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우.세.소] 역할에 충실한 생명 그리고 자연학
2년 전 시작한 자연학 공부로 내 주변의 생명이 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이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린다. 봄이면 금세 담벼락을 채우는 담쟁이를 보면서 막연히 자리 잡는 속도가 빠르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들이 뚜벅뚜벅 매일 열심히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종종 숲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소리가 딱따구리의 나무 뚫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게 뭐라고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다. 쉬지 않고 똑같은 속도로 걷는 것, 일정한 속도로 나무에 구멍을 낸다는 것이 나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을까? 자연학책을 보니 아주 많은 생명이 저마다의 속도와 방법으로 길을 찾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채로운 그들의 세상을 엿보다 보면 나는 이 커다란 우주에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그 우주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로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알던 것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자연학 공부가 주는 기쁨이 있다. 지금 나는 텃밭에 풀들이 나와 같은 우주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잡초가 아닌 고유한 그들의 이름을 생각한다.
몇 가지 단순한 이유로 자연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혀 모르고, 알고 싶어 한 적이 없던 분야였다. 모르면 알고 싶어 할 수도 없었다. 매일 공기를 마시고 물로 세수를 하고, 밥을 지으면서 자연은 나와 거리가 먼 다른 세상처럼 느끼며 살았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친구들과 책이라도 같이 읽으면 뭐가 조금 보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이 따로 없고 아는 만큼 발표해야 한다는 데, 발표 울렁증이 있는 나로서는 조금 걱정이 앞섰지만 글쓰기 숙제가 없으니 발표만 용기내보자며 신청했다. 같이 공부하자고 옆구리를 찔렀던 친구는 금요일에 바쁘다며 하차했고 나는 지금 반장이 되어 세미나를 이끌고 있다. 얼마 전 우리 세미나를 소개하는 코너에 올릴 글을 쓰라는 미션을 받았다. 덕분에 나도 그동안 세미나가 시즌별로 어떻게 진행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다양한 방식의 삶이 있다
자연학 세미나 첫 시즌은 <공생>을 주제로 시작되었다. 나는 자연을 생각할 때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자가 살아남거나, 남보다 더 강해서 포식자로 우위에 설 때 살아남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읽은 책 『마이크로 코스모스』에서 린 마굴리스는 생물이 서로 싸우며 진화한 게 아니라 서로 협력하면서 지구의 주인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마굴리스는 30억 년 전, 어쩌다 진핵세포 안으로 들어간 미토콘드리아가 처음엔 기생 생활을 했지만 나중에는 살 곳을 마련해준 진핵세포에게 막대한 에너지를 제공했다. 이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에너지와 서식처를 주고받으며 생존 시스템을 발전시킨 것이다. 상호부조의 생존 시스템은 세포 차원을 넘어 인류에게도 발견된다. 세라 블레퍼 허디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협동 번식, 공동 육아를 했던 사람들을 쫓는다. 이 책에 따르면 아프리카 어느 수렵채집민은 육아 지원이 가능한 무리를 따라 자주 이주한다. 그만큼 육아가 이들에겐 생존과 관련이 있었다. 어떤 부족은 결혼 후 처가에서 지내며 경험 없는 육아에 도움을 받고, 또 다른 부족은 친족이나 마을 사람들이 임시 엄마가 되어 준다. 저자는 대체 가능한 돌봄의 흔적들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전략적으로 돌봄을 제공하고, 조정하며 유연하게 진화했다고 말한다.
생명이 협력하면서 오늘날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에 좀 더 구체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보고 싶었다. 두 번째 시즌 <초록의 생명사>에서 공부한 식물들이 생존하기 위해 서로 돕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싸우는 식물』을 보면 식물들이 생존하기 위해 공생도 시도하지만 어떤 식물은 투쟁하고, 외롭게 고난을 이겨내고, 어떤 경우는 화학무기를 뿜어대거나, 독을 만들어 적을 쫓아내기도 한다. 손도 발도 뇌도 없는 식물들이 전략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엿볼수록 초록의 생명이 경이롭고, 우아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국화쥐손이(학명 Erodium Stephanianum)는 씨앗을 땅으로 박기 위해 모양을 드릴처럼 진화시켰고,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봉선화(학명 Impatiens balsamina)는 씨앗 주머니의 압력을 증폭시켜 주머니가 터지는 동시에 씨앗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게 만들어 번식했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잡초들의 생존 전략을 배우면서 우리집 텃밭에 그들을 떠올렸다. 작물에 영향이 있을까봐 혹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뽑아낼 때 나에게 그들은 식물도, 생명도 아니었다. 식물을 공부하고보니 그들도 각자 이름이 있고, 살기 위해 뽑혀지는 뿌리 아래로 수많은 씨앗을 남기고 오염된 땅을 복원시키기도 하는 결코 잡스럽지 않은 생명체였다.
