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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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관찰, 세상과의 연결(6)
인류학을 나눌레오(6)/241112/강평
관찰, 세상과의 연결
동물원 가는 길, 미술관에서
동물원 답사를 가던 길이었다. 세미나지기인 오선민 선생님께서 미술관 티켓을 사오셨다.동물원 옆 미술관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전시 안내문을 보셨다고 한다. 이렇게 동물원 입장 전 미술관을 가게 되었다. 당초 계획상 보려던 것은 동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게된 것은 미술관에서의 ‘나의 시선’이었다. 그 시선은 목표를 향해 뻗은 고속도로 같았다. 미술관에서는 ‘연결’을 주제로 대안적 건축 58채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는 의뢰인인 건축주의 가족 구성과 취향을 고려하고 밖의 하늘, 나무, 주위 다른 건물, 이웃과도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전시실 초반 5채쯤 보고 있을 때였다. 나는 대뜸 “저런 건물은 환가성이 없어, 팔 때 건물에 들인 설계비, 건축비는 매몰 비용이라 회수 못해”라고 내뱉었다. 확신에 찬 ‘빠른’ 판단이었다. 5채를 봤을 뿐이고, 아직 볼 집이 53채나 남아 있었다. 더 볼 필요 없다고 왜 그렇게 빨리 판단했을까. 업무적으로 ‘견적’을 내는 일을 많이, 자주 한 탓일까. 나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견적을 내고 있었다. 미술관 전시물까지도. ‘주위와 어울리는’ 건물이라는 전시회의 취지와 ‘환가성’이라는 나의 판단은 다른 카테고리의 이야기이다.
우연히 들른 것이 아니라 미술관이 애초 목적지였다면 사정이 조금 달라졌을까. 동물원을 관람할 시간도 짧은데, ‘예상 밖’ 미술관이 끼어들었던 것이 빠른 판단에 한몫했던 것은 사실이다. 가뜩이나 몇 시간 만에 동물의 무엇을 볼지 감도 잡히지 않은데, 그나마 시간도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몸은 미술관 5/58 지점에 있었지만 마음은 58/58 도착점에 있었다. 아니, 이미 동물원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동물원을 가게 된 것은 정답이 없다고 말하는 인류학을 공부하고, 동물에 대한 책을 읽다가 생긴 일이었다. 즉, 동물원 답사는 어쩌다 하다보니 가게 된 일정이었다. 동물원 답사 그 자체가 효율을 중시하는 나에게 경로 이탈이자 한눈팔기이다. 하지만 나는 그 한눈팔기에서도 직선으로 가는 코스를 찾고 있었다.
이번 시즌 세미나를 하면서 프란스 드 발, 레비스트로스, 말리노브스키라는 학자들의 관찰 대상에 대한 사랑, 몰입에 경이로워했다. 동물, 수렵 채집민들의 관찰 이유가 먹고 살고 관계 맺는 생존과, 지적 호기심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미나, 답사라는 정해진 경로가 아니라 답사 전에 우연히 들른 곳에서 비로소 관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목표를 향한 효율, 즉 인풋과 아웃풋 계산이 빠른 생존 환경에 살고 있다. 나는 내가 관찰의 이유를 필수적인 것과 부가적인 것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필수는 사회 생활을 포함한 먹고 사는 일이다. 부가되는 것은 먹고 사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테면 지적 호기심이다. 하지만 관찰의 이유를 필수와 부가로 위계 지어 이분할 수 있을까. 원시 부족은 내가 부가라고 생각했던 영역까지를 관찰 이유로 통합해서 사고한다. 반면 나는 필수와 부가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 영역의 구분은 내가 연결된 영역이 어디까지인가, 어디까지를 상관관계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 상관관계의 범위에 따라 관찰을 알고 싶은 것이 늘어나는 관찰과 더 알 것이 없는 관찰로 나눌 수 있다.
