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일상의 인류학

 

 

[반구대 답사 후기(최종)]무문자로도 충분해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4-07-31 09:39
조회
207

울산 반구대 답사(최종)/240730/강평

무문자로도 충분해

 

기원전 5,000년 블랙박스

이번 시즌의 주교재인 빙하 이후에는 중국 야생 벼, 일본 조몬 토기를 비롯, 전세계 구석기 유물이 생활상과 함께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아쉽게도 한반도 유물은 등장하지 않았다. 이번 답사를 다녀와서 만약 빙하 이후개정판이 나온다면 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래 사냥그림과 동해 바다 사람들의 생활상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빙하 이후에는 주먹 도끼 제작, 들소 운반, 부위별 해체 후 의식주 다방면으로의 활용 장면이 나온다. 기원전 5,000년 한반도 동해 바다에서는 선사인들이 나무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좁은 장소로 몰고, 그물로 진로를 막고, 작살로 급소를 찔러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다음, 작살에 연결된 부구와 함께 고래가 떠오르도록 하는 포경 장면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울산 바다에서는 암각화와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 뼈 작살이 꽂힌 수염고래 뼈가, 울산 인근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는 나무배가 발굴되어 반구대 암각화 형상들을 부연 설명하고 있다. 발굴된 유적의 수염고래는 최소 몸길이 20미터, 무게 45톤이라고 한다. 인간과 고래의 크기는 지금과 비슷한 수준이고, 바다는 고래의 홈그라운드이고 인간은 땅에 산다. 선사시대에 몇십 명이 힘을 합쳤다고 해도 그런 대물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너무 놀라워서 믿기지 않는다.

빙하 이후는 문명을 문자, 국가와 동일시하는 상식을 깨버린다. 저자 스티브 마이든은 인류가 신석기로의 이행을 애써 거부했거나, 시험 삼아 해봤다가도 포기하고 다시 구석기 수렵, 채집 생활로 돌아간 적이 많다고 설명한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식물과 동물을 길들여서 식물의 단종화, 동물의 가축화를 하느라 노동 지옥이 되어, 누가 누구를 길들이는지 모호해지고, 인구 집중화로 인해 전염병이 유발되는 등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수렵, 채집 사회가 수천 년간 유지되었던 것은 그럴만한 강점이 있었던 것 같다. 왜 나는 문명에서 문자, 국가가 필수라고 생각했을까? 문자가 있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특히 후대로의 전승을 통해 지식이 축적되어야 하고, 또 그 과정에서 국가라는 중앙 통제 장치가 있어야 비로소 문명이 가능하다고 배웠던 것 같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는 문자가 아니고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고, 그 그림으로 추정되는 선사인들의 삶은 문자나 국가 없이도 의식주는 물론이고 함께 살아가는 데에 부족함 없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자, 국가가 없으면 문명도, 역사도 없는 원시 상태 즉, 짐승과 다름없는 삶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담고 있는 기원전 5,000, 동해 바다에서 살던 선사인들의 고래 사냥을 상상해본다. 위험하고 힘들었다는 말로는 다할 수 없이, 여러모로 대단한 고래 사냥이다. 고래 사냥에 성공하면 은총처럼 그들 앞에 있었을 길이 20미터, 무게 45톤의 고래도 떠올려본다. 고래는 버릴 부위 하나 없이 의식주에 쓰이고, 길게는 7년까지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고래는 선사인들에게 대박 금맥일 뿐만 아니라 고래의 모습으로 와서 아낌없이 내어주는 신이었을 것이다. 고래는 어쩌다 요행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암각화 제작 훨씬 이전 몇천 년, 아니 몇만 년 동안 세대를 이어 내려왔을 기술, , 시도, 실패의 역사가 새겨진, 이유 있는 고래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보며 그들의 도구 만드는 기술, 도구 쓰는 기술, 그리고 사회 구조를 상상하다 보니 문명의 정의를 새롭게 하게 된다.

