과는 차이가 있었다. 나에게는 허남린 선생님과 드 발 등 관찰자들이 경이롭고 존경스러우면서 동시에 여전히 나로서는 엄두 낼 수 없는 관찰 과정의 지루함에서 오는 두려움이라는 모순된 감정이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왜 관찰의 많은 요소들 중 유독 ‘지루함’이 두드러져 보였을까, 또 왜 지루함에서 끝나지 않고 ‘경이로움’을 떠올렸을까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얼핏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모순된 감정이 나의 마음 상태가 아닐까. 둘 중 하나가 진짜, 가짜가 아니라, 모순이 뒤섞인 채로 말이다. 관찰을 과학자나 연구자들만의 특별한 영역으로 두고, 세심하고 오랜 시간이 필수 요소로 본다면, 나는 관찰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동식물, 천체, 세포에 대해 까막눈이자 관찰을 시도조차 해본 적 없고, 사회 현상도 깊게 고민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관찰을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관찰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태도에 대해서는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시선은 직접 확인할 수 없고, 내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만 우회해서 확인할 수 있다.
지루함에 대해서
인문세 에세이를 쓸 때마다, 그렇다 쓸 때마다이다, 매번 나도 몰랐던 나의 문제적 관점을 발견한다. 당황스럽다. 내가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점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매번 주제어는 바뀌지만 비슷한 맥락의 주제어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생각해보니 이 당황스러움도 실제 드러난 것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기준과 깨달았다면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성과주의가 반영된 느낌인 것 같다. 에세이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내 관점은 환산 가능하다는 사고, 효율 중심과 자기 중심 사고였다. 일테면 총무를 하면서 시간도, 과목도, 접속하는 사연도 저마다 다른 세미나비를 개인별 횟수와 금액으로 더해서 막대 그래프 형태로 만든 적이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나무, 풀, 배, 책상이라는 다른 것을 일률적으로 더했다고나 해야 할까. 얼마 전 떠난 한반도 바다 답사에서 풍랑과 싸우면서 더불어 살았던 옛 선조들을 상상으로 만나며, 나만은 무조건 예외로 무사하기를 꿈꾸며 자기 위주의 생각에 갇힌 나를 만나기도 했다.
에세이를 쓰면서 사고에도 변화가 좀 있기를 바랬는데 이번에는 관찰의 과정에 대해 즉각적인 지루하다는, 다른 에세이에서 마주쳤던 유사한 느낌과 만난다. 지루하다는 것은 마음은 도착점에 가 있으면서 출발선에서 이리저리 계산을 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다. 허남린 선생님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집중하면 지루함과 단조로움이 필연적으로 동반되고, ‘그 끝에’ 보상이 오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이다. 허남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보상이 결과로서 따라오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보상부터 떠올리고 할지 말지 계산기를 두드리며 재는 것은 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루함을 떠올리면 발걸음 떼서 시작하기는 것 자체가 어렵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는데다 그 벌어진 일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사람이 변수로 작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작해봐야 펼쳐지는 일이기에, 당연히 시작점에서는 계산이 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자주 깜빡한다.
또 지루함이란 중요하고 큰일과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는 명백한 기준을 보여준다. 드 발은 동물이나 인간에 대한 실제 조사 한 번 없이 매일 컴퓨터에 앉아 수집된 데이터만 분석하던 젊은 과학자가 데이터 수집에 중점을 두는 다른 과학자들을 일벌 취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가 크고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 작고 사소한 일은 누군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뜻 같다. 이때 큰일은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고 작은 일은 이 판단을 채우는 요식행위이다. 과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성과가 우선이라는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과학자들이라고 그 긴 시간동안의 모든 과정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를 시작하지 않거나 중단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힘은 연구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이다. 드 발이 많은 분량으로 할애한 고시마 섬 원숭이를 연구한 이마니시와 그의 제자들은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요?’라며, ‘흥분에 못 이겨’ 길을 나서, ‘고된 일’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고된 일’은 뒤에 올 보상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애정이 원동력이 된 것 같다.
경이로움에 대해서
나는 구체적으로 관찰자들의 무엇이 경이로웠을까. 신박하고 신기하고 들어본 적 없는 주제가 내 마음을 끌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역설적으로 단조로워만 보이는 연구 과정에서 나온 디테일 때문에 경이로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니 지루함과 경이로움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이어진다. 허남린 선생님과 우리가 임진왜란에 대해 공부하는 주제는 이순신이나 선조같은 유명하고 굵직한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중국과 일본에 사신이나 포로로 가서 쓴 공식적이면서도 사적인 일기 형식의 <중세 여행기>를 통한 다양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일테면 배멀미약 귀미테가 없었던 당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피할 수 없었던 오장이 뒤집어지는 통신사의 일기에서 험난했을 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험난함을 ‘지시’하지 않아도 허남린 선생님이 발굴하신 자료의 디테일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었다.
