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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류학

 

 

<길가메시 서사시> 죽음의 보편성

작성자
borngag
작성일
2024-07-08 17:27
조회
204

길가메시 서사시/240709/강평

죽음의 보편성

 

심연을 본 사람

때는 기원전 약 3000, 공간은 수메르 땅 고대 도시국가 우루크, 주인공은 길가메시 왕이다. 길가메시는 심연을 본 사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불멸의 삶에 대한 열망하고, 모험과 고통 끝에 유한한 삶이라는 심연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길가메시는 각종 건축 공사를 하느라 폭군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숲을 수호하는 삼나무를 쓰러뜨려 신전을 장식하는 거대한 문으로 만들고, 천상의 황소를 무찌르던, 뭐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막을 자가 없을 것 같은 미성숙한 자였다. 그러던 그는 미성숙에 대한 벌로 아끼던 친구 엔키두가 죽고 나자, 슬픔에 일주일을 통곡하고 매장하지 않은 시신의 코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것을 본다. 죽음은 삶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고, 죽은 자는 말 대신 코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것으로 죽음을 보여준다. 이를 보고 길가메시는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현타가 온다. 길가메시는 유한한 삶이 아닌 영생을 꿈꾸게 된다. 산 넘고 물 건너 외딴 섬 현자를 찾아 갖은 고생하는 것은 미성숙한 자로서 거침없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진, 구도자의 모습이다. (현자를 찾아 먼 길을 떠난 모습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친구 하쿠를 살리기 위해 편도 티켓으로 아주 긴 길을 떠나 제니바를 찾아간 것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구도의 길에서 제 버릇을 남 주지 못해서 석상을 깨부시기도 한다. 깨달음은 어렵다.

영생을 얻고자 일주일간 잠을 자지 않는 미션에 도전하지만 실패, 두 번째 도전은 불로초를 구하는 것으로, 이번에는 성공,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뱀이 불로초를 가져가고 길가메시는 불로초가 있는 곳을 기억하지 못해 최종 미션에 실패하고 만다. 길가메시는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불로초를 결국 얻었을 것이라 후회하지만, 애초에 잠을 자지 않거나, 불로초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가능할 것 같지만 역시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될뻔하든, 가까스로 잡았다가 놓친 것이든, 미련과 아쉬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실패할 운명의 미션이다. 그는 도전에 실패함으로써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던 미성숙한 자에서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가 된다.

길가메시는 폭군일 당시 일꾼들의 고통과 원성을 듣고도 그들의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자신도 일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키두가 죽자 그의 죽음은 곧 자신의 운명이 될 수 있음을 느낀다. 노동의 고통은 누군가 피할 수 있지만, 죽음은 보편적이기에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한편 삼나무 숲을 점령하러 가자고 앞장선 것은 엔키두가 아니었는데, 왜 신들은 벌로 길가메시가 아닌 엔키두를 죽였을까? 아마도 가까운 자의 죽음을 겪고 자신의 유한한 삶을 느낀 뒤, 영생을 열망하고 또 실패해야 심연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봐야 살아 있을 때라는 한정된 조건에서 이것저것 해보는 것에 불과하다는 깨달음말이다.

 

왕의 등장

빙하 이후시즌 마지막 회 텍스트는 왜 길가메시 서사시일까? 아마도 빙하 이후가 막 끝나고 시작되는 달라진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빙하 이후> 사회를 환기하고자 함이 아닐까. 빙하 이후>는 문자와 국가가 등장하지 않는 사회이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로 부채를 기록하는 숫자였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숫자가 아닌 문자이고, 부채 장부가 아니라 실존했다고 알려진 왕의 성숙기이다. 배경은 사회 규모가 훨씬 커진 도시국가로 왕이 지배한다. 빙하 이후비교적 수평적 사회와 달리 수직적 사회이다. 어떤 사회이든 죽음에 대한 슬픔, 두려움, 상실, 애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빙하 이후는 장례 의식을 통해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 육신을 떠나보내면서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 같다. 길가메시는 보편적으로 삶 이후라면 모두가 갈 수밖에 없는 다른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영원히 살고자 하는 한 사람특별한열망을 꿈꾸고, 도전하고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최초의 문자는 부채 장부에 적힌 숫자이고, 최초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 주제이다. 문자 이전 사회는 문자 이외의 유물 즉, , 돌이 전하는 세계로서,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구전되는 신화로 짐작할 수 있다. 신화는 특별할 것 없는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의 대칭성을 주제로 한다. 반면 길가메시 서사시는 한 영웅의 특별한 경험을 다루고 있다. 축의 시대의 부처도 왕자라는 특별한 신분으로서, 시장에 나와 생로병사를 겪는 인간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떤 시대나, 빙하 이후를 포함해서 보편적이다. 최초로 기록된 이야기가 죽음에 대한 보편성이라면, 빙하 이후> 사회의 기록되지 않고 구전된 이야기도 이 주제가 포함되어 있을까, 아니면 죽음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는 기록된 사회의 특수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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