 

도구 만드는 기술

울산 대곡리 암각화에 새겨진 270여 점의 형상 중 고래가 59점이라고 한다. 압도적으로 고래가 많다. 사슴, 호랑이도 있지만 고래가 대부분이고 특히 고래 사냥의 구체적인 방법을 담은 그림도 있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암각화의 주요 주제가 고래이고, 당시 사람들이 고래를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번 답사에서 암각화는 망원경으로 봐도 잘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암각화 박물관에서 실제 크기와 동일하게 옮겨 놓은 그림을 통해 자세히 그 형상을 볼 수 있었다. 물을 뿜으며 아이돌 군무를 추고 있는 것 같은 귀여운 고래 3마리, 배 가득 작살이 들어 있는 고래, 무늬가 있는 고래, 새끼를 물 표면을 통해 숨 쉬도록 새끼를 위에 두고 유영하는 고래가 있다. 그리고 그물, 부구, 작살, 배 등의 도구 그림, 배 앞머리에는 작살을 들고 포수가 서있는 장면이 있다. 구석기 시대상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사냥은 고래 사냥을 위한 기획, 도구 만드는 기술, 고래를 잡는 힘과 기술, 바다에서 육지로의 운반, 해체, 저장 기술, 또 이 모든 역할 배분과 고래의 배분이라는 사회적 협의의 기예가 모두 합쳐져야 가능한 장면이다.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세대를 이어 많은 이들의 정성이 시연으로, DNA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를 30년간 연구한 장석호 박사는 암각화가 이 시대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블랙박스라고 말한다. 장박사의 표현대로 기원전 5,000년 동해 바다는 오늘날 울산 장생포 일대의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공업단지와 비슷했을 것 같다. 배를 만들고 고래 기름을 짜고 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떠나는 활기찬 7,000년 전 동해 바다의 아침을 떠올려본다.

암각화에 새겨진 나무배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창녕 비봉리에서 발굴된 나무배 유적을 본따 제작을 재연해보는 유튜브 동영상을 봤다. 4인승 배를 만들기 위해 주먹 도끼로 통나무를 벌목하고 재단해서 안을 팠다. 기록에 의하면 숯을 나무 표면에 올려둬서 안을 조금씩 타게 한 다음 도끼로 파내면 작업 속도를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다. 결국 전문 목수가 전동 톱 등으로 작업해도 4인승 나무배를 만드는 데 거의 6개월이 넘게 걸렸다. 통나무 안을 파고 바닷물에 띄운다고 다 뜨면 조선술을 기술이라고도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만드는 것과 먼 바다를 나갈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떠야 하고, 균형이 맞아야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당시 통나무, 주먹 도끼, 숯을 이용해서, 암각화에 나오는 거의 10인승 이상의 배를 만들려면 엄청난 시도, 실패로 얻은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세대를 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암각화에 새겨진 작살을 울산 남구 황성동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것으로 추정하면, 작살은 사슴 앞다리 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작살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슴을 부위별로 해체한 다음 뼈로 무기를 만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끝이 쇠로 만든 것처럼 단단하고 뾰족해야 집채만한 고래의 표면을 뚫을 수 있다. 쇠가 아닌 동물 뼈로 그 정도 기능의 작살을 만들려면 엄청난 장인의 손길이 들어가야 한다. 손바닥만한 광어를 잡을 때와, 몇 톤짜리 고래를 잡을 때 쓰는 단단함과 뾰족함이 같을 수 없다. 그물은 나뭇가지 또는 사슴 등 동물의 힘줄을 엮어서 만들었을 것이다. 부구는 스티로폼 같은 재질이 없었을테니 어떤 물질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바다에 뜨는 재질을 줄과 연결할 수 있는 재질이었을 것이다.

나무배, 작살, 그물, 부구를 만드는 기술은 고래를 잡을 때 필수였을 것이다. 이 밖에도 잡은 고래의 위치가 부구로 특정되었다고 해도 몇 톤짜리 고래를 연안으로 끌고 올 도구가 필요하다. 현대도 좌초된 작은 고기배를 연안으로 끌고 오려면 균형을 맞춰서 끌고 올 예인선과, 두 배를 연결할 두꺼운 사슬이 필요하다. 도구뿐만 아니라 고난이도 기술이 필요하다. 좌초된 배처럼 고래를 끌고 오기 어렵다면 고래를 연안과 가까운 곳에서 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고래를 연안으로 몰아야 하는데, 고래가 순하게 길들여진 양떼도 아니고 동력선도 아닌 나무배로 빠르게 움직이는 고래를 몰아가려면 도구를 100퍼센트 성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고래의 생태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도구들은 제작도 제작이지만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은 물론 고래의 종류, 생태를 거의 고래학자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도구의 기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구 쓰는 기술

