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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류학

 

 

[반구대]반구대의 신성함

작성자
진진
작성일
2024-07-15 17:57
조회
218

 

반구대의 신성함

 

<인문공간세종>에서 2024년 세 번째 답사,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떠났다. 이번 답사에서 우리가 들린 곳은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천전리 각석화’, 문무대왕릉 앞바다, 골굴사의 골굴암이었다. 네 답사지 모두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찾았던 곳으로, 속칭 영()발이 가득했던 영험한 장소들이다. 이중 문무대왕릉 앞바다는 무속인들 사이에 기도발이 센 곳으로 유명해 최근까지도 굿판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갔을 때는 경주시의 단속으로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제는 기도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문화재로만 다뤄지는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각석화와 아직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문무대왕릉과 골굴사, 사람들은 어떤 영험한 힘을 기대하고 이 곳들을 찾을까?

지금은 기도를 한다고 하면, 교회나 성당, 절과 같은 종교시설에 가서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소원하는 일을 비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 신은 인간이 태어나 자라면서 가족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 국가에 의해 습득되고 주입된 형상의 신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신을 믿어야만 꼭 기도를 하나 하면 그렇지 않다. 우리는 꼭 그런 모습의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아도, 종교가 없어도, 우리는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게 자신의 간절함을 의탁하곤 한다.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를 믿지 않아도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바라게 될 때 우리가 무엇에 기대고 있는 것일까?

종교가 있든 없든,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라거나 자신과 무관한 일이더라도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 앞에서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조용히 감고 두 손을 가만히 모으고 기도한다. 단언컨대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런 마음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달리 말해 기도하지 않는 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이 기도하는 마음이 가장 오래된 곳이 울산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이다. 나는 이곳에서 인류학 세미나 빙하 이후에서 만난 여러 암각화와 암채화를 떠올리며 기도하는 마음이야말로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가 태초부터 지니고 있었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인류가 암각화를 새기고 암채화를 그릴 때, 의탁하고자 했던 이 힘은 무엇일까? 종교가 없다고 신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내가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게 될 때, 십자가 앞에서 성호를 긋고, 부처님 앞에서 삼배를 할 때, 나는 나의 바람을 어디에 의탁하고자 하는 것일까? 인류의 기도하는 마음을 찾아 떠난 인문세의 인류학 답사에서 그 힘을 상상해보자.

 

넘어서기 어려운 7000년의 세월

답사를 떠나기 전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 공부한 내용에 의하면 암각화가 새겨진 암벽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성한 힘이 깃든 곳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암각화박물관주차장부터 반구대까지 걸어 들어가는 산책로의 자연경관도 뛰어나다고 했다. 암각화가 그려진 7000년 전과는 반구대 주변의 지형도 변하고 그곳으로 진입하는 경로도 당시와는 다르겠지만, 나는 그곳에 가면 입구에서부터 꼭 그 힘을 느껴보리라 다짐을 여러 번 했다.

큰 도로에서 박물관까지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도로 양 옆으로 산림이 이어져 나는 진입로부터 박물관이 산림 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암각화박물관 주차장에서부터 20분 정도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산세를 따라 조성된 길을 따라 걸어가며 주변의 지형과 과거의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려 애썼다. 조금이라도 특별해 보이거나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는 자연의 모습이나 조형물 같은 것이 있을까 해서였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반구서원(盤龜書院)과 정자 집청전(集淸亭), 반고서원유허비(盤皐書院遺墟碑)가 보였지만, 이는 모두 고려 말 이곳으로 유배 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儒林)들이 세운 것이었다.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들고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하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기운을 느낄 수는 없었다. 우거진 나무가 선사해주는 그늘에 뜨거운 태양에도 선선하게 반구대에 다다를 수 있었다는 것 밖에는 별 소득이 없었기에, 반구대 앞에서는 뭔가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반신반의하며 나는 더 안으로 들어갔다.

반구대 암각화는 반구천을 사이에 두고 전망대에서 약 200m 정도 거리에 있었다. 훼손의 우려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암각화를 가까이서 볼 수 는 없었고, 우리는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었다. 망원경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보는 암각화는 사실 시시하고 별 볼 일 없어 보였다. 가까이서 그 질감이나 세부 새김을 보지 못해서인지 나는 망원경으로 암각화를 보는 데에 별 감동을 받지 못했고, 차라리 암각화박물관에서 보았던 모형 암각화가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보다 나는 그곳의 자연경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반구대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는지, 반구대의 형상이 독특하지는 않은지, 신기해 보이는 나무나 암석 같은 자연물은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해설사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정보를 줍줍하는 중에도 나는 반구대의 신성한 기운을 찾는 데에 정신이 팔려 사실 아무 얘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7000년 전의 반구대와 접속해보려 한 나는 과연 그곳에서 뭔가를 느꼈을까? 역시나 아니올시다이다. 7000년이라는 무구한 세월은 넘어서기 어려운 벽이었나 보다.

