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길가메시 서사시] 영생의 비밀,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길가메시 서사시』
영생의 비밀,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2024.7.8. 최수정
“할라프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선사시대의 끝을 가리킨다. 이후 우르크가 이어지고, 최초의 문자 흔적도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1000년이 흐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스티븐 마이든, 성춘택 옮김, 『빙하 이후』, 사회평론아카데미, 540쪽)
『빙하 이후』를 읽으면서도 ‘빙하 이후’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으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갑작스런 기후변화에 따라 빙하가 녹아 내리면서 인류는 ‘대홍수’의 재앙을 맞았다. 넘치는 물은 대평원을 잠기게 하고 평야를 호수와 늪으로 만들어 버렸다. 방대한 영토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인간과 동식물 집단이 사라졌다. 급격한 기후변화에서 기존 기후 환경에 잘 적응하고 오랫동안 습관화되어 있었던 종들은 멸종에 이르렀다. 당면한 문제에 따라 적극적으로 식량과 습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종들이 살아남았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배경이 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는 평원지대도 ‘대홍수’의 피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지역이 생태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흙으로 변했고, 새들이 내려앉을 곳이 없었다. 질병 확산의 이상적인 조건도 만들어졌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인간 집단은 생존을 위해 식량을 바꾸고 환경을 바꿔야 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야기된 정신적 충격은 사상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끼쳤다.
자연의 힘을 두려워하게 된 수메르인들은 흙으로 변한 사람들을 살려내듯이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성벽을 올렸다. 또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홍수를 막기 위한 토대를 구축했다.
길가메시는 수메르 도시국가 우르크 제1왕조의 5번째 왕이었다. 대홍수 이후 약 4700년 전까지 키쉬에서 우르크로 이어진 수메르 도시국가에서는 길가메시를 포함하여 벌써 28명이나 되는 왕이 왔다가 사라졌다. 길가메시는 ‘비밀스러운 것을 보았고, 감추어진 것을 발견했네. 그는 대홍수 이전 이야기를 안고 돌아왔네’(엔드류 조지 편역, 공경희 옮김, 『길가메시 서사시』, 현대지성, 25쪽)
길가메시 신화는 ‘모든 것을 본 사람’을 기록했다.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수메르인 우타나치쉬티가 깨닫게 된 심오한 인생의 지혜. 수메르의 왕 길가메시가 이 세상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낸 지혜는 무엇일까? 심연을 보고 온 자가 석판에 새긴 이야기를 듣고 후대인은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인 몸으로 홍수가 휩쓸어버린 신성한 곳을 되돌려놓은 자는 대홍수로 파괴된 신전들을 복구하고 사람들을 위해 세상 의례들을 마련했다. 하지만 쌍둥이 형제와도 같은 엔티두의 죽음을 겪고, 영원한 생명을 찾아 세상을 탐험하다 강력한 힘을 뚫고 ‘머나먼 자’ 우타나치쉬티에게 닿았다.
백성들의 하소연에 아누 신은 힘세고, 걸출하고, 수완 좋고 강력하지만, 무자비한 야생 황소 였던 그를 대적할 자, 엔키두를 창조했다.
“아루루 여신이 진흙 한 웅큼을 떼어 야생에 던졌네. 그녀는 야생에서 엔키두를, 영웅을, 니누르타가 힘껏 치댄, 침묵의 자녀를 창조했네”(엔드류 조지 편역, 공경희 옮김, 『길가메시 서사시』, 현대지성, 30쪽)
엔키두는 야생에서 사냥꾼이 놓은 덫을 들어내고, 동물들을 풀어주던 그에게 여자가 나타난다. 매춘부 샴하트는 그를 문명으로 이끈다. 마치 『빙하 이후』에서 ‘젊은 여성은 농경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믿으며 기꺼이 수렵채집 생활을 버리고자’(『빙하 이후』, 505쪽)했던 것처럼 여성에 이끌려 ‘백성 위에 야생 황소처럼 군림하는 곳으로’ 향한다.
‘대홍수’를 겪은 인류는 비밀스러운 자연의 힘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 숲의 정령 ‘훔바바’, 그의 목소리는 대홍수요. 그의 말은 불이요, 그의 숨결은 죽음이라! 길가메시는 포악한 훔바바를 베어 그가 싫어하는 사악한 것을 땅에서 섬멸해야 할 사명감을 느낀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삼나무 숲의 홈바바를 죽이고, 하늘의 황소까지 죽인다. 그러나 이들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엔키두가 죽는다. 엔키두의 죽음으로 길가메시는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길가메시는 영생의 비밀을 얻기 위해 멀리 간다. 머나먼 자 우타나피쉬티를 찾아간다. 우타나피쉬티는 신의 말을 들으며, ‘전망’을 보는 자였다. 다른 존재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빙하 이후’에 살아남은 인류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상을 위한 정신적 재건에 힘쓰며 신의 말씀을 듣고 영생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