사신이 아니라 양반으로서 포로로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의 대승리 명량대전 이후, 실제로는 여전히 그 일대가 적국인 일본 배들로 도배되는 바람에 조선인이 대거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는 이야기가, ‘스치듯이’ 나온다. 그 지나칠 수도 있는 사소한 이야기를 통해 교과서만 보면 명량대전 이후 일본이 모두 도망가고 승리의 함성만 가득할 것 같지만, 강항의 기록을 보면 명량대전은 수많은 전투 중 하나로, 조선은 그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자료를 면밀히 찾아서 보면 우리가 믿고 싶고, 알고 싶은 것과 실제는 차이가 난다. 어떤 것이 중요한지, 주제와 연결될지는 찾고 읽어보고 정리해야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기초 자료에 대한 검토와 관찰은 견디기만 해야 하는 일, 힘들게 죽 쒀서 누구 주는 헛일이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경이로움은 주제의 신박함이 아니라 내용의 디테일에 달려있다. 그 디테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세히, 가까이, 오래, 집중해서 보고 기록해야 한다. 관찰이란 현장에서 관찰한 것이 기본이겠지만 이뿐만 아니라 사전에 관찰 조건을 찾고 만들고, 관찰 후 해석하고, 다각도의 해석을 뒤집고, 메모하고, 사후적으로 글로 구성하는 전과정을 포함한다. 로빈 월 키머러가 『이끼와 함께』에서 말한 것처럼 아주 작은 이끼를 보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 거의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 가까이, 자세히 보는 기본 자세이다. 키머러는 이끼를 서서 본다는 것은 항공기에서 무엇을 보는 것처럼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관찰은 말 그대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관찰을 관찰자 편의대로 하기 위해 동식물의 서식환경에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려 각별히 유의하는 것도 관찰의 태도 중 하나이다. 드 발이 인용한 원숭이 얼굴을 식별하려는 노력대신 얼굴에 동그라미 등 표식을 커다랗게 하는 사례에서 얻은 연구물은 관찰이 아니라 침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경이로움은 디테일에 있고, 그 디테일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관찰 태도를 반영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는 대상과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 이외에도 어디든 어떻게든 대상을 만나러 가는 것도 포함된다. 허남린 선생님께서는 7년 가까이 지속된 임진왜란이니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 거기서 이어지는참혹한 이야기의 흔적, 이런 과거의 시설을 모아 놓은 시설들 등 직접 어디든 달려가서 밟아봐야 한다고 하셨다. 그 알고자 하는 마음과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관찰자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킨다.
나의 관찰기
나는 흔히 관찰의 선제 조건이라고 일컬어지는 ‘애정과 호기심’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애정과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소수일 것이다. 일단 무엇이라도 접하고 해봐야 애정이 생기지만, 애정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고 하면 시작 자체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인문세에서 내가 떠난 박물관, 동물관 답사도 처음부터 애정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모르고 무관심했던 주제를 접하는 것은 ‘그 주제’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 어떤 주제든 일단 만나보겠다는 마음, 아니 차라리 누군가 옆에 있어 얼떨결에 발걸음을 떼본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일단 접하고보니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나중에 생기기도 했다. 흥미가 당장은 당기지 않아도 어떤 이유에서든 길을 나서보는 것만으로도 애정이 시작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애정이라는 것은 관심에서 비롯되는데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어렵다. 애정은 찾아야 하는 영역인 것 같다.
관찰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 했을 때 내가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나는 ‘원래’ 건성으로 보는데, 관찰해본 적이 없는데‘였다.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관찰‘을 할 기회가 별로 없다. 무엇을, 어떻게 관찰할까에 앞서, 어떻게 관찰을 시작하는가는 누가 관찰을 하는가와 연결되어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수없이 많은 시각적 청각적 매체들로 마음이 뺏긴다. 하다못해 출근길 엘리베이터만 타도 나도 모르게 눈으로 뉴스를 읽으며 흘러나오는 광고 음악을 듣고 있다. 내가 의도적으로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내 눈과 귀는 산만하게 주의를 빼앗기고만다. 회사에 가서도 말그대로 쏟아지는 업무를 속도감 있게 쳐내지 않고 밀리면, 뒤처리하느라 다른 신경을 쓸 정신이 하나도 없다. 관찰하지 않으면 온 감각이 열린 상태로 정보를 주입받게 된다. 관찰은 나에게 주입되어 시각, 청각 등 감각을 빼앗는 것들에게 휩쓸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관찰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감각‘으로 본다는 점이다. 누가 요리해준 음식을 먹거나, 배달된 밀키트를 다 때려놓고 물 넣고 불만 키는 것이 아니다. 관찰은 서툴고 손에 익지 않지만 요리에 필요한 과정을 그려보고, 재료를 직접 다듬고, 물과 불을 조절하며 내가 그 대상을 직접 생각해보는 과정이다.
아…좀 더 정리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