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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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관찰의 이유
인류학을 나눌레오(5)/241105/강평
주제문 : 관심은 나와 상대를 알고 싶은 렌즈이다.
관찰의 이유
객관적 관찰이란 없다
인문세에서 답사로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을 갔다. 동물원 옆 미술관에 잠깐 들렀다. 주위 사물과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58채의 건축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흔히 보는 화려함이나 편리함을 내세운 건물과는 달랐다. 전시는 의뢰인인 건축주의 가족 구성과 취향을 고려하면서도, 밖의 하늘, 나무, 주위 다른 건물, 이웃들과도 어울리는 작품들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전시실 초반 5채쯤 보고 있었을 때 나는 대뜸 “저런 건물은 환가성이 없어, 팔 때 건물에 들인 설계비, 건축비는 매몰 비용이라 회수 못해, 다 자기 만족일 뿐이야”라고 내뱉었다. 전시된 건축물을 다 보고 난 뒤, 나는 인문학 주변에서 풍월을 들은지도 몇 년인데 변치 않는 본심에 놀랐다. 내 마음 뿌리 깊은 곳에 자리잡은 동일한 욕망을 전제로 한 희소성이라는 판단 기준은 이번뿐만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나와서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이어 동물원에 가서는 동물들이 동물원 개장 시간에 맞춰 출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보였다. 어릴 때 동물의 체취와 분변이 뒤섞여 나의 후각을 강타하던 동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파트 비슷한 구조의 쾌적해 보이는 곳에 살고 있었다. 구획된 아파트의 옆 벽면은 그대로 둬서 다른 동물과의 접촉은 차단하고, 앞뒤 벽면을 터서 실내, 실외로 관람객들이 구경할 수 있게 된 구조였다. 열대, 온대, 아열대 등 다른 기후에서 살던 동물들이 한곳에 모여 직장인처럼 9to6 관람객의 리듬에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물원 후기를 보니 나에게는 직장인으로 보였던 동물이, 수정샘에게는 전시된 갇힌 존재로, 기헌샘에게는 활발하게 노는 녀석들로 보였던 것 같다. 분명히 같은 동물원을 같은 시간에 함께 갔는데 후기만 보면 전혀 다른 곳을 다녀온 사람들 같다. 아마도 미술관에서도 다른 이들은 내가 곧바로 떠올린 건축비 회수 걱정과는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대상은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렌즈를 통해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울산 반구대 암각화 답사에서 고래 그림을 봤을 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암각화에 나타난 고래 사냥 ‘정보’였다. 버리는 것 하나 없이 의식주 전반에 걸쳐 많은 이들을 풍요롭게 하는 효능을 중심으로 고래 사냥의 가치를 생각했다. 고래 그림을 벽에 새긴 것은 고래 사냥을 위한 학습서 제작으로 보였다. 인류학 이번 시즌 읽은 프란스 드 발의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는 동물을,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사들』은 원시 부족을 관찰한 이야기이다. 문득 그분들이 왜 모험을 했을까, 나와 너무 다르고 낯설고 위험한 대상을 수 년씩 관찰할 일인가 생각해보았다. 동물에게 문화가 있다, 원시 부족은 구체의 과학이 있다, 원시 부족의 쿨라를 통한 교환이 아닌 선물 경제가 있다는 것을 밝혀서 무엇하겠다고. 나에게 ‘왜’란 목적, 쓸모의 유사어였기 때문에 든 질문이었다. 나의 견고한 사고의 틀이란 쓸모를 우선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고 체계가 다른 원시 부족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나는 이 글에서 관찰의 이유를 쓸모와 관심으로 나누어 천천히 살펴보려고 한다.
