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반구대 후기] 예술로 자연과 관계 맺다
240722_[빙하이후]_기말에세이_윤연주
예술로 자연과 관계 맺다
나는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 홍동백서 등 음식을 놓는 위치와 방향, 음식의 개수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순서와 방법은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북어 머리를 두는 방향과 과일의 종류와 개수가 홀수이어야만 하는 제사의 형식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제사는 망자의 영혼에게 밥을 먹이는 의미도 있지만 후손들이 모여 떠난 사람을 추억하며 밥 한 끼 먹는 행사라 이해했다. 그런데 스티브 마이든의 『빙하이후』를 읽고 라스코 동굴의 벽화를 보면서 제사와 같은 의례가 아무 의미도 없이 형식만을 고집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문화는 획득하는 것이며 그것도 핵심적 획득이다. 지식을 집적하여 총체화하고 지난 경험들을 이용하는 것이 문화의 조건 자체라고 그는 말한다.(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조르주 샤르보니에, 류재화 옮김, 『레비스트로스의 말』 (마음산책), 41쪽) 문화가 핵심적 지식과 경험의 집합이라면 제사라는 의례를 포함하여 타인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밥을 먹는 방식 같은 일상에서 의식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우리가 예의라고 부르는 것도 오랫동안 축적된 지식과 경험의 산물이지 않을까.
20,000년 전 우리의 인류는 동물을 사냥하고 뼈와 돌을 이용해 다양한 생활 도구를 만들었다. 그들은 먹고사는 데 그치지 않고 동굴이나 바위에 그림을 그렸다.(스티브 마이든, 성춘택 옮김, 『빙하이후』 (사회평론아카데미), 22쪽) 우리의 선조들은 사냥하는 동물과 사람을 그려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기록했다. 스티브 마이든은 벽화를 컴퓨터처럼 정보를 저장하는 장치로 보았다. 예술, 신화, 종교 의례를 장소와 동물 이동에 대한 정보 및 어디에 누가 살고 사냥을 어디서 하는지에 대한 정보의 일관된 습득과 소통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간주했다.(같은 책, 193쪽)
그런데 울산 반구대 암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니 스티브 마이든이 말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사냥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어로와 사냥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면 반구대에 고래와 같은 다양한 해상 동물과 육지 동물의 그림을 그렸던 우리 선조들은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고 그들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고 싶다.
바위에 고래를 그리다
우리나라에는 동굴 벽화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울산 반구대에 서기 7,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리와 천전리 두 곳의 바위에 주로 그려졌다. 대곡리 암각화에는 약 300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고래이다. 식별할 수 있는 고래만 50마리가 넘고 그 종류만 하더라고 8개 이상으로 다양한 종류의 고래가 바위에 새겨졌다. 반구대는 울산 태화강의 자류인 대곡천 중류에 있어서 현재 바다와 약 26km 떨어져 있다. 그러나 7000년 전에는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져서 현재 반구대 근처 굴화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 당시 반구대에 살던 사람들은 바다에서 고래를 잡으며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곡리 암벽에 그려진 고래 그림 때문이다. 그림에는 고래를 사냥해 본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고래의 외형과 생태적 특성들이 잘 나타나 있다. 북방긴수염고래는 앞 지느러미가 하나는 앞에, 하나는 뒤에 그리고 등에서 나오는 듯한 물의 높이가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게 3마리의 고래로 그려져서 있다. 이 고래들을 연결해서 보면 앞 지느러미를 앞뒤로 움직이며 등 위로 솟은 물이 솟구치고 가라앉는 모습이 마치 바다를 헤엄치는 것 같다.(고래는 물을 뿜는 게 아니라 숨을 내쉬면 고래 몸속의 따뜻한 공기가 밖으로 나와 찬 공기와 만나서 물줄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배에 긴 주름이 있고 가슴지느러미가 다른 고래에 비해 매우 긴 혹동고래는 다른 고래들과 달리 머리가 아래를 향한 채 새겨져 있는데, 물 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지는 혹등고래의 브리징하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래는 포유동물이라 새끼 고래는 물속에서만 살 수 없다. 물 밖으로 나와 숨을 쉬어야 하는데, 이런 고래의 특성이 어미 고래가 등 위에 새끼 고래를 태우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고래가 어떻게 사는지도 매우 잘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고래 지느러미 크기는 어떤지, 어디에 붙어있는지, 배는 어떤 색깔이고 어떤 모양인지, 꼬리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헤엄치는지 이빨은 없는지 무엇을 먹는지 어디로 헤엄치는지 오랫동안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각각의 고래들의 특징들이 가장 잘 포착된 순간을 이미지로 기억해 암벽에 새겼을 것이다.