전략적으로 살아내는 식물들의 인생을 관찰하다, 어떻게 그런 전략을 갖게 되었는지 생명의 긴 역사가 궁금해졌고, 처음 모습부터 차근차근 알아보고 싶어졌다. ‘이번엔 <진화>를 살펴보자’라는 마음으로 다윈을 찾았다. 처음엔 다윈의 『진화론』부터 읽을 계획이었지만 진화론이 요즘(?) 과학자들마다 다른 방식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중에 우리의 눈에 포착된 과학자는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22)였는데, 그는 대중이 과학과 연결되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과학이 결코 인간 삶과 무관하지 않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열정적으로 과학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다. 27년간 쉬지 않고 <내추럴 히스토리>(미국자연사박물관)에 에세이를 게재한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말했다. 굴드는 우리가 진화를 말할 때 교육용으로 자주 보는 ‘인류 진화과정 상상도’를 지적했는데, 처음엔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네 발로 걷던 영장류가 발전하여 점차 두 발로 걷다가, 그다음에는 무기를 들고, 오늘날 현생 인류의 모습으로 발전하는 순차적 도식은 나에게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직선적 · 단석적 세계관은 무의식적으로 인류의 진화를 진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나는 과거 열등하고 미개한 인류가 오늘날 완성된 인류로 도달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진화론을 살펴보면서 하나의 정답, 하나의 목적만 갖게 하는 단선적 세계관이 다양성을 못 보는 생각 방식이고, 종단에는 인종주의와 같은 위험한 생각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베트남, 중국 등 외국 사람들이 많이 산다. 나는 그들을 볼 때 순간순간 나와 다른 국적,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별개’의 사람들로 의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 깊이에는 나와 다른 그들을 우열의 선상에 놓지 않는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깊이 작동하는 편견의 늪이 있음을 공부를 통해 발견했다. 깊게 자리를 차지한 그 늪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견했다는 다행스러움과 동시에 세상에 다양한 생명, 다채로운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졌다.(굴드 문단은 ‘관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화’, ‘다양성’, ‘생명의 역사’등으로 내용 바꾸기)
생명들이 무한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무대, 지구에서 그 다양함을 더 포착해보자며 <돌덩이 지구> 시즌을 계획했다. 로버트 M. 헤이즌의 『탄소 교향곡』을 읽으며, 생각지 못하게 ‘생명’을 더 깊게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생명의 기원을 말하기 전에 우리가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한다. 생명이라는 어휘가 주는 인상으로, 우리는 대상의 우주적 가능성에 대해 놓치고 있다고도 말한다. 펄쩍 뛰는 개구리나 흔들리는 자작나무 등 보이는 것만으로 생명을 인식하기보다는 그들의 독특한 구조와 성분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흙은 육지와 바다의 견고한 토대인 탄소 결정체들로 채워져 있고, 탄소에서 태어난 불로 탄소는 전혀 다른 얼굴의 물질로 변신한다. 그에게 생명은 번식하고 성장하고 환경 변화에 대응하며, 참신한 자신의 속성을 진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들이다. 기온에 따라 달라지는 바람, 아래로 흐르는 물, 그것들에 깎여지는 돌도 모두 생명이다. 그 어떤 것도 홀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전체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로버트 M. 헤이즌은 자신이 주 연구 분야인 ‘탄소’ 기반 생명체에 중심을 두고 이 책을 서술하는데, 나도 어휘에 붙들리지 않고 생명에 대한 다른 정의를 할 수 있을까? 미토콘드리아는 살 집을 제공하는 진핵세포에게 에너지를 나눠준다. 식물들은 사람, 동물, 바람 등을 이용해 열심히 씨앗을 퍼뜨린다. 수렵채집민들은 우리집 애들, 옆집 애들을 같이 돌보며 부족의 명맥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생명은 각자 연결된 네트워크 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가 집에서 아이들 밥을 챙겨 먹여야 엄마지, 방안에서 책만 보면 엄마로서 산다고 할 수 없다. 또 나를 엄마로 살게 하는 것은 나 혼자 잘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잘 먹어주고, 쑥쑥 자라줘야 덕분에 괜찮은 엄마가 된다는 생각이 드니 웃음도 나고, 고맙기도 하다. 자연학 공부는 ‘다양한’ 생명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공부였다. 나는 그 다양함이 얼마나 광대한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공부할수록 모르는 그 세상이 더 커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계속 알고 싶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각기 다른 생명들을 관찰하며 내 편견에서 조금 멀어지고 꽉막힌 사람이 안되면 좋겠다.