우리나라는 고래 남획으로 인해 어종 보호 차원에서 고래 사냥이 금지되었지만 노르웨이 등 일부 국가에서는 고래 사냥이 여전히 합법이라고 한다. 노르웨이에서의 고래 사냥은 배로 고래를 좁은 만으로 유인해서 몰다가 좁고 얕은 바다에서 포를 쏘아 포획하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난 것과 다른 점은 나무배가 동력선이 된 것이고, 사슴 뼈 작살이 포로 바뀐 정도라고 한다. 나무배면 사람이 노를 저어야 하는데 고래의 속도가 7,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하면 선원들이 손에 모터를 단 것도 아닌데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고래를 어떻게 따라갔을까 궁금해진다. 작살을 몇십 톤짜리 고래에게 던진다는 것도 왠지 달걀로 바위를 치는 느낌이다. 여기서 나는 이번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는 카누, 창던지기 국가 대표를 떠올렸다. 어쩌면 도구가 다할 수 없는 속도, 힘의 세기, 정확도는 사람이 대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말과 승마 선수가 하나가 되듯, 도구와 도구를 쓰는 사람이 하나가 되는 그런 상상이다. 고래가 나타났을 때 고래가 절레절레하며 숨이 찰 정도로, 빠른 속도와 지치지 않는 지구력으로 고래를 따라갔을 선원들, 배 머리의 작살 포수는 바다에서, 땅에서 매일같이 연습하고 훈련했음에 틀림없다.

나무배를 빠르게 움직여 고래에 근접한 뒤 배 머리에서 빠르게 뼈 작살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고래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 울산 황성동에서 발견된, 고래를 찌른 사슴 뼈 작살은 급소인 어깨뼈와 꼬리뼈에 있었다고 한다. 급소를 정확히 알고, 또 그 급소를 단한번의 슈팅으로 적중해야 하는 일이다. 작살 포수를 창던지기 국가대표로 비유했지만, 창던지기는 고정된 과녁 내에서 멀리 던지기이다. 고래는 움직인다. 빠르게, 방향을 예고하지 않고. 그렇다면 작살 포수는 창던지기 선수가 아니라 야구에서 홈런 타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시속 150Km의 움직이는 공,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알 수 없는 공을 배트에 정확히 맞춰 홈런을 치는 타자말이다. 그런데 그냥 홈런도 아니고, 정확히 우측 펜스 3미터 지점으로 공을 보내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 작살 포수의 미션이다.

작살 포수는 최후의 일격을 하는 사람이다. 축구로 치면 스트라이커다. 스트라이커가 하프라인부터 공을 골문 근처까지 몰고 오지 않는다. 각 포지션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선수, 그리고 벤치에서 경기 전부터 계획을 짜고,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기용하고, 실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에 따라 작전을 바꾸고 리드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리더는 배도 몰아보고, 왕년에 작살 포수였던, 이 싸움의 판을 읽을 수 있는 베테랑일 것이다. 고래가 출몰하는 장소를 알고, 실패와 성공의 경험도 아주 많을 것이다. 연안으로 고래를 더 몰아갈지, 어디에서 스퍼트할지, 그물을 내릴 때인지, 선수 보호 차원에서 과감하게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설지 판단할 것이다.

