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일상의 인류학

 

 

[반구대] _믿음, 실재를 보게 하는 힘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07-15 17:46
조회
213

『반구대』 기행문 

 

2024.7.15. 최수정

 

믿음, 실재를 보게 하는 힘

 

어제 내린 비로 세상이 깨끗이 닦인 것 같다. 울산역에 막 내렸을 때 비구름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 불안하던 하늘이 대곡천 앞에 다다르니 맑게 갰다. 비 덕분에 낮은 산을 굽이도는 강줄기의 수량은 풍부하고, 물줄기에도 힘이 넘친다. 하늘은 파랗고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구름은 천천히 어떤 형태를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고래 모양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은 얼마 전 댐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대곡천 물줄기가 태화강 본류에 가 닿았고, 태화강 물줄기는 바다로 이어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구불구불 아홉 굽이로 휘어져 흘렀다는 물줄기가 중간에 끊어지고, 구하도(Abandoned channel)-예전엔 하천의 작용이 활발히 진행되던 유로였으나, 현재는 하천의 유로 변화로 인하여 물이 흐르지 않고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지형, 즉 하천의 활동이 중단된 물길을 의미한다(반구대 자료집, 24)-가 되어 늪지로 변한 곳을 나무다리로 건너간다. 자연경관은 언제나 변하고 있다.

어디론가 점점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 갑자기 앞이 탁 트인다. 그리고 정면에 마치 여기 그림을 그려요라고 말하는 듯한 넓고 평평한 바위가 눈앞에 드러난다. 한동안 물에 잠겨 있었던 듯 아랫면이 진한 색을 띠고 있다. 조금 전까지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 나간 것 같다. 이곳에 바닷물이 넘실댈 때 바위에 그려진 고래들이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출렁 움직이는 모습이 상상된다.

우리가 세계를 느끼고 경험하는 방식은, 세계에 대해 품고 있는 믿음에 따라 달라진다. 무엇을 믿느냐가 다른 세계를 보게 하고, 믿지 않는 것을 볼 수 없게 한다. 믿음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혹은 어떻게 감각 할 것인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며 세계의 현현을 결정한다.

고대인들은 만물이 모두 삶과 죽음에 참여하고 함께 세계를 만들어간다고 믿었다. 만물과 함께 자기 삶의 범주를 넓혀가는 그들의 세계는 너무도 광활하고 무한하다. 나는 그 무한의 가능성 세계에서 그들이 손으로 구현해낸 장소에 와 있다. 그들의 신체가 감각하고 이해한 세계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의 내가 알아챌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여기 와서 경험하려 하는 것은 그 오래전 고대인의 감각 행로를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들의 살았던 경관을 떠올리며 지금 여기의 햇빛과 바람과 물소리와 나뭇잎들에 스며들어 있는 고대인의 형상을 떠올려 본다. 그로 인해 나의 믿음의 세계를 좀 더 확장해본다. 이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고, 그것을 보려고만 한다면 손으로 감각하는 것 같은 실재성을 느낄 수 있음을 믿어보고 싶다.

 

경관을 함께 만드는 존재

고대인들의 예술에서 거의 모든 시대에서 동굴 밖에 그려진 것들은 주로 강기슭이나 협곡을 따라 나타나거나 특정한 계곡에 위치해 있다. 접근이 어려운 곳이거나 어김없이 장관을 이루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이는 그림이나 암각화의 위치가 어떤 풍경을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찾은 반구대 암각화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바위에 새긴 그림이 손상되지 않도록 그림의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경사면과 지면, 천정 등을 선택하고, 빛의 각도에 의해 그림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극적 연출을 했다니 정말 놀랍다. 해설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오후 4시쯤 기울어져 가는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시간에 암각화의 그림이 가장 잘 보인다고 했다. 아쉽게도 우리가 도착했던 시간은 점심 전 시간이었다. 저물기 전 가장 강렬한 빛의 파장이 새김의 골을 메꾸며 서서히 암각화의 형상을 드러내는 장관을 상상해본다.

