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반구대] 최종 에세이 수정_걷기,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상상하기
『빙하 이후』 최종 에세이
2024.7.31. 최수정
걷기,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상상하기
“우리 종種이 생태적 위기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지구와 함께 사는 새로운 방법을 상상하고 실행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밥 플럼우드, 『악어의 눈』, 18쪽)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면서 앞발이 자유로워지고 시선은 더 먼 곳을 향하게 됐다. 선 채로 더 멀리 보고 걸으면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된 인류는 발걸음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를 보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달라지는 경관은 언제나 걷는 자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움직이고 달라졌다. 고대인들에게 자연물은 가끔은 귀찮을 정도로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행위자였다.
해와 달이 자신을 자꾸 따라온다며 신경 쓰는 어린아이들처럼 태초의 걷는 인류에게는 상상할 힘이 있었다. 상상력으로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행위자를 만들어 그들과 대화하며 언제나 고난과 다름없는 기후변화를 견뎌낼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 힘으로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의식주를 달리하고, 기술을 발달시키며 살아남았다. 혹독한 기후환경에서 삶의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사람들에게 상상력은 생존의 필수조건이었다.
그들은 그 생존의 조건을 ‘예술’로 남겼다. 험난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멈출 수 없었던 경험을 ‘예술’로 이야기했다. ‘예술’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들과 함께 걸어갈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예술’에는 삶의 도구와 규범, 깊은 지리정보가 들어있었다. 고대인들은 공유된 것들의 지반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그림을 그려냈다. 그런 의미로 고대인에게 ‘예술’은 곧 자신과 타인을 향한 ‘기도’였다. 그 기도에 이끌려 새로운 길에 도착한 사람은 공유된 지도에 자신의 힘을 보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간다. 그렇게 예술에 내포된 기도의 힘은 저절로 퍼져 나가고 뒤따르는 자들을 연결한다. 나는 그 연결의 힘을 따라 울산 반구대 암각화 앞에 서 있다.
걷기, 전체성을 감각한다
인류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걷는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의 저항을 받으며, 자기 자신에 맞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움직임이다. 발은 땅과 연결되어 있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며 그 사이에서 손은 자유롭다. 휘청이는 몸을 바로잡기 위해 항상 스스로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균형을 잡고 지탱하고 나아간다. 불균형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 다시 균형을 잡는 운동 속에 자신을 내맡기며 자연의 리듬을 탄다. 드넓은 시야에 들어오는 수많은 관계들의 신비한 결속에서 일체감을 느끼면서 나아간다.
그런 의미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레비스트로스의 말』에서 언급했던 ‘신체 체조’는 ‘걷기’와 닮았다. 이는 직접 몸으로 겪는 경험만이 가르쳐주는 영역이다. 신체가 이동하며 정신과 감각도 걸으며 이동한다. 몸에 모든 감각기관이 요동치고 섞이면서 온몸이 보고 듣고 맛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충만함으로 가득 찬다.
레비스트로스는 우리가 사회 집단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우리가 단지 사회의 일부라고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더 넓은 우주 자연의 부분이다. 너무 큰 전체를 시야에 한 번에 담을 수 없는 우리는 그 세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언제나 자기 한계에 갇혀 있고, 부분이 전체인 것처럼 믿고 살 수밖에 없다.
걷기는 부분을 벗어나 멀리 걸어나가 확 트인 시야에서 잠시라도 전체성을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의 사회적 신체가 사회 적응을 돕는다면, 걷기는 사회적 신체를 벗어난 개별 신체가 자유로워져 몸의 감각 기능을 부추기며 다른 조합을 이끌어낸다. 사회문화에 붙잡힌 개별적 신체의 역량을 증가시켜 전체를 향해 열리며 유동적 신체가 되어간다.
내가 인류학 공부를 하고 수렵채집인의 삶을 배우는 일도 역시 ‘걷기’라 할 수 있다. 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배워서 어디다 쓸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막상 발걸음을 떼고 나아가보니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치우친 균형으로 불안해진 몸과 정신을 체조를 통해 다시 균형을 잡으며 다른 것도 있음을 보면서 모순 사이에서 움직여본다. 나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통해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당연함으로 깎인 신체를 재구성하며 더 큰 전체성과 연결된 느낌이들어 즐거워진다.
반구대 암각화에 이르는 짧은 숲길을 차근차근 걸어가며 오랜만에 걷는 일에 집중해 본다. 한발 한발 천천히 내딛으며 감각은 처음 보는 풍경을 앞질러 간다. 앞질러 간 감각은 뒤늦게 당도한 몸과 전혀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 내 앞에서 몸보다 먼저 나서서 어떤 감각과 교감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돌아온 감각은 더욱 섬세하고 민감해져 있다. 이 순간 나에게 와 부딪히는 낯선 감각만큼 구체적인 것이 있을까.
