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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류학

 

 

걷기,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상상하기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07-22 17:33
조회
179

빙하 이후최종 에세이

 

2024.7.22. 최수정

 

걷기,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상상하기

 

우리 종이 생태적 위기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지구와 함께 사는 새로운 방법을 상상하고 실행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밥 플럼우드, 악어의 눈, 18)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면서 앞발이 자유로워지고 시선은 더 먼 곳을 향하게 됐다. 선 채로 더 멀리 보고 걸으면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된 인류는 발걸음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를 보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달라지는 경관은 언제나 걷는 자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움직이고 달라졌다. 고대인들에게 자연물은 가끔은 귀찮을 정도로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행위자였다.

해와 달이 자신을 자꾸 따라온다며 신경 쓰는 어린아이들처럼 태초의 걷는 인류에게는 상상할 힘이 있었다. 상상력으로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행위자를 만들어 그들과 대화하며 언제나 고난과 다름없는 기후변화를 견뎌낼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 힘으로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의식주를 달리하고, 기술을 발달시키며 살아남았다. 혹독한 기후환경에서 삶의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사람들에게 상상력은 생존의 필수조건이었다.

그들은 그 생존의 조건을 예술로 남겼다. 험난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멈출 수 없었던 경험을 예술로 이야기했다. ‘예술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들과 함께 걸어갈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예술에는 삶의 도구와 규범, 깊은 지리정보가 들어있었다. 고대인들은 공유된 것들의 지반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그림을 그려냈다. 그런 의미로 고대인에게 예술은 곧 자신과 타인을 향한 기도였다. 그 기도에 이끌려 새로운 길에 도착한 사람은 공유된 지도에 자신의 힘을 보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간다. 그렇게 예술에 내포된 기도의 힘은 저절로 퍼져 나가고 뒤따르는 자들을 연결한다. 나는 그 연결의 힘을 따라 울산 반구대 암각화 앞에 서 있다.

 

걷기, 전체성을 느낀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걷는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의 저항을 받으며, 자기 자신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움직임이다. 발은 땅과 연결되어 있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며 그 사이에서 손은 자유롭다. 휘청이는 몸을 바로잡기 위해 항상 스스로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균형을 잡고 지탱하고 나아간다. 불균형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 다시 균형을 잡는 운동 속에 자신을 내맡기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리듬을 탄다. 드넓은 시야에 들어오는 수많은 관계들의 신비한 결속에서 일체감을 느끼며 나아간다.

그런 의미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레비스트로스의 말에서 언급했던 신체 체조걷기와 닮았다. 이는 직접 몸으로 경험하는 경험만이 가르쳐주는 영역이다. 신체가 이동하며 정신과 감각도 걸으며 이동한다. 몸에 모든 감각기관이 요동치고 섞이면서 온몸이 보고 듣고 맛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충만함으로 가득 찬다.

레비스트로스는 우리가 사회 집단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전체의 부분이다. 내가 속한 사회 또한 절대적인 전체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전체에서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언제나 부분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우리가 그 부분 안에서만 머무를 때, 전체에 대한 감각을 잃고 마치 부분이 전체인 것처럼 믿고 산다.

걷기는 부분을 벗어나 멀리 걸어나가 넓은 시야를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의 사회적 신체가 사회 적응을 돕는다면, 걷기는 사회적 신체를 벗어나 신체의 상상 기능을 부추긴다. 사회문화에 붙잡힌 개별적 신체의 역량을 증가시켜 전체를 보게 도와준다. 걷기는 사회 안에서 개체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며 사회적 현실과 상상적 현실과의 리듬을 재조정하며 신체에 활력을 준다.

내가 인류학 공부를 하고 수렵채집인의 삶을 배우는 일도 역시 걷기라 할 수 있다. 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배워서 어디다 쓸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막상 발걸음을 떼고 나아가보니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치우친 균형으로 불안해진 몸과 정신을 체조를 통해 다시 균형을 잡으며 다른 것도 있음을 보면서 모순 사이에서 움직여본다. 나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통해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당연함으로 깎인 신체를 재구성하며 즐거워진다.