 

신령스러움은 이런 곳에

그날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골굴사의 골굴암이었다. 골굴사(骨窟寺)는 경주시의 함월산에 위치한 사찰로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 사원을 본떠서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석굴사원이라고 한다. 골굴사의 높은 기암괴석 골굴암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당시 절벽에 매달려 작업을 했을 이들을 생각하면 아찔함에 절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자연 암벽도 아름다운데 거기에 새겨진 불상의 자애로운 미소와 온화한 자태는 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데다, 기이한 자연의 암벽에 새긴 신의 모습이라니 나는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우리 말고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꽤 있었다. 모두 저 아래 주차장에서부터 걸어 올라와 골굴암까지 또 가파른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쉬엄쉬엄 오르기도 하고 숨을 몰아쉬기도 하며 올랐다. 골굴암 주위로 둘러진 계단 옆으로는 낭떠러지라 다들 조심조심 한 발 한 발을 내딪었다. 골굴암의 마애여래좌상과 그 암석의 석굴들에 모셔진 불상들, 꼭대기에 지어진 법당에서 절을 하고 기도를 했다. 누구도 이곳이 영험한 곳이다, 신성스러운 곳이다 말하지 않았지만 불상과 법당 앞에서는 모두가 조용히 말을 아꼈고 몸놀림을 조심히 가졌다.

나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화, 문무대왕릉, 골굴사의 골굴암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소로 찾았던 곳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반구대 암각화에서 그토록 찾았던 신성함은 골굴사의 골굴암이 주었던 자연의 위압적인 압도감과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조형물이 주는 위대함이었다. 문무대왕릉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죽어서도 조국을 지키겠다는 유언으로 그의 유골이 화장돼 모셔진 곳이었다.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험한 기운을 가져다 주었고, 골굴암은 기이한 자연에 인간의 힘을 더해 신성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곡리와 천전리의 암각화에서 나는 어떤 신령스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그날 답사의 장소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며 나는 내가 가진 신의 이미지가 그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000년 전 일상의 신성함

우리는 일상 밖에서 신을 찾는다. 신을 찾아 교회, 성당, 절과 같이 신이 모셔진 곳에 간다. 우리는 세상 밖에 있는 신을 특별한 장소에 모셔둔다. 내가 반구대에서 찾으려 했던 신성함도 내가 사는 세상 밖에서 내 삶을 주재하는 신을 떠올렸을 때 그릴 수 있는 이미지였다. 그는, 그 신성함은 내가 사는 세상 안에서는 찾기 어려운 기이한 모습이다. 나는 그런 기이한 신성함을 반구대에서 만날 수 없었다. 반구대는 그저 산림이 우거지고 그 산을 굽이쳐 반구천이 흐르는 특별한 것 없는 자연 경관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반구대의 암각화의 특별한 점이라면 다양한 동물상, 특히 여러 종류의 고래가 그 특징이 잘 포착되어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과 당시 바다였을 그 절벽에 어떻게 그 많은 암각화를 세밀하게 새길 수 있었을까, 어떤 이유로 쉽지 않았을 그 작업을 여러 번에 걸쳐 굳이 했을까 하는 등의 여러 의문이 든다. 이런 여러 질문들을 뒤로 하고 나는 그곳이 신성하다고하는 그 장소의 특이성에 집중을 했다. 그런데, 내가 반구대에서 보고자 했던 신성함이 그들의 관점과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반구대는 빙하기 이후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져 태화강 상류 인근까지 물이 들어왔다. 지금은 장생포 앞바다에서 반구대까지 26km나 떨어져 있지만암각화가 그려진 7000년 전에는 반구대 근처 굴화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만으로 고래를 몰아, 배 위에서 나뭇가지 들을 쳐서 소리를 내며 기슭에서 잡았을 것이다’.(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자료집, 인문공간세종) 암각화가 그려진 반구대는 바다에서 내몰린 고래들이 생을 마감했던 곳이었다. 반구대는 바다에서 고래를 잡아 생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던 곳이었다.

반구대의 암각화에는 고래 그림만 있지 않다. 고래 외에도 사슴, 멧돼지, 호랑이 같은 육지동물과 어로 도구나 사냥 도구, 인간의 모습도 있다. 지금 반구천을 감싸고 있는 산림은 당시에 암각화에 그려진 동물들을 사냥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반구대는 고래를 잡고 사냥을 하고, 말 그대로 그들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곳이자 그들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 함께 하는 곳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살리는 동식물과 자연 모든 것에서 신성함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많은 것들이 연결된 다양한 생명들의 관계 속에서, 그 생동감 넘치는 힘 속에서 자신들이 살아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해하고 제의를 지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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