어제 내린 비로 풍경이 깨끗이 씻기고 계곡물은 자못 사납게 흐르고 땅은 젖어 있다. 나뭇잎은 더욱 짙고 무성해 보이고 바위의 윤곽은 뚜렷해졌다. 젖은 나무와 질척한 흙냄새가 계속해서 나를 따라온다.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과 땅이 쩍쩍 달라붙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발바닥이 흙 속의 거친 돌과 나뭇가지와 교감한다. 숲속 끈적한 습기가 햇빛에 말라가며 온몸에 물기를 더하고 새소리조차 묵직하게 들린다. 모두 아닌 척 굴지만, 무언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존재들처럼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우리 말고 다른 존재들의 알 수 없는 기척이 들리는 것 같을 때는 귀가 쭈뼛해진다. 사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 있다. 긴장을 늦춘 사이 드러날지 모르는 반구대 암각화를 온 감각으로 열심히 좇고 있다.
잃어버린 감수성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빙하 이후』의 저자 스티븐 마이든과 저자가 내세운 가상의 인물 존 러복과 동행하며 고대인과 함께 걸었다. 전곡리 선사 박물관에서 고대인이 사용했던 도구로 그들의 생활상을 떠올리고, 한탄강에서 돌을 깨뜨려 보기도 하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알아가며 어울리는 경험을 했다. 『빙하 이후』라는 책은 나를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오늘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동행했다.
7000년 전 석기시대인이 남겼다는 바위 그림은 나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대인이 전하는 메시지를 잘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태화강 상류의 지류 하천인 반구천의 절벽에 있는 그림은 너무 멀었다. 나와 그림 사이에는 울타리가 처져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가까이 가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림을 망원경으로 끌어당겨 볼 수밖에 없다. 그마저 잘못 움직이면 초점이 흐려지고 제멋대로 움직여 원하는 그림을 보기가 어렵다. 도대체 7000년의 시간도, 그림의 실재성도, 역동성도, 무엇도 느낄 수 없다. 이럴 바에야 사진이 훨씬 사실적이고 또렷하게 보일 것 같았다.
고대부터 암각화를 남겼던 곳은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했다. 고대인들은 그림을 그릴 공간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신성함을 더하기 위해 빛과 어둠으로 의도적인 연출을 하기도 한다. 돌 자체에 어떤 신성함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거기 있는 돌의 있는 존재 양식 안에 신성성이 있다 여겼다고 한다. 대개 그런 곳은 인간이 접근하기 힘든 아찔한 높이거나, 비밀스러운 힘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은밀하고 눈에 띄지 않는 장소였다. 그곳은 주로 보이지 않는 신들이 거주하고 있고, 특권을 가진 소수의 사람만이 의례를 통하여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암각화 주변을 둘러보니 풍광이 좋고 고요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어떤 성스러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림이 그려진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동안 자연환경이 변했을 수도 있고, 시간이 맞지 않아 그들이 연출했던 상황이 드러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공간은 너무나 평범하게 느껴져 어째서 이 공간이 특별히 선택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암각화가 그려지고 수천 년이 흐른 지금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내가 그때의 수렵채집인의 감각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불성설이었을까? 우리가 읽은 『빙하 이후』를 떠올려보면 내가 자연을 대하고 바라보는 감수성이 그때 그들과 같을 수가 없다. 고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혹독한 기후변화를 겪으며 자신들이 마주치는 세계에 민감해지지 않으면 생사의 갈림길에서 되돌아올 수 없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그들이 살아남을 길은 자신과 옆 사람의 감각을 믿는 것뿐이었다.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감각이 이끄는 대로 의지하고 선택했다. 자신의 생존 조건이고, 도구였던 신체의 감각을 가장 예민하게 벼리고 그것을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어진 집에서 혹서(酷暑)나 혹한(酷寒)과 상관없이 언제나 쾌적한 상태로 앉아 있는 나의 신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신체적 감각을 대신할 기계나 정보는 얼마든지 있고, 그것 없어도 편안한 장소에서 안전을 위협받을 일도 없고, 불편을 느낄 일도 많지 않다. 나의 감각은 최소한의 예민함에도 불편을 느끼지 않게 외부환경과 차단되어 신체 깊숙이 잠들어 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세계의 전체성을 감각하는 그들의 감수성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감각을 새기는 행위성
반구대 암각화는 너비 약 8m, 높이 약 4.5m 규모의 중심 바위면과 주변 바위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림이 새겨진 판판한 바위면의 위쪽으로 2~3m 정도 처마처럼 튀어나와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암각화를 보호하고 있는 구조다. 암면의 방향은 북향으로 석양이 질 무렵에만 잠시 빛이 들어와 암각화의 모습이 선명해진다고 한다.