실용/비실용 이분법에 대한 재고(再考)
관찰은 왜 할까? 관찰 대상을 알아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아니면 관찰 대상이 그냥 궁금해서? 거미가 거미줄을 치려면 거미로 태어났다는 본능만으로는 부족하고 모방과 학습이 더해져야 한다. 인기 스타 푸바오도 판다로 태어났다고 바로 나무에 오를 수 없다. 엄마 아이바오를 관찰하고 따라한다. 선사시대 수렵채집민이나 원시 부족도 엄마를 관찰한다. 관찰은 모방을 통한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관찰의 이유는 생존뿐만 아니라 지적 호기심이 뒤섞여 있다. 관찰은 당장의 생존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집단에서 퇴출되지 않도록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하고 지적 호기심으로도 한다. 동물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관찰의 이유는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과 지적 호기심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관찰의 이유를 편의상 나눌 수 있지만, 어디까지가 먹고 사는 필요이고, 어디서부터가 지적 호기심인지 그 경계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현대인이나 원시 부족이나 관찰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하지만 현대인은 원시 부족 대비 돈이라는 하나의 필요에 편중된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직장인이 주로 관찰하는 것은 부동산과 주식 시세이다. 생존 환경에 따라 관찰 대상도 다르다. 하나의 필요가 강조되면 지적 호기심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여유로운 사람 또는 전문학자들만의 부가적 영역으로 별도 분리된다. 원시 부족의 양상은 좀 다른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원시 부족이 동식물에 대해 관찰하고 종별로 수없이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이 ‘쓸모’란 실용 차원뿐만 아니라 ‘관심’이란 지적 차원에서도 관찰했다고 말한다. 말리노브스키도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서 쿨라 교역이 단순한 실용성이나 이윤의 계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의례라고 했다. 현대인들은 원시 부족이 생존을 위해서 동식물을 알아야 했다거나, 카누를 타고 원양항해를 한 것은 자급자족이 어려워 교역을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자신들처럼 그들도 실용이라는 고정된 목표를 늘 염두에 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용과 비실용이라는 이분법은 현대인의 사고 체계 특징이다.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에서 드 발은 인간/동물, 문화/자연이라는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문화를 만약 포크, 나이프로 식사하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원숭이는 문화가 없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러한 정의는 인간만이 유일무이하게 문화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 정의이다. 드 발은 문화란 “타자로부터 얻는,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개는 구세대로부터 습득하는 지식과 습관을 의미할 뿐이다. 문화는, 같은 종이더라도 집단이 다르면 행동도 달라지는 까닭을 설명해준다”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자연/문화로 무 자르듯 자르기보다는 원숭이가 자연에, 인간이 문화에 더 가까운, 스펙트럼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드 발은 생각보다 원숭이로 대변되는 유인원이 문화를 많이 가지고 있고(인간적이고), 반면 인간도 본능적인 면이 많다(동물적이다)고 말한다. 같은 논리로 노동/놀이를 구분하고 관찰의 이유를 실용/비실용으로 완전히 이분할 수는 없다. 즉, 돈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노동, 노동이 끝난 뒤 혹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놀이로 구분할 수 없다. 관찰의 이유를 이분법 양극단이 아니라 스펙트럼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알고 싶은 것이 늘어나는 관찰
레비스트로스는 원시 부족 중 피그미족이 엄청난 수의 식물, 조류, 짐승, 곤충의 종류를 식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하나하나의 습관과 행동에 관해 대대로 물려받은 지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주위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연구한다고 한다. 또 무슨 식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면 그 열매의 맛을 보고, 잎의 냄새를 맡고, 줄기를 잘라 관찰하고, 즉 오감을 동원해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그 서식 장소에 관해 검토하고 그 식물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언명한다고 한다. 또한 직접 쓸모가 없는 식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동식물의 수많은 명칭을 쉽게 열거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도 나뭇조각만으로도 나무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대단한 자연학 연구 집단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관찰의 이유를 실용과 비실용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들이 식물을 알아가는 과정은 교과서 진도처럼 정해진대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 ‘하다보니’ 더 알아야 할 것이 생기고, 더 알아보니 동물, 곤충과도 연결이 되는 방식으로 관찰 과정에서 다방면으로 분기한다. 이 부분은 드 발이 동물의 행동을 기대하고 예상한대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과 통한다. 드 발은 동물의 실제 행동으로부터 새로운 관찰과 발상을 이끌어내는 ‘폭넓은 방향 감각’을 말한다. 그는 과학의 위대한 진보는 기대대로 실현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발상이 기대와 ‘어긋날 때’ 생긴다고 한다. 계획은 틀어지고, 기대는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 길에서 계획과 생각은 계속해서 분기한다. 그러니 출발선에서 마지막을 계산할 수 없다. 고정된 사실이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시 부족의 수렵 채집 환경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사슴을 앞에 두고 숨죽이며 창 던질 기회를 노리는 사냥꾼을 떠올렸다. 사슴이라는 목표물과 사냥꾼을 직선에 둔 나만의 상상이었다. 생각해보면 사냥꾼이 놓인 상황은 눈앞에 사슴이 있는 것보다 곰인지 뭔지 모를 것 같은 존재의 소리, 흔적, 냄새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이라면 엄청난 두려움과 함께 눈, 귀, 코 등 모든 감각을 열어야 했을 것이다. 관찰은 시각에 국한되지 않고 공감각(共感覺)적이다. 사슴이 먹는 풀인지, 코끼리가 먹는 풀인지 알아야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동물의 흔적,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려면 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했을 것이고, 알기 위해서는 풀을 관찰해야 했을 것이다. 풀을 다 먹어보고 독성과 효능을 알기에는 위험성이 크다. 풀을 먹는 사슴, 코끼리를 통해서 알아야 하니, 이것만 봐도 풀, 동물, 인간은 엮여 있었을 것이다. 그들과 상관없는 대상은 드물었을 것이다. 만물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알아야 할 것은 계속 사방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목표가 고정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식물, 동물, 인간이 서로 얽히고설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 앞에는 알아야 하고, 알고 싶은 것이 천지로 널려 있었을 것이다.