걷는 자들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미리 길 앞의 관계를 본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과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으로 자신의 신체를 재조합하며 나아간다. 자기 삶의 기반이 되었던 땅에 발자국을 새기며 전체적 기원과 자신을 동시에 엮어내며 상상력을 발달시킨다. 암각화 가는 길에서 본 공룡 발자국 화석이 지질과 엮여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처럼, 나의 발걸음도 분명 땅 위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이 흔적들은 남겨진 여분의 실가닥처럼 이 세계에서 함께 어울리는 존재들에게 사용되어 누군가를 또 다른 길로 이끌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 이르는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며 오랜만에 걷는 일에 집중해 본다. 한발 한발 천천히 내딛으며 감각은 처음 보는 풍경을 앞질러 간다. 앞질러 간 감각은 뒤늦게 당도한 몸과 전혀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 내 앞에서 몸보다 먼저 나서서 어떤 감각과 교감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돌아온 감각은 더욱 섬세하고 민감해져 있다. 이 순간 그것만큼 구체적인 것이 없다.

어제 내린 비로 풍경이 깨끗이 씻기고 계곡물은 자못 사납게 흐르고 땅은 젖어 있다. 나뭇잎은 더욱 짙고 무성해 보이고 바위의 윤곽은 뚜렷해졌다. 젖은 나무와 질척한 흙냄새가 계속해서 나를 따라온다.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과 땅이 쩍쩍 달라붙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발바닥이 흙 속의 거친 돌과 나뭇가지와 교감한다. 숲속 끈적한 습기가 햇빛에 말라가며 온몸에 물기를 더하고 새소리조차 묵직하게 들린다. 모두 아닌 척 굴지만, 무언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존재들처럼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우리 말고 다른 존재들의 알 수 없는 기척이 들리는 것 같을 때는 귀가 쭈뼛해진다. 사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 있다. 긴장을 늦춘 사이 드러날지 모르는 반구대 암각화를 온 감각으로 열심히 좇고 있다.

 

동행자를 통해 재구성된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빙하 이후의 저자 스티븐 마이든과 저자가 내세운 가상의 인물 존 러복과 동행하며 고대인과 함께 걸었다. 전곡리 선사 박물관에서 고대인이 사용했던 도구로 그들의 생활상을 떠올리고, 한탄강에서 돌을 깨뜨려 보기도 하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알아가며 어울리는 경험을 했다. 빙하 이후라는 책은 나를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오늘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동행했다.

나는 고대인이 살았던 공간, 그들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바위그림에 멀리 떨어져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망원경으로 그들을 순간적으로 확 끌어당길 때 나는 어쩐지 바위 그림이 나에게 옮겨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그림들이 갑자기 확 다가와 내 몸에 무늬를 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뭐지? 너무 과몰입했나? 저 바위 그림조차 내 몸에 달라붙어 나를 따라나서고 싶나? 나도 모르게 몸을 털어냈다. 아직 낯선 동행자를 만날 준비가 안 돼 있다.

걷는 구간 구간에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동행을 만난다. 예측할 수 없이 우연히 우리 삶의 구간에 올라타는 동행자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동식물, 무생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세계는 즉각적으로 변형된다. 바람 앞에서 나의 존재는 바람을 가로막는 존재가 되어, 바람이 방향에 영향을 주고, 방향을 튼 바람은 또다시 예기치 않은 동행을 만들어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동행자들로 인해 새로운 생각을 조합하는 상상력을 키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걷기를 멈추지 않았던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상상으로 자신을 변형시키고 세계를 변형시킨다. 변형이란 곧 기존의 것을 버리는 일이다. 주어진 형상을 버리고 대체하며 자신과 세계를 운동시킨다.

특히 바다에서 고래를 잡는 사람들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땅 위에서 자신이 걷던 방식을 바꿔야 한다. 몸의 균형을 새로 잡기 위해 움직이는 땅의 리듬에 몸을 맡겨야 한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는 자신의 몸의 조건을 변화무쌍한 동행자들과 연결해야 한다. 따라서 어부들은 변화를 감당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더욱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요동치는 관계들과 매번 긴박하고 즉흥적 선택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 있다. 바다 위의 동행자들과 일방적 관계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관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대화해야 한다. 자기를 버리고 변형해가며 그 대화에 끼어들어 리듬을 탄다.