내가 공부한 대로라면 고대인들의 사고체계 바탕에 만물에 영이 있다는 애니미즘 사상이 있었다. 이 세계에는 만물에 깃든 영들이 적극적으로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영들의 적극적 세계 참여가 모든 활기를 만든다. 그리고 더 특별하게 땅, 나무, 바위, 동식물의 영이 형태를 옮겨 다니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장소가 있다. 특히 성스럽다고 느끼는 장소에는 장소가 지닌 힘과 행위성이 있으며 그 힘들을 공경하고 삼가는 한편, 이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고 싶었다. 그 안에 감추고 있는 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 너머의 세계로 접근 가능성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돌과 바위의 고유성과 힘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교류 방식으로 그들에게 연결될 수 있고 그들을 삶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돌은 살아있고, 살아있는 에너지, 예민한 느낌, 의식으로 충만해 있다. 그들을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은 저 예민한 살아있는 감각 속에 스며들어 섞이는 일이었다.

고대인들은 저 바위에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 믿지 않는 신비로운 형태와 형상을 드러내는 힘을 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바위 하나가 아니다. 바위를 둘러싼 동식물은 물론 물의 흐름 햇빛과 바람, 바위와 함께 생동하는 풍경, 혹은 그보다 더 큰 무언가와 접촉하는 힘 전부였다.

고대인들에게 경관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의미한다고 할 때 그들에게 경관의 범주는 정말로 광대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들의 세계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무한한 인지 공간까지 포함하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세계는 우리가 그에 반응하고 침투하고 이해하는 만큼 깊고 넓어진다. 그 세계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히 확장된다.

어떻게 하면 그들처럼 만물의 복잡하게 얽힌 형상의 출현을 설명하는 서사를 읽을 수 있을까. 암각화 앞에 서서 고대인이 느꼈을 감흥을 상상하면서도 나는 복잡성에 호응하는 눈앞의 전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몽환시대Dreamtime

빙하 이후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우주에는 두 측면이 있다고 믿는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보통의 물리적 세계와 몽환시대Dreamtime(꿈의 시간)’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몽환시대라는 신화적 세계에서 조상이 지형경관을 창조하고 지속적으로 사람의 일에 개입한다. 단순히 동물이나 사람, 기호를 묘사한 것도 조상의 행위와 관련된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빙하 이후, 379) 이들에게 현실의 세계와 꿈의 시간은 똑같이 실재적이다. 몽환시대의 이야기가 스며있는 상세하고도 광범위한 지리정보였다.

몽환 시대는 사람뿐만 아니라, 바위, , 동식물들은 모두 영이 있었다. 이들은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과 우주 만물 간의 관계에도 힘을 미친다. 이들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는 불가분의 관계로 뒤얽혀서 하나가 된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늘 몽환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암각화를 찾아 고요하고 숙연한 풍경을 통과하며 산길을 걸어 올라갈 때 오래전에 수천 년 전 누군가의 발걸음을 떠올려 본다. 산을 돌아 방향을 틀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기대하며 나아갈 때 발에 밟히는 흙과 나무 강물이 속한 시간을 생각한다. 수천 년 전의 시간이 이 장소에서 현재 내가 걸어가고 있는 시간과 뒤섞이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하는 느낌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한순간 아득한 곳에 이른 것처럼 멍해진다.

대곡리와 천전리의 암각화는 부감 기법이 주다. 특히 동물상을 그릴 때 그러한데 그림을 새기는 이가 하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이런 관점은 전체적으로 우주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시점이다.(반구대 암각화 자료집, 5) 어느 쪽이 위인지 아래인지 알 수 없는 시점은 만물에 영이 있다는 애니미즘세계에서의 샤먼의 시점이다. 샤먼은 다관점주의자로서 자기 위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시점을 오가며 관계를 보고 조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객관적시점과는 다르다. ‘객관주관이 전제된 개념이다. 고대인들의 다관점주의는 주관이나 객관이 상관없는 여러 종들 간의 깊은 상호연대와 상호침투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나를 중심으로 모든 사물에 위아래, 안과 밖을 규정하려고 하는 나의 시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형상을 창조하는 손

화가는 무릎을 꿇고 순간순간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마음속에 이미지를 떠올린다. 화가는 자기 숨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말을 만들어낸다. 화가는 말에 말을 걸고 노래를 부르고 네발짐승처럼 몸을 숙이고 종마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더 많은 점과 손도장을 남긴다. 말의 머리와 목은 검게 칠한다. 마무리를 지은 뒤 화가는 체력이 고갈되어 넋이 나간 듯하다.”(빙하 이후, 34)