스트라이커와 감독이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축구를 2명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고래를 향해 배를 힘차게, 빠르게, 끈질기게 몰고 가는 선원들을 생각해본다. 카누 선수들의 훈련과정을 TV에서 본 적 있는데, 하루 수백 개의 스쿼트와 근력 운동을 하고 노 젓는 연습을 손바닥 전체가 군살이 박히도록 했다. 고래를 따라가려면 손발을 동력선에 버금가게 움직이고, 게다가 다른 이들과 호흡을 맞춰 고래의 헤엄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 아마 이들 10명이 합쳐서 노 젓는 모습은 고래 한 마리가 유영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동해 바다는 고래와 고래가 된 선원의 스펙타클한 대추격전이 펼쳐졌을 것이다. 이 힘든 과정이 골문 근처까지 가기까지이다. 유효 슈팅이 많다고 골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유효 슈팅 중에 골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아깝게 골문을 맞고 나오거나 아슬아슬 빗겨나가는 경우, 골키퍼 선방에 막히는 경우 등 실패가 더 많다. 고래 사냥의 경우, 실패는 많은 경우 역공으로 이어져 치명적인 부상 또는 죽음에 이르는, 작살 던지기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슈팅이었을 것이다. 작살 포수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하는 스트라이커 이상의 훈련, 탁월한 능력, 자신감을 바탕으로 고래신을 향한 간절함으로 도취와 환각 속에서 고래에게 일격을 가했을 것이다.

고래는 들소의 적어도 몇십 배에서 몇백 배 큰 크기이다. 일단 잡으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해체하고 건조, 염장 등의 방법으로 저장하지 않으면 부패가 시작된다. 시간이 생명이다. 따라서 해체는 풍부한 해부학적 지식,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 그리고 지구력까지 필요한 종목이다. 모르긴 해도 주먹 도끼 좀 쓸 수 있는 사회 구성원 전원이 나서서 부위별로 해체를 해야 할 것이다. 당시 동해 바다 반구대 인근 사람들 중 고래 부위를 모르거나 해체할 주먹 도끼를 쓰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분명 간첩이었을 것이다. 구성원들이 상시적으로 고래 해부를 생각하고 또 해부를 연습하고 있어야 가능한 장면이다. 인기 예능 <최강 야구>에 나오는 것처럼 언제 기용될지 모르니 언제나 몸을 만들고 있어야 한다. 갑자기 열심히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작살 포수 등 사냥에 직접 참여한 사람뿐만 아니라 전 구성원들이 상시적으로 도구를 만들거나 도구를 쓰는 연습을 한 끝에, 마침내 고래를 만났을 것이다.

무문자 사회 구조

부위별로 해체된 고래는 우선 맛있는 식량이 되어 온 부족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부족원 모두가 나와 며칠은 굽고, 삶아서 축제를 벌이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한쪽에서는 가죽으로 옷과 신발을 만들고, 기름으로 짜서 불을 밝힐 것이다. 이 불은 암각화를 새길 때 신령스러운 바위를 비추는 횃불로도 쓰였을 것이다. 해체, 저장, 기름 가공만 생각해봐도 이 사람들은 해부학적, 자연학적 지식과 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자가 없어도, 국가 주도의 역점 사업이 아니라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수준의 지식, 기술을 익히고, 전승할 수 있었다.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사냥 그림으로 상상한 기원전 5,000년 동해 바다 사회는 국가대표 선수, 전문 장인, 자연학자, 해부학자들로 구성이 되었나 싶을 정도이다. 매우 정교한 기술인 것으로 보아 체계적인 분업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테면 작살 포수가 타고 나갈 배도 만들고, 잡은 고래도 해체했을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 특정인이 유에서 무를 만들 듯 이 전체 분업을 기획하고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 같다. 세대를 거치며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뉘고 통과의례 등을 거치며 역할을 찾아가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분업 체계 역시 매우 정교한 사회적 합의를 거쳤을 것이다. 선원, 작살 포수는 고래 잡이의 핵심으로서, 자원 의사로 역할을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리 올림픽 국가 대표 선발전 이상의 수련은 기본이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상비군까지 두터운 선수층을 두지 않았을까 예상한다. 사회는 몇 사람의 밑그림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그때 그때 자리와 역할이 만들어지고 채워지는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암각화에서 고래 사냥, 고래 그림이 자세히 <고래 도감>처럼 나와 있지만 인간이 고래를 통제하고 압도한다는 느낌은 없다. 암각화에 나타난 그림은 전반적으로 새긴 대상을 함부로 한다든가, 압도한 무용담처럼 무도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암각화에 고래를 그린 것도 고래에 대한 감사, 그리고 공경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다. 당시 고래 사냥을 위한 도구 제작, 기술 연마, 실제 상황을 상상하고 글로 묘사를 해보니, 이 장면은 고래 사냥이라기보다는 나카자와 신이치가 곰에서 왕으로에서 곰 사냥을 결투라고 본 것과 비슷하다. 링에서, 글로브를 끼고, 경기 규칙에 따라, 게다가 서로의 목숨을 내걸고 하는 결투이다. 자주 할래야 자주 할 수도 없다. 동력선으로 포탄을 쏘는 고래 사냥으로 남획에 따라 멸종 위기가 온 것이다. 나무배를 만들어서 뼈 작살로 고래를 잡는다면, 수천 년 동안 결투를 벌이고도 얼마든지 다음 결투를 기약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몇천 년을 수렵 채집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사회는 놀라울 정도의 뛰어난 신체적 역량이 발휘되지만, 동시에 신체가 한계이자 조건이 되는, 산술급수적 세계이다.