쓸모
나는 건성건성 볼 뿐 사물이든 현상이든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다고,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물론 학자들만큼 자세히, 오랜 시간 관찰하지는 않지만 나도 관찰을 하고 있었다. 업무적으로만 봐도 어떤 지역의 상권 변화를 볼 ‘필요’가 있을 때 주기적으로 해당 지역을 들러 변화의 양상을 메모하고 정리해둔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보아도 필요라는 목적 없이 단순히 알고 싶어서 관찰해본 사례를 떠올리기가 어렵다. 나는 나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고, 그 렌즈 자체는 쓸모라는 단단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관찰(觀察)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봄’이다. 보이는 것에 대한 인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고 집중력 있게 오랜 시간을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대상은 동식물, 천체, 미생물부터 사회 현상 등 다양하고,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오감이 동원되는 접근이다. 이렇게보면 관찰이 어렵고 힘들고 특정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하지만 전문학자가 아닌 아이들은 사고의 틀이 견고하지 않아 동물을 인간과 구분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동물을 의인화하여 마치 친구처럼 다가가 살피고 놀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관찰은 일이 아니라 놀이이자 본능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놀이를 쓸모라고 하지 않는다. 드 발은 선사시대 수렵 채집민들도 식용 가능한 동식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했기에 면밀히 관찰했다고 하며 관찰의 쓸모를 말했다.
유럽 식민주의자들도 원시 부족민들을 관찰했다. 그들이 관찰하는 이유는 쓸모였다. 원시 부족민은 선(先)주민이다. 식민주의자들은 원시 부족들이 딛고 있는 땅과, 그 땅에 있는 나무, 광석 등 자원을 가져가고 싶었다. 그것보다 원시 부족들의 몸이 매우 날렵하고 수렵도 잘하는 전사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살살 구슬려보기도 하고 안되면 폭력으로 진압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들을 인내심 있게 관찰했어야 했을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의 눈에 비친 원시 부족은 갖고 싶은 자원을 지키고 있는 방해물이었다.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문자도 없고, 얼굴이나 몸에 문신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자신들의 세계를 문명으로 보고 있던 식민주의자들의 시선으로 관찰한 원시 부족은 문명의 반대인 미개로 보인다. 자신을 정상으로 두고 나머지를 결핍으로 보았기에, 다른 것은 결핍된 것과 동의어가 된다.
나는 책을 읽고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어떻게 원시 부족민들을 미개라는 잣대로만 볼 수 있는지, 식민주의자들을 쉽게 비판했다. 드 발이 동물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동물에게는 생각, 감정이 없다는 학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드 발의 동물에 대한 생각이 나와 동일한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생각은 이미 레비스트로스와 드 발이라는 학자가 오랜 관찰을 통해 기존 학계의 주장을 뒤집는 새로운 이론을 정착한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론이 정답도 아니고 다른 이론들과 경쟁 관계에 있기도 하고, 얼마든지 다음 이론들로 대체될 수도 있는 한시적 유효성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들의 이론을 접하고 그에 공감하고 있는 조건에서의 생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 여기의 나’가 ‘그때, 거기의 그들’을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의 내 시선과, 그때 그곳의 식민주의자들의 시선은 다르지 않고, 필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사회적으로 전승받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다듬어진 렌즈로 자신들의 쓸모에 맞게 대상을 바라보았다. 나도 나의 렌즈로 대상을 나의 쓸모에 맞게 보고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건물이 팔릴 때, 지을 때 들인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독특한 예견이나 의견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반응이라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효용, 쓸모라는 부속이 강력하게 장착된 내 렌즈가 자나깨나 자동으로 작동된다는 데에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집은 동일한 욕망, 동일한 집이 아니라 다른 서사를 말한다는 기획이 명시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생활 전반에서 관찰이 시작되지도 못하고 내 시선으로 이미 결론내버린 것들을 확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관심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원시 부족민들이 동식물에 대해 관찰하고 종별로 수없이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하며, 그들이 ‘쓸모’란 실용 차원뿐만 아니라 ‘관심’이란 지적 차원에서도 관찰했다고 말한다. 말리노브스키도 『서태평양의 항해사들』에서 쿨라 교역이 단순한 실용성이나 이윤의 계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의례라고 했다. 원시 부족이 생존을 위해서는 동식물을 알아야 했다거나, 카누를 타고 원양항해를 한 것은 자급자족이 어려워 교역을 하려했을 것이라는 것은 쓸모를 늘 염두에 두는 사람들의 선입견이 들어간 예상이다. 그런 예상은 레비스트로스와 말리노브스키의 관찰로 쓸모 이외의 이유, 즉 지적, 감정적, 미적 욕구의 충족이 밝혀지게 된다.