스티븐 미슨은 마음의 역사에서 인류가 유동적 지능을 갖게 되면서 비유나 상징을 조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나는 석기를 다듬고 조각하며 연상작용을 통해 결과물을 완성하는 고대인들의 손이 생각난다. 고대인들은 떠오르는 생각을 손을 통해 구체적 물건으로 구현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돌을 관찰하고 만지고 느끼며 감각한다. 그리고 단단한 물질에 변형을 가할 때 느껴지는 감각을 인식한다.

맨 처음 돌의 물질성을 어루만지며 파편을 떼어내고 윤곽선을 만들어감에 따라 기대하던 형태가 드러날 때 그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나의 손끝에서 세상에 없던 물건이 탄생할 때 스스로 창조자가 된 것처럼 설레고 기쁘지 않았을까. 고대인의 창조적 예술 능력은 돌도끼를 제작할 때부터였다. 돌도끼를 만들던 손의 감각이 바위 그림이나 새김을 통해 자연의 형태를 강조하거나 덧붙이기도 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며 인류는 스스로 세계를 창조하는 의미를 생각했다.

돌도끼를 만들거나, 바위에 그림을 그리고 새길 때 우리는 모두 강한 몰입을 한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몰입에 빠져 본 경험이 있다. 나에게도 머릿속에 도안을 떠올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십자수를 완성했던 기억이 있다. 몇 날 며칠을 무언가에 몰입해 있는 상태에서 우리 자신을 느끼는 의식은 사라지고, 심지어 우리 몸 자체도 잊은 상태가 된다. 그리고 지금 자기 손으로 만나는 대상과 하나가 돼버리는 경험을 한다.

그때는 우리가 기도할 때의 마음 상태와 같아진다.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그것이 어떤 힘에 다다르면 현실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세계 형성에 스스로 힘을 가한 것 같은 신비감을 느낀다. 온 세계와 하나가 되는 기쁨이 온몸에 가득해지며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데 일조한 것 같은 만족감과 충만감이 든다. 없던 존재 하나가 나의 의도대로 눈앞에 드러남으로써 기존의 세계가 변해있을 때 일순간 세계가 내 앞에 확 펼쳐진다.

인류는 손을 통해 살아있고 생동감 있는 생명과 에너지로 가득 찬 세계계와 만나며 자기 밖에 있는 것과 안에 있는 것을 서로에게 스며들게 했다. 손으로 교류하는 물질성의 느낌을 기억하며 바위에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고, 새기고, 흔적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도 돌이나 벽면을 한참 바라보다 보면 그 미묘한 요철과 색의 변이 속에 어떤 형상을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약간의 선을 더해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고 싶을 때가 있다. 하물며 돌에도 영이 깃들어 있고, 그것들이 감각하고 생각하고 느낀다고 말하는 고대인에게 그 형상들은 진정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위나 돌 위에 남아 있는 특정한 형태나 구멍, 얼룩들이 수많은 얼굴로 보이고, 손을 맞잡아 꺼내주길 기다리는 형상들로 보였을 것이다.

 

