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미니 에세이] 벽돌에 갇힌 사자와 나
빙하 인류학(25) / 미니 에세이 2 / 2024.07.15 / 손유나
벽돌에 갇힌 사자와 나
청금석 라피스라줄리로 색을 내고, 유약을 발라 찬란하게 빛나는 벽돌 패널에 장식된 거대한 사자상을 보고 있다. 이 사자상은 기원전 600년경 번성했던 신–바빌리 제국이 벽돌로 쌓아 올린 웅장한 건축물의 일부이다. 제국은 여신 이쉬타르의 문으로 향하는 길에 벽돌을 쌓아 120구의 사자 부조로 장식하고, 이쉬타르의 문도 575구의 황소로 장식했다. 그 사자 벽돌 패널 2점이 한국 메소포타미아 특별전에 전시되었다. 여기저기 빛바랬지만 당시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 사자를 보며 경탄이 아니라 탄식이 저절로 나오면서, 그제야 세미나 <빙하 이후>를 따라 길잡이 존 러복과 함께 짧지만 긴 여정을 함께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 <빙하 이후> 초반에, 존 러복은 서기 7000년 경의 차탈회위크 마을을 방문한다. 그리고 곡물통 옆에 놓인 ‘앉아 있는 여인상’을 발견하고 악몽을 꾼 것 마냥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당시 존 러복이 놀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심히 지나쳤다. 하지만 이제는 러복이 그토록 놀란 이유를 안다. 이 여인상의 여성은 옥좌 위에 앉아 양옆에 자리 잡은 표범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다. 풍만한 가슴과 튀어나온 배가 구석기 시대의 전형적인 여인상의 특징을 보여주지만, 동물을 복속시킨 듯한 모습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구도이다. 차탈회위크는 계급이 없는 평등한 도시였다. 하지만 이 여인상을 보면 구석기 수렵채집민의 문화에서 신석기 문화로 그리고 문명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인간이 동물과 세상과 그 속에서의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힘을 가진 존재의 변화
구석기 시기의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동물이야말로 역동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인류는 동물 가면을 만들고, 새의 깃털을 달고, 동물을 모습을 흉내어 춤을 추면서 동물이 되는 방식으로 힘에 접속하고자 하였다. 신비로운 영적인 힘이 생동하는 동굴에서 벽화에 그려진 존재는 사슴, 들소, 말 등의 동물이고, 인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따금 동물의 몸에 발은 사람인 걸로 보아 동물로 변신한 샤먼으로 추정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중석기에 접어들 무렵 동굴벽화에 인간 군집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했다. 전곡리 선사박물관에서 구석기 동굴을 재현해 놓은 공간을 걸으면서 동굴 속의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체험한 바 있다. 박물관에서 재현한 동굴에서조차 신비로운 힘을 느낄 수 있었는데, 실제 동굴에서 느낄 수 있었을 마법과 같은 영적인 힘은 인류를 고개 숙이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3층 메소포타미아 특별전에서는 인간이 권위 있는 존재이다. 어떤 왕의 두상에 대한 설명글에 “관만 바꿔 씌운다면 신과 왕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인간은 동물의 탈이 아닌 관을 쓴다. 신은 의인화된 되었고, 신과 닮은 왕이 위엄있는 자세로 조각된다. 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등장한 작품도 있다. 하지만 주제는 다르지 않다. 결투에서 패배하여 목에 베이는 사람, 바닥에 쓰러진 적군, 포로를 데리고 가는 병사, 왕은 찬송하러 온 사절단 등 영광과 승리로 가득 찬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물의 표현 또한 달라진다. 야생의 힘을 간직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해주는 힘 센 황소 혹은 정복되어 인간의 위엄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로서 등장한다.