고래 잡는 사회를 생각해보면 도구 제작, 기술, 해체, 운반하는 사람들에, 특히 이 정도 사이즈를 나눠 먹을 사람들까지 고려해보면, 아마도 꽤 큰 규모였을 것 같다. 적어도 몇백 명은 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원시 사회가 소규모 인구를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무리라고 부르기에는 큰 규모다. 고래 사냥의 노하우, 기술이 장기간 축적되어야 가능한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오래 정착해서 살았던 사회가 아닌가 추측해본다. 빙하 이후에 등장한, 연어를 잡던 미국 서북부 복합 수렵채집 사회와 비슷한 풍요 사회이다. 물론 강을 거슬러 알을 낳고 죽는 연어 떼를, 뜰 망을 넣었다 빼서, 옥수수를 거둬들이듯 수확했던 것과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집채만한 고래를 바다로 나가 작살로 잡는 것은 난이도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풍요에도 불구하고 부촌이 따로 없고, 저녁때가 되면 숲과 바다의 영혼을 이야기하는 것과 바위에 고래 형상을 새기는 점은 두 사회의 공통점이다. 선사시대 미국 북서부 사람들이나, 동해 바다 사람들에게 곰, 까마귀, 고래는 그저 먹어야 할 식량이나 동물이 아니고, 산과 강은 자연 풍광이 아니었다. 미국 서북부 해안 사람들은 곰의 모습으로 세상에 찾아온 영혼에 감사했다고 한다. 한반도 동해 바다 사람들은 고래로 찾아온 영혼에 감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고마움을 물이 흐르고 하늘과 만나는 바위에 고래를 잡던 지식, 기술, 그리고 정성을 다해 새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인류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구석기인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도 어쩌다 얻게 된 고기를 불에 구워 먹고 되는대로 자고, 닥치는대로 먹었던 사람 정도의 이미지가 있었으니, 아는 것이 없었던 것과 다름없다. 그래도 몇 명은 죽지 않고 살아서 끊기지 않고 대가 이어져 신석기 농업 혁명으로 정착해서 따신 밥 먹고 따신 집에서 살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문명은 재배를 통해 정착해서 사람 꼴을 갖추게 되면서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라는 블랙박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원전 5,000년 선사인들은 문자, 국가가 없던 시기에 놀라운 수준의 지식, 기술을 익히고 전승하고 있었다. 그들은 문명의 필수라고 여겨지는 식물, 동물의 길들이기 없이도 풍요롭게 잘살고 있었다. 인간이 동물과 정정당당한 결투를 벌이고, 밤에는 그들이 잡은 영혼을 달래는 제례를 지냈다. 기원전 5,000년 동해 바다 사람들은 동식물을 길들이지도 않았고, 동시에 자신과 같은 인간을 길들이지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알고 있던 문명은 길들이기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제 나에게 문명은 지식, 기술을 겸비한 결투를 벌이며, 그 누구도, 어떤 것도 길들이지 않는 만물을 공경하는 기예로 바뀐 것 같다. 문명은 문자, 국가와 관련이 없었다.

 

<참고 문헌>

스티브 마이든, 성춘택 옮김, 빙하 이후, 사회평론아카데미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곰에서 왕으로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동아시아

전체 1

  • 2024-08-01 07:55

    공경과 기예. 강평선생님을 생각하게 하는 키워드입니다. 바람에도 비에도 지치지 않고 쉼 없이 걷고 뛰고 돌아보는. 스스로 닦으신 기술이 정말 멋지고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