생사의 기로에서 돌아와 배에서 내려 땅을 딛고 선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움직이는 느낌은 그들에게 육지에서 경험하지 못한 유동성을 경험하게 했을 것이다. 서 있는 곳만 달리해도 그토록 달라지는 세계에서 그들은 오직 굳건한 땅만을 경험한 사람들과는 또 다른 변형의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이 솟은 형상이라 믿는 바위의 힘으로 출렁이는 파도의 지면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의 동행자로 바위를 선택해 새로운 관계를 조합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상상한다. 그들은 바위를 쓰다듬고 달래며 바다를 새긴다. 바위에게 바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선을 그리고 면을 파내어 바다라는 행위자가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형태와 형상을 새겨넣어 바위 위에 바다를 재구성한다. 이제 바위와 바다는 서로를 알게 되고 직접 대화할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가 예술이 된 이유는 자신들의 경험과 세계를 엮어 재창조된 세계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버리고 변형하는 행위로 세계를 변형시키고 그것을 공유하는 행위는 타인을 위한 기도이다. 이미 누군가가 자신들을 위해 그렸던 그림, 그 기반 위에 자기가 경험한 그 세계를 겹쳐 그리고 세계를 재구성하며 타인을 위한 세계의 출현을 돕는다.

고대인들에게 세계는 언제나 움직인다. 움직이면서 재조합되는 세계는 손으로 붙잡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다. 무한한 인지 공간 안에서 끝없는 상상력으로 재조합되는 세계는 지루할 틈이 없다. 나는 빙하 이후를 읽으며 고대인들에게 교역은 신성을 만나는 일처럼 느꼈다. <괴베클리테페>에 거대한 신전을 짓고, 주변에 곡물을 집중 재배한 이유가 교역과 회합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할 때 나는 도대체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신성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의 신성을 느낄 수 있는 행위가 교역의 형식이었다. 흑요석을 얻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다닌 이유 또한 교역을 통해 서로 다른 존재들과 어울리는 과정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멀리 ᄄᅠᆯ어진 곳에서 가져온 물건과 사람들의 관계에서 신성을 경험했던 것이다. 고대인은 교역을 통해 상상력을 키우고 세계의 복잡성에 호응한다. 세계는 우리가 그에 반응하고 침투하고 이해하는 만큼 깊고 넓어짐을 인식했다. 고래잡이 어부들에게 바다는 어쩌면 거대한 교역의 장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수많은 동행자를 만나 스스로를 변형시킬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고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 갈 상상력의 보물창고였다.