드 발은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에서 침팬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전승자가 하는 행동을 모방하고 학습하고 배워야 한다고, 모방은 관찰의 결과라고 한다. 어떻게 먹이를 구하고 저장하고 먹고, 또 자신을 보호하려면 주위 침팬지들을 잘 보고, 잘 따라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인류와 500년 전쯤에는 조상이 같은 침팬지도 생존이라는 ‘쓸모’로 관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드 발은 침팬지가 당장의 생존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에 계속 있기 위해 사태를 파악하고, 집단에서 퇴출되지 않도록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한다. 쓸모에만 몰입되어 주위에 관심이 없으면 때와 장소라는 맥락 파악이 어렵다. 그런 면에서 관심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장기적인 면에서 쓸모가 된다.
드 발은 아이가 동물에게 느끼는 직관적인 친밀감은 엄청난 기쁨의 원천이라고 했다. 우리가 동물원 답사를 간 날, 미술관 앞 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옆에 있던 5살 정도되는 유치원생 단체 관람객이 생각난다. 그 아이들이 본 미술관 그림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뒤이어 그들의 발걸음이 닿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원에서 아이들은 동물을 인간과 구분되는 친구로 생각했을 것 같다. 유치원생들의 도시락이 내가 소풍 때 보던 김밥 일색이 아니라, 넷플릭스 <흑백 요리사> 경연에 나온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비주얼 갑인 것이 인상 깊었다. 엄마들이 어떻게 도시락을 식당에서 파는 것처럼 준비를 했을까 궁금했다. 다른 선생님에 전언에 따르면 그런 화려한 도시락은 식당에서 사온다고 한다. 유치원 선생님은 도시락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학부모 단톡에 올리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그 광경이 동물도 스스럼 없이 친구로 여기는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유치원생들에게 도시락의 화려함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단톡에서 벌써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쓸모가 아니라 무엇이든지 관심을 둘 수 있는 무한 에너지를 원천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 괜한 우려가 들었다.
관찰은 스쳐 보이는 것을 보다보니 어느새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드 발에게는 동물에게도 생각, 감정, 문화가 있다는 직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가설을 뒷받침할만한 관찰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리 막연하고 직관적이라고 할지라도, 기대는 발견의 토대가 된다”라고 하며 기대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렇다고 정해진 가설을 향해 관찰이 미리 정해둔 빈자리에 채워지기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드 발은 동물의 행동을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부터 새로운 관찰과 발상을 끌어내는 ‘폭넓은 방향 감각’을 말한다. 또 과학의 위대한 진보는 기대대로 실현되는 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발상이 기대와 어긋날 때 생긴다고 한다. 따라서 관심으로 시작하더라도 이내 자기 편견이 실제 관찰에서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현장조사를 중요시했던 말리노브스키도 조사 이전 문제와 질문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고 했다. 막연히 알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원시 부족의 미개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여러 근거 중 하나가 ‘나무’와 같은 추상적 언어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나무’라는 어휘 하나만 갖고 있는 언어는 ‘나무’라는 어휘는 없지만 그대신 수많은 개별 종과 변종에 대한 명칭을 가진 언어에 비해 개념들이 풍부하지 못한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원시 부족들의 식물을 구분하는 수많은 단어들이야말로 ‘부단한 주의력’이 요구되며 서로 구별지을 수 있는 특징에 대한 ‘빈틈없는 관찰’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따라서 서양과 원시 부족들의 단어의 차이는 지적 능력의 수준이 아니라 그 집단의 관심의 차이라고 한다. 관심이 없으면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도 없다.