더 알 필요가 없다는 관찰
원시 부족이 실용/비실용을 구분하지 않고 ‘폭넓은 방향 감각’으로 관찰하는 것에 비해, 나는 왜 가보지도 않고, 자세히 관찰하지도 않고,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것이 나의 생존에 더 적합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 나는 집은 지하철, 공원에 가깝고 편리한 아파트가 좋다, 모두가 자원의 희소성을 전제로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있었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니 다른 이도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출근하면 돈과 다다익선이라는 말을 주입식으로 들으며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락함, 안정감은 누구나 원하고, 여기에 도달하는 것이 능력이다, 시행 착오를 줄이고 시간 낭비 없이 검증된 방법으로 그곳에 우선 도착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원시 부족이 식물, 동물, 인간이 엮인 것을 일상적으로 보고 체감한 것과 나의 생활 환경은 매우 달랐다. 학원에서 경쟁으로 내몰리기 전 아이들은 실용보다는 호기심에 더 반응한다. 또 실용/비실용으로 자동 구분하는 나조차도 이익과 손해라는 계산된 세계에만 사는 것은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유년 시절만 해도 나는 닭을 집 마당에서 봤다. 어릴 때 시골에 살던 덕분이다. 닭이 왜 닭장이 아니라 마당에 풀어져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10마리 이상이 닭 모이를 쪼고 지들끼리 싸우느라 파닥파닥 지면 위를 날아오르기도 했다. 소가 여물을 먹고 있었고 돼지 우리 안 돼지 소리가 엄청 컸던 것도 기억난다. 뒷마당에는 키 큰 감나무와 깻잎, 고추, 상추가 자라고 있었다. 대문을 열면 황금색 벼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 동식물은 이제 내 눈앞에서 모두 사라졌다. 동물은 혐오시설로 분류된 돈사, 우사에서 길러지다 도축장, 식육 코너로 간다. 과수는 관리와 수확이 편하도록 인간의 키높이에 맞춰 위가 아니라 옆으로 자라도록 조정되었다. 그 동식물들은 상품이 되어 새벽 배송 박스에 담겨 냉장고에 들렀다가 식탁에 차려졌다. 동식물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관찰할 대상과 관찰을 시작하는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소비를 위한 돈뿐, 인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에 업무상 무관한 지인이 나에게 들기름 한 병을 선물했다. 깨 농사를 짓던 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평생 사무직에 종사하던 그 지인이 주말에 지방을 오가며 농사를 마저 짓느라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들기름이 내 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요리를 잘하지 못해서 나물은 못해먹고 양푼 비빔밥을 할 때마다 호사스럽게 들기름을 듬뿍 넣고 있다. 들기름 비빔밥을 먹을 때마다 깨 농사를 지으러 오가는 그의 발걸음과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노동과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밭에 내리쬐는 햇볕과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추석 내가 고객들에게 선물했던 백화점 참기름 세트와 달리, 그 들기름에는 들깨와 지인과 내가 연결되는 ‘서사’가 있었다. 나의 백화점 참기름 세트에는 내 마음속 계산서도 함께 전달되었을 것이다. 지인의 들기름에는 서로의 관계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 계산되지 않는 사이는 계산되는 사이와는 다른 감정 이입이 있다. 내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 애써 준 이들에 대한 ‘연결’을 자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서사가 끊어진 상품으로 오기 때문이다.