스스로 만드는 세미나
자연학 세미나는 공부 방식에서 다른 세미나들과 차이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맡은 분량을 돌아가면서 발표한다. 발표를 위해 자연학책을 기준 삼아 관련된 다른 책, 유튜브, 인터넷 등에서 자료를 찾고 정리하여 프리젠테이션을 만든다. 꼭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발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 발표를 준비할 때 이 책의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하는 것은 세미나원 모두에게 중요한 임무가 된다. 좋은 선생님은 많이 알고 있는 선생님이 아니라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는 세미나 시간 동안 책에서 맡은 부분의 선생님이 되려고 애쓴다. 실력 있고 유능한 선생님을 초빙해서 배우면 더 좋을 것 같았는데(내용이 이해되지 않을 때 종종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직접 발표를 준비하는 학인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그래서 그런지, 발표하는 학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느껴진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손효현 선생님은 발표 끝에 늘 우리가 보는 책의 내용과 관련된 다른 책을 소개해준다. 공부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더 세부적으로 찾고 혹은 다른 관점을 찾아서 다각도로 관찰한다. 나는 책 소개까지는 어렵지만, 발표를 준비하다보면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길 때가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을 따라 (인터넷 안에서) 멀리까지 다녀오게 된다. 안되는 영어, 일어를 번역해가면서 정보를 찾는다. 어느 때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데 이 과정 자체도 발표에 재미를 더한다. 권수현 선생님은 외국어와 친해서 자료 찾기는 단연 선수다. 언젠가 스티븐 제이 굴드의 『경이로운 생명』을 읽으며 약 5억 년 전, 바다를 품고 있는 산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캐나다 록키산맥의 버제스 셰일(Burgess Shale fauna)로 바다 생물 종이 대폭발한 시기인 캄브리아기의 화석이 대거 발견된 곳이다. 학인들은 책을 읽으며 이 산에 가서 직접 화석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권수현 선생님은 우리의 말에 금세 검색하더니 버제스 셰일 사이트를 단톡방으로 보내주었는데, 캄브리아기 바닷속에 들어온 것처럼 3D로 재현해 둔 수많은 생물들, 그리고 현재 화석의 모습을 공부할 수 있었다.
자연학은 궁금한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 나선다. 이번 시즌에 합류한 이현주 선생님은 발표는 떨리지만 직접 준비하고 공부하면서 자연학 세미나의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앎을 숙지하고 어떤 방법으로 전달할지 스스로 길을 찾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선생님이 떨린다는 말에 백번 천번 공감했다. 처음엔 나도 발표 시작과 함께 진땀이 나고 공부했던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등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몹시 떨리고 울렁증이 있다면 수행 차원으로도 참 좋은 공부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즘 내년 시즌을 고민한다. 생명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좀 더 알아볼까? 그렇다면 동물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지 식물, 공기, 원소 등 어떤 차원으로 접근하면 좋을까? 가을 숲을 이룬 나무들, 로드킬 당한 동물 주위에 모여있는 까마귀들, 따뜻하게 내리쬐는 태양 등 눈에 띄는 대로 연구대상 후보에 올랐다. 이런 질문을 들고 다니던 중에 오선민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다 바람에 대해 공부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바람의 율동, 날씨의 기분을 살펴봐야겠다. 우리는 그때 또 무엇을 알게 될까? 세상은 지금과 또 어떻게 다르게 보일까? 조금 더 잘 보려면 암기 공부가 필요할 수도 있다. 이번 시즌 초기에는 주기율표를 외우자며 주기율표송을 부르고 지질연대표를 암기하려고 시도했는데 앎이 몸에 착착 붙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몸에 착 붙을 때까지 해보는 것뿐이다.
<읽은 책들>
○ 로버트 M. 헤이즌, 『지구 이야기 : 광물과 생물의 공진화로 푸는 지구 이야기』(뿌리와 이파리)
○ 린 마굴리스, 『마이크로 코스모스』(김영사)
○ 스티븐 제이 굴드, 『판다의 엄지』(사이언스북스)
○ 세라 블레퍼 허디,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 : 상호이해의 진화적 기원』(에이도스)
○ 데이비드 몽고메리, 이수영 옮김,『흙』(삼천리)
○ 이나가키 히데히로, 박유미 옮김,『싸우는 식물』(더숲)
○ 소어 핸슨, 하윤숙 옮김,『씨앗의 승리』(에이도스)
○ 레나토 브루니, 장혜경 옮김,『식물학자의 정원산책』(초사흘달)
○ 스티븐 제이 굴드, 홍욱희 · 홍동선 옮김, 『다윈 이후(Ever Since Darwin)』(1977)(사이언스북스)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옮김, 『원더플 라이프(Wonderful Life)』(1989)(궁리출판사)<구판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옮김,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1981)(사회평론)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명주 옮김, 『플라밍고의 미소(The Flamingo’s Smile)』(1985)(현암사)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 손향구 옮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Leonardo’s Mountain of Clams and The Diet of Worms)』(1998)(세종)
○ 도널드 R. 프로세로, 김정은 옮김, 『지구 격동의 이력서, 암석25』(뿌리와이파리)
○ 요시다 다카요시, 박현미 옮김, 『주기율표로 세상을 읽다–우주, 지구, 인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해나무)
○ 로버트 M. 헤이즌, 김홍표 옮김, 『탄소 교향곡』(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