장 클로트는 모든 예술은 결국 메시지라고 했다. 예술을 통해 속세의 이야기나 신성한 이야기를 전하거나 영원히 새기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가 동굴 벽 너머나 바위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을 거라고 말한다.(장 클로트, 류재화 옮김, 『선사 예술 이야기』 (열화당), 35쪽) 그렇다면 반구대 화가들도 바위 너머에 사는 초월적 존재를 만나기 위해 고래와 거북이 그리고 다른 육상 동물들을 암벽에 새기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일종의 주술 행위였을 것이다. 현실에 없는 초월적 존재와 대화하기 위한 형식이 암벽에 고래를 새기는 일이었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활하는 자연환경에서 수렵하고 채집할 수 있는 동물과 식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북미 대평원에서 들소 떼를 쫓아 이동하며 들소를 사냥하는 쇼쇼니족은 바닥이 원형인 텐트를 치는 천막에 들소 떼와 말을 타고 들소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렸다.(『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국립중앙박물관), 43쪽) 알래스카 원주민인 푸느크 사람들은 상아나 나무로 만든 작살촉과 작살 부속구에 그들이 사냥하는 동물을 암시하는 날개, 입, 눈, 콧구멍을 그렸다.(같은 책, 97쪽) 울산 반구대 근처에 사람들은 바위에 그들이 사냥하던 고래 그림을 그렸다. 바위나 동물의 뼈나 상아로 만든 도구에 사람들은 그들이 사냥하는 동물, 즉 그들의 생존과 뗄 수 없는 존재들의 모습을 남겼다. 사냥감의 모습을 동굴 벽과 바위면 그리고 사냥하는 도구에 그리고 새기는 행위는 동물의 영혼에 감사를 표하고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였다.(같은 책, 96쪽)
바위에 홈을 파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몸을 사용하여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직물을 직조할 때 우리는 그 대상에 마음을 온전히 집중한다. 온 마음을 다해 몸이 행위를 할 때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에 달라붙어있거나 그 생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빠지지 않는다. 반구대 예술가는 끝이 뾰족한 석기로 단단한 바위면을 내리치며 흔적을 새길 때 한눈팔지 않고 온 정신을 그리는 대상에 집중했을 것이다. 마치 나바호 여인이 일상을 사는 마음과 철저히 분리한 채 ‘신과 대화’하는 자세로 직조를 하듯이 말이다.(오선민, 『울산 답사 자료집』, 2쪽) 경건한 마음과 몸가짐으로 바위를 응시하며 자신을 그리는 대상에게 온전히 이입했으리라.
한 손에 새김돌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바위를 짚고 돌을 바위에 내리칠 때 예술가는 바위에 그림을 새기는 동시에 자신의 신체에 바위가 전달하는 진동과 힘을 새긴다. 바위에 고래를 새기는 순간 예술가는 자기이면서 동시에 바위 속의 고래가 된다. 그림을 그리는 인간이 포식자이고 포획당한 고래는 피식자가 되는 현실에서는 나는 인간, 너는 고래이다. 그런데 돌에 고래를 새기는 과정에서 인간은 고래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며 고래가 되어간다. 바위에 그림을 새기는 일은 지금–여기에서 인간 존재와 고래 존재가 합일되는 형식이자 바위 너머 초월적 세계와 대화를 하는 제의 행위이다.
자연의 관계성을 담아내다
대곡리 암벽 왼쪽 아래에는 손과 발이 매우 크게 그려진 사람의 형상이 있다. 이 그림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산타 크루즈 동굴 벽화에도 그려진 그림과 같으며 샤먼으로 추정된다.(오선민, 『울산 답사 자료집』, 12쪽) 암벽의 왼쪽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래가, 엄마와 아기를 포함하여 무리를 이루며 자유롭게 헤엄치는 듯한 전경이 새겨져 있다. 고래 무리 아래에는 샤먼이 있다. 샤먼은 현실 속 바다에서처럼 고래들이 바위 너머 초월적 세상에서 일가를 이루며 자유롭게 헤엄치며 풍요롭게 살도록 기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울산 반구대 답사 때 암각화를 설명해주셨던 이정걸 해설사는 오전에는 그림을 알아볼 수 없고 오후 3시 정도가 되어야 그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셨다. 암벽에 홈을 파서 형태를 새겨 넣는 암각화는 아무 때나 아무 위치에서나 볼 수 있는 2차원의 그림이 아니다. 암벽에 해가 적절한 각도에서 비추지 않으면, 해가 만드는 밝음과 그림자 없이는 그림을 볼 수 없다. 해와 적절히 관계를 맺을 때 암각화 자체도 존재하게 된다.
밤의 풍경도 그려본다. 7000년 전 대곡리 암벽에 바닷물이 차고 고래가 헤엄을 치고 있다. 달빛이 은은하게 수면 위 가까이 유영하는 고래의 등을 비춘다. 고래 등에 의해 반사된 빛은 대곡리 바위에 고래의 흔적을 새긴다. 그 모양을 샤먼이 따라 새긴다. 돌에는 지구가 탄생한 순간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이 내재하여 있으며 그 단단함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영속성의 상상력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선조들은 포획한 고래를 바위에 새기며 그들의 풍요를 기원하며 그들과의 관계가 평화롭게 연결되기를 신체를 통해 기원하고 기억하려 했을 것 같다. 암각화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고래 뿐만 아니라 해와 달, 바람과 바다와 같은 자연과의 관계성이 모두 들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