걷는 자들의 예술

수렵채집인의 끝없는 걷기는 버리기에서 시작된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버리고 두고 떠날 수 있는 것들만 한시적으로 소유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서 끝없이 걷는 존재에게 걸었던 길에서 얻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길 위에서 어떤 낯선 환경조건을 만날지 모르고, 그 환경에 즉각 적응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도구와 기술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오랜 시간 공유된 지식을 재구성하는 상상력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내던 그들에게 이미 경험된 도구들을 무겁게 들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끝없이 걸었던 고대인들에게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은 매순간 상상력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먹거리와 별미 식물들이 넘쳐났겠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굶어 죽던지, 동물 밥이 되던지 얼어 죽었을 것이다.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때에 따라 독을 약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자가 살아남았다. 자연의 모든 행위자에 주의력을 집중하고 관찰해서 그들의 연관성을 알아내고 대처하는 일은 생존과 직결되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가벼운 몸으로 땅과 바다를 모두 걷는 자들의 예술이다. 육상의 동물과 바다의 동물들이 뒤섞인 바위 그림들은 땅과 바다, 여기와 저기, 삶과 죽음의 관계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인들에게 예술은 언제나 자기 삶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지금 여기의 물리적 현실과 상상적 세계를 엮어 새로운 세계를 조합하며 예술로 구현한다. 공유된 기반 위에 자기 경험을 덧입혀 새로운 풍경의 무늬를 짠다. 따라서 그들에게 예술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엮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모든 행위자들의 시간과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행위자들을 연결한다. 반구대 암각화의 겹쳐진 그림은 기반을 존중하고 그 위에 덧붙여진 삶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전체성과 함께 보는 공유의 감각이 있었다. 공유를 통해 상상력이 재구성될 때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존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 본 천전리 암각화는 무언가 다르다. 누군가에 의해 그림이 고의로 훼손되어 있다. 각석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또한 누군가의 손으로 글자 하나하나가 쪼아져 있다. 자기 그림을 위해 이미 새겨진 그림을 쪼개내고 파헤치는 사람은 바위를, 그 위에 그린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두 암각화를 비교하면서 나는 관계 맺음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반구대 암각화 예술가들은 돌에 대한 깊은 관계성을 갖고 있다. 이들은 세계를 깊은 전체성으로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까지 인정하는 초자연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예술은 감각을 통한 앎이 먼저였다. 돌을 만지면서 돌이 나를 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돌을 배우고, 그것이 나를 수용하고 내가 그것을 완전히 수용할 때까지 기다린다. 자신이 사용하는 돌이라는 질료, 고래라는 질료와 교감하며 그들에 대해 완벽하게 아는 일이 먼저였다. 그 둘을 모두 알아야 둘을 한 자리에 놓아 만나게 할 수 있다. 돌이 고래가 되고 고래가 돌이 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는 순간 실감하는 형상이 탄생한다. 그래서 그들의 예술은 여러 가지 기능이 다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술과 종교, 일상의 기능이 함께 있다. 완벽하게 아는 존재들에게 힘을 행사하고 힘을 받는 능력 즉 대화를 통해 예술가는 질료를 형상으로 창조한다.

하지만 모든 감각이 배제된 보기란 형상을 변형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대화하지 않는 방식이다. 일방적 보기의 형식은 나와 사물이 하나가 될 수 없다. 내가 돌을 만질 때 돌도 나를 만진다는 감각을 알지 못하면 서로에게 힘을 미칠 수 없다. 앎의 방식은 언제나 신체적이어야 한다. 만지고 체험하며 서로 몸으로 대화하는 방식이 그 존재에 대해 알게 한다.

자신과 만나는 질료와 대화하지 못하고 일방적 관계만 남을 때 우리는 상상하는 능력을 잃는다. 그것은 바위를 자기 힘으로 찍어누르고 훼손하게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현대 예술은 예술가의 관점보다 고객의 관점에서 개별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예술품이란 예술가에게 주문하는 것이 되었다. 고객의 취향과 시선을 재현하는 것이 예술이 됐다. 똑같은 자기를 재현하는 초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관계를 지워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보기위해, ‘보여주기위한 예술이다. 서로를 느끼고 체험하며 알고 이해해가는 기도가 담기지 않는다.

걷는 자의 예술은 상상력에 의해 드러나는 관계들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없던 세계가 드러나는 영감(靈感)의 세계, 신성의 세계였다. 자연의 모든 행위자가 공유하는 성스러운 감각을 포착한 순간 신이 현현하는 느낌을 기억하고 남기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였다. 두 손을 모으고 자기 생각과 행위를 멈추고 신의 말씀에 복종하는 순간이었다. 신의 뜻과 나의 뜻이 조화를 이루며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시간이었다.

나는 빙하 이후로 끊임없이 걷던 고대인이 어떻게 빙하 이후 살아남게 됐는지 보았다. 걷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고 상상력을 키우는 방법이었고 그것이 그들을 극한의 조건에서도 생존하게 했다. 만약 그들이 걷지 않았다면, 실패와 좌절의 순간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걷지 않는다면 인류는 멈출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법을 상상하지 못해 삶이 멈출 것이다. 수렵채집인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보기 위해 걸었다. 상상의 세계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만나는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드러난다. 관계가 모두 신이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조건이다. 그들이 남겨둔 예술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일지 모른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대인이 우리를 위해 기도한 흔적이다. 상상력을 통해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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