고래와 인간이 함께 꾸는 꿈

대곡리 암각화에 가기 전 고래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는 <울산암각화박물관>에 들렀었다. 박물관 내부는 마치 고래의 뱃속에 들어온 것처럼 드러난 고래의 골격 모양으로 형상화된 천장이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그 천장 아래로 암각화에 그려진 동물의 형상이 흐릿한 불빛 아래 매달려 있었다. 고래 뱃속에서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흔들흔들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 같은 영들의 모습이랄까. 먹히기 위해 또는 먹고 살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오는 존재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그들처럼 고래 뱃속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방을 나가면 나는 고래에 잡아먹힌 피노키오처럼 고래 뱃속을 빠져나간 후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고대인은 주변 자연의 물리적 생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남는가가 관건이었다. 죽음이라는 문제,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을 무엇으로 표상할 것인가. 고대인들은 죽음 뒤에 있는 어떤 초자연적 힘을 생각했다. 죽음이나 꿈을 통해 머물던 신체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인격적 실체로서의 영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꿈속에서 사람은 고래가 되고 고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고대인에게 꿈은 실재하는 또 다른 세계였다. 꿈을 깨고 돌아와서 꿈속에서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이해하기 위해 무언가로 나타내 보이고 싶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한 마리의 고래가 세 가지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있다. 마치 바닷속에서 파도를 타며 살아가고 있는, 활기에 찬 모습이었다. 이 그림을 새기던 고대인의 몸짓이 떠오른다. 바닷길을 따라 대곡천까지 올라오는 고래와 한 몸이 된 듯 꼬리를 그릴 때는 손에 더 힘이 들어가고, 꼬리의 역동성을 그릴 때는 자기 몸도 따라서 출렁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 물소리가 한 몸이 되어 활기를 만드는 생성과 운동을 반복한다. 고래가 활기 넘치게 춤을 추는 동안 그림을 바위에 새기는 그 사람도 춤을 추고 있다. 모든 존재가 자연의 리듬에 스며들어 하나가 되고 있다.

<울산반구대암각화>박물관 한쪽에 대곡천 물길을 형상화한 공간이 있었다. 일렁이며 흐르는 물속에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들이 떠다니는 형상이 이어졌다. 물의 이런 정다운 환영은 꿈의 공간과 함께 이어져 있다. 그 안에서 흐르는 형상들은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었으며 무한 반복하며 흐르고 있다. 물은 흐르면서 계속 이미지를 바꾸고 불변성을 거부한다. 물 위로 흐르는 고래와 호랑이, 늑대, 거북, 사람, 가면의 형상은 물을 통해 유동하는 영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입구에서 보았던 하늘에서 내리던 영들과도 오버랩된다. 자신들 형상의 기억이 사라지고 사람이 거북이 되고, 고래가 사람이 된다.

 

잊혀진 믿음

고대인들에게 반구대 암각화나 천전리 암각화가 있는 장소는 그 자체가 이미 작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그 앞에 서 있으면 고대인들의 세밀한 조합능력이 느껴진다. 그들은 지금과 여기의 물리적 공간과 함께 인지 공간을 손으로 구현한 새로운 세계를 조합하며 끝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조합해낸 그 세계의 실재성을 의심 없이 믿고 있다. 지금의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그동안 인류가 걸어온 세계는 고대인이 살았던 세계와 너무나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그 세계는 너무나 오랜 시간 잊혀져 있었다. 수천 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신성시되었던 장소가 잊혀졌던 이유는 사람들의 믿음 체계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믿음이 달라졌다. 더 이상 만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 사라졌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도 사라졌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마음도 보기 힘들다. 더욱이 오래된 것은 진부한 것이고, 사라져야 한다는 진보주의 관념에 따라 오래된 것의 힘을 부정해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런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빙하 이후>를 읽으며 나는 수렵채집민의 생활상을 알아서 어쩌겠다는 건지 의문이 들었었다. 그러나 지금 <빙하 이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볼 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 책을 읽었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이 얼마나 드넓은 세계인식을 갖고 자기 존재를 거대하게 인식했는지 알아보며 고작 반경 내 몇 미터가 내 세계의 전부인 나를 발견했다. 인간이라는 자리, 개인이라는 위치에 고정되어 만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 깃들지 못한 내가 보인 것이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끝없이 걸었던 고대인들에게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은 매 순간 자기 감각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먹거리와 별미 식물들이 넘쳐났겠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굶어 죽던지, 동물 밥이 되던지 얼어 죽었을 것이다.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병이나 상처가 났을 때 적절한 치료 식물을 찾아낼 수 있는 자가 살아남았다. 만물에 주의력을 집중하고 관찰하며 그 연관성을 아는 것은 생존능력과 직결되었다.

만물이 연결된 관계성을 볼 줄 아는 것이 곧 생존능력이었던 사람들을 통해 나는 나와 만물의 분리된 관계를 본다. 만약 지금으로부터 약간의 환경변화라도 생긴다면 내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물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세계를 끊임없이 구성해가는 이 존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고대인에게 만물과 함께 자기 세계를 구성해나가는 법을 배운다. 보이지 않게 우리를 연결하는 절대적인 힘을 믿는 법을 알아간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