효율에 편중되면 관찰할 수도 있었던 것을 너무 많이 놓치게 된다. 다 안다는 생각은 내가 보는 세계가 전부라는 편협한 생각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더 알 것이 없다는 권태에 빠질 가능성이다. 하나의 정답, 낭비 없는 직진 코스는 이렇게 새로운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는 권태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원시 부족의 알아야 하고, 알고 싶은 것이 가득한 세계와 대비되는 사회이다.
나는 미술관에서 내가 관찰의 이유를 실용/비실용으로 이분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술관 초입 5채만의 빠른 판단에는 전시회가 나와 상관없다고 여긴 마음이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상관’을 따지는 마음이 올라왔다. 왜 이렇게 글이 되지 않나, 내가 왜 날씨도 좋은데, 몇 주씩 앉아서 이러고 있나 답답했다. 괄호에는, ‘먹고 사는 일도 아닌데’라는 문장이 있었다. 나의 삶과 특별히 상관없는데, 부가적인 일로 이럴 일인가라는 마음이었다. 원시 부족은 먹는 것과 아무런 관련 없는 것을 관찰했다. 생각해보면 그 관찰 대상이 자신의 삶과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면 관찰은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찰의 필수/부가 영역 구분은 나와 상관 있느냐, ‘연결’되느냐에 있다. 상관관계와 연결을 넓게 이해할수록 관찰의 폭은 깊어진다.
계속 놀아보겠습니다
미술관에서 나는 5채에서 관람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관람했다. 일행들과의 단체 관람이라 혼자 먼저 동물원에 갈 수도 없었다. 또 티켓을 구매한 오선민 선생님의 성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람을 이어간 이유는 보다보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58채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다른 58채였다. 나무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나무 종이 다르듯 전시된 집마다 사연이 다 달랐다. 그 전시회의 주제는 ‘연결’이었다. 특히 김광수 작가의 <베이스 캠프 마운틴>이 인상 깊었다. 저예산으로 컨테이너를 주재료로 만들어 북한산 자락 이웃들과 ‘연결’하는 베이스 캠프로 탈바꿈한 사례였다. 그 집의 건축주, 설계자라고 건축비 등 ‘돈’을 떠날 수 있거나, 내가 우려했던 환가성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다만 가치의 무게 중심이 실용에만 집중되지 않았을 뿐이다. 가치의 우선 순위가 돈이 아니라 관계와 연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집은 상품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공간’이었다.
아무리 하나의 정답 찾기에 길들여진 나라도 인문세에서 공부하다보면 경로를 이탈하고 한눈을 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우연히 들어선 길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다. 왜 가던 길에서 자꾸 벗어나냐면서도 못이기는 척 따라가냐고? 무리 틈에서 끼고 싶으니까. 힘들 때도 있지만 그들과 노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덕분에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 알고 싶은 길이 늘어나는 길을 걷고 있다. 관찰은 세상과의 연결이다.
세계 최강으로 딱딱한 기름야자 열매 껍질 깨기는 길게는 3년을 연습해도 깨지를 못하는데도 어린 침팬지는 ‘조금도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계속한다고 한다. 열매 조각 하나도 얻는 것이 없이 말이다. 어미와 흉내 내는 ‘놀이’에 가깝다. 아이들이 지치지도 않고 집중해서 노는 모습과 침팬지가 어미를 계속해서 흉내 내는 놀이는 유사하다. 당장의 보상이라는 목적이 없어도 순수하게 사회 감정적인 관점에서의 모방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도 딱딱한 열매 껍질 깨기가 있다. 함께 인류학 책을 읽고, 답사 가고, 답사 후기를 쓰는 일이다. 왜냐고? 나의 시선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기 위해서 혹은 더 나아가 갇힌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니다. 그냥 하다보니 하고 있다. 어린 침팬지처럼 다른 사람들이 3단 콤보를 하는 것을 잘 따라해보는 ‘놀이’ 중이다. 그러다보면 알게 되는 것도 있고, 없어도 상관없다. 보상으로서의 열매 조각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무리 틈에서 관찰하고 흉내내기를 ‘계속’하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일이다.
과천 동물원에서 경로 이탈에 당황하던 내가 갑자기 기꺼이 경로 이탈을 자발적으로 하는 일, 자주 한눈을 팔고 시야를 넓히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경로 이탈을 하고 한눈파는 사람들 틈 속에 계속 있을 것이다. 나는 경로 이탈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이탈해서 길 헤매기를 하며 짜증을 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무리들 틈에서 ‘조금도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계속’ 놀며 관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