쓸모는 나의 시선이 일방적으로 타자의 표면을 향하는 렌즈이다. 반면 관심은 나와 상대를 알고 싶은 렌즈이다. 알고 싶은 데는 이유가 있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 함께 놀고 싶다, 도와주고 싶다 등 쌍방의 관계를 원할 때이다. 반면 쓸모는 일방적인 효용을 뜻한다. 쓸모와 쓸모가 격돌하면 제로썸 게임이 되기도 한다. 수렵 채집민이 독초를 구분하고 고래를 고래학자 수준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친절하게는 아니라도 보여주거나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면 혼자서 그동안 내려온 지식, 정보를 터득하기란 어렵다. 아무리 살기 위해서, 아니면 관심을 기울이려고 해도 함께 사는 이들이 꿍쳐두고 자기만 먹거나 다른 유인원들에게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거나, 못한다고 내버려둔다면, 피전승자가 잘 배우기는 어렵다. 사람이나 유인원이나 마찬가지다. 학습의 전제조건은 ‘관용’이다. 일본 원숭이는 서캐를 잡는 요령을 나이들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족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즉 그 집안 분위기에 따라 숙달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일부러 집단에서 어미 등 전승하는 자가 천천히 재연하거나, 다시 재연하거나, 자세를 교정해 준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문화를 전수하는 과정은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 나의 등은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 나의 등을 긁어주었을 때 상대도 이런 감정이면 좋겠다는 통찰, 감정 이입의 과정이 있어야 남의 등을 긁어주게 된다. 인간이나 유인원이나 관용을 베풀고 감정이입을 잘 하는 사람을 집단에 두고 싶은 것은 매한가지이다.
쓸모와 관심
쓸모와 관심은 완전히 구분되는가. 아닌 것 같다. 중첩되는 영역이 많은 것 같다. 앞서 살펴본 예에 따르면 관찰이라면 쓸모 여부부터 살펴보는 것은 나라는 직장인, 서구 유럽 식민주의자들이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린 아이이고, 쓸모와 관심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수렵 채집민, 원시 부족, 침팬지 등이다. 수렵 채집민, 원시 부족, 침팬지의 공통점은 인류의 본능과 맞닿아 있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직장인도 잘 살펴보면 지금도 쓸모뿐만 아니라 관심으로 관찰을 하고는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세계 최강으로 딱딱한 기름야자 열매 껍질 깨기는 길게는 3년을 연습해도 깨지를 못하는데도 어린 침팬지는 ‘조금도 기세를 누그러뜨지 않고’ 계속 한다고 한다. 열매 조각 하나도 얻는 것이 없이 말이다. 어미와 흉내 내는 ‘놀이’에 가깝다. 아이들이 지치지도 않고 집중해서 노는 모습과 침팬지가 어미를 계속해서 흉내 내는 놀이는 유사하다. 당장의 보상이라는 목적이 없어도 순수하게 사회 감정적인 관점에서의 모방이 있는 것이다.
알고 싶은 마음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어릴 때 아버지의 책장에 꽂힌 5.18 광주민주화항쟁 기념 사진첩에서 발견한 사진 두 장을 이야기했다. 한 장은 계엄군에게 희생된 참혹한 시신 사진이었고, 또 한 장은 총상자들을 위해 헌혈을 하려고 병원 앞에 사람들이 줄을 끝없이 서 있는 사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두 개의 사진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인간이란 이토록 참혹하게 폭력적이면서,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집에 머물지 않고 나와서 피를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양립할 수 없는 숙제 같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진 속 서로 다른 인간에 대한 감정이입이 만든 관심이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었다. 동물, 원시 부족, 사진 속 사람들에게 아픔이 전해져오고, 애정이 생기는 감정이입이 되어야 관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