2. 표현의 변화
예술은 상징성을 갖는다. 구석기의 비너스상은 거의 같은 모습이고, 메소포타미아전에서 본 왕의 조각상도 그렇다. 하지만 상징의 본질이 다르다. 구석기 시기의 예술은 존재가 가진 본원적 힘을 상징했다. 이 비너스 여신상과 저 비너스 여신상이 하는 모습은 달라도 같은 힘을 상징했고, 동일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왕의 조각상은 이 왕이 누구인지 특정하기를 원했다. 자신임을 밝히고 싶지만 위엄을 표현하는 방식이 정형화되었기에 그 사람의 고유한 특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자로 이름을 썼다. 왕의 두상 옆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통치자들의 ‘초상’은 개별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왕위에 오를 만한 자격으로 여겨지는 속성들을 조합해 완성하였다. 튼튼한 팔, 큰 눈, 얼굴을 뒤덮은 수염, 크고 윤곽이 뚜렷한 근육, 특정한 옷과 머리 장식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상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어느 왕의 상이라고 특정할 수 있도록 명문을 새겼다.”
동굴벽화와 비교하면 더 커다란 변화가 보인다. 동굴벽화는 한 동물의 그림 위에 다른 동물을 그리는 듯 겹쳐 그리거나, 뒤죽박죽으로 그려 넣었다. 게다가 동굴이라는 공간은 좁고 어둡기 때문에 누군가 봐주길 원했던 전시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 자체 보다는 ‘그리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다. 그에 비해 국가가 만들어낸 예술은 ‘보여주기’가 중요했다. 예술은 권력을 드러내는 방식이기에 대칭적이고 각이 잡혀 있다. 위엄은 보이지만 동작은 경직되어 있어 생동감이 없다. 이쉬타르의 사자를 앞에 두고 눈살을 찌푸렸던 이유 중 하나이다. 사자가 가진 충만하고 넘치는 생명력이 위엄이라는 단어에 갇혀버린 듯했다. 사자가 가진 위대한 힘을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다니! 정말 안타깝다.
3. 예술 목적의 변화
구석기의 예술은 공동체의 생존을 맨 앞에 두었다. 동굴에서 의례를 지내며 집단의식을 고취시키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문화를 공유한다. 함께 춤을 춘 집단은 서로 친척이며 어려울 때 서로 도울 것이라는 약속을 공유했다. 구석기라고 개인의 개별성과 차이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러 동굴에 표현된 사람들의 손바닥은 왜 표현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개체의 고유성을 드러내길 원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구석기 사람들에게도 부의 차이, 힘의 우위는 존재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무덤에 더 화려한 부장품이 등장하고, 자신을 과시하고자 실제 쓰지도 않을 간돌 도끼를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차지만 이 차이가 집단에서 고정된 위계를 만들어 집단의 평등을 깨뜨리는 정도까지 가지 않기 위해 정기적으로 의례를 지내며 교육했다.
하지만 국가는 자신의 권력을 시각화하여 다른 존재에게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예술을 이용했다. 메소포타미아전에서 본 작품은 하나 같이 ‘나는 위대하다!’고 외치는 듯했다. 강한자의 자기 과시 속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사라진다. 하지만 내가 위대한 만큼 다른 사람과 동물은 하찮은 존재가 되고, 잊히고, 생명조차 경시되지만 힘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언뜻 보면 구석기에서 문명으로 가는 과정이 인간 정신구조의 발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과 타인의 구분이 없이 세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는 신생아의 정신에서, 개인의 고유한 자아가 생기는 과정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른 존재를 짓밟고 위엄을 세우는 문화가 어찌 성숙한 문화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북미 원주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지금도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수렵채집민들의 사례로 힘의 중앙화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모두 똑같은 정신구조를 가진 인간이라면 우리는 구석기인과 마음을 가질 수도, 권력을 찬양하고 자신의 위대함을 세상에 과시하고자 하는 사람도 될 수 있다.
내가 몸담고 있던 문화가 얼마나 낯선 것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인식이 서야 다른 가능성을 탐구할 동기가 생기고, 다른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주어진 틀을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다. 힘들고 불편하다. 그래서 벽돌에 갇힌 사자를 마주 보고 묻게 된다. 반짝이는 벽돌로 조각된 몸, 자기의 중심에는 자신이 아닌 왕이나 신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경탄을 보내는 삶과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그래서 자신도 특별하지 않은 삶.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모든 불편함과 낯섦을 무릎 쓰고 이 벽돌을 깨고 나올 정도로 간절한지 말이다. 물론 벽돌 속에 갇힌 사자는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는다. 대답은 나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