암각화 앞에 서서 7000년 전 그날을 떠올려본다. 이곳은 빙하기 이후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지고 반구대 근처 굴화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바닷물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흐르는 물소리가 규칙적 음악성을 만들어 그들의 심상을 자극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마치 자연의 합창처럼 들렸을 수도 있고, 신의 노래처럼 들렸을 수도 있다. 그 음률을 따라 부르며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이 상상된다. 강과 바다가 만나고 낮은 산 너머로 넓고 푸른 하늘이 비추던 이 공간은 고대인에게 만물이 회합하는 장소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만물이 모이는 장소에 자신들도 참여해 자연과 일체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와 자연의 상관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느끼며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장소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림을 새기는 행위를 통해 자신들도 전체적 관계에 직접 참여하려 했다.
주먹도끼를 만들던 고대인들은 완성되었을 때는 원재료와 아주 다른 모습의 것을 미리 구상하고 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시 같은 모양으로 반복해서 만들 수도 있었다. 손으로 행위 하며 그것을 신체에 기억했던 것이다. 바위에 그림을 그리던 고대인도 그림을 그리기 전에 미리 그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바위라는 형태가 자기 손이 닿아 고래가 되고, 동물이 될 것을 미리 상상하고 그것을 실행했다. 그리고 그 행위를 기억하고 내면화했다. 언제나 자신이 자연에 공동참여하는 행위자임을 신체에 새겨넣었다.
고대인들에게는 자연과 자신들이 하나였다. 따라서 인간의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성 자체가 그들에게는 신성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아무나 다가가지 못하는 신성한 장소에서 신의 행위를 모방하듯 창조에 참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때 그들의 신체는 모든 존재에게 열려져 더 큰 세계를 향해 작용하고 있었다. 세계는 그들의 감각이 반응하고 침투하고 이해하는 만큼 깊고 넓어졌다. 열려진 만큼 자기를 버리게 되고 변형하며 더 낮게 몸을 낮추고 기도했다. 이미 누군가가 뒤따를 자신들을 위해 그렸던 그림, 그 기반 위에 자기가 경험한 그 세계를 겹쳐 그리고 세계를 재구성하며 타인을 위한 세계의 출현을 도왔다.
예술, 마주치는 감각의 기록
수렵채집인의 끝없는 걷기는 ‘버리기’에서 시작된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 버리기가 필요했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버리고 두고 떠날 수 있는 것들만 한시적으로 소유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서 끝없이 걷는 존재에게 걸었던 길에서 얻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길 위에서 어떤 낯선 환경조건을 만날지 모르고, 그 환경에 즉각 적응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도구와 기술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오랜 시간 공유된 지식을 재구성하는 기억과 상상력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내던 그들에게는 행위로써 기억된 신체가 있었고 그 신체에 의해 경험될 또 다른 세계가 무한히 있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끝없이 걸었던 고대인들에게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은 매 순간 감각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먹거리와 별미 식물들이 넘쳐났겠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굶어 죽던지, 동물 밥이 되던지 얼어 죽었을 것이다.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때에 따라 독을 약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자가 살아남았다. 자연의 모든 행위자에 주의력을 집중하고 관찰해서 그들의 연관성을 알아내고 대처하는 일은 생존과 직결되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가벼운 몸으로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향해 걸어가는 자들의 예술이다. 암각화 그림들은 땅과 바다, 여기와 저기, 나와 너, 삶과 죽음의 관계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상관되고 연결되어 단절되지 않은 두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을 먹여 살린 고래와 동물들, 도구들이 그들과 한 몸인 바위에 새겨져 재생을 기다린다. 육지와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반구대 암면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고, 두 세계가 마주치는 장소다. 그 합일의 장소에서 고대인들은 자기를 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된다.
고대인들에게 자기 신체의 모든 행위가 신을 닮은 행위였다. 그들은 자기 삶의 물리적 현실과 상상적 세계를 엮어 새로운 세계를 조합하며 예술로 구현한다. 자연을 보살피는 신의 마음으로 공유된 기반 위에 자기 경험을 덧입혀 삶의 무늬를 짠다. 따라서 그들에게 예술은 기억과 상상을 통해 모든 시간과 공간을 엮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모든 행위자들의 시간과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행위자들을 연결한다. 반구대 암각화의 겹쳐진 그림은 기반을 존중하고 그 위에 덧붙여진 삶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전체성과 함께 보는 공유의 감각이 있었다. 공유를 통해 상상력이 재구성될 때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존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 본 천전리 암각화는 무언가 다르다. 누군가에 의해 그림이 고의로 훼손되어 있다. 각석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또한 누군가의 손으로 글자 하나하나가 쪼아져 있다. 자기 그림을 위해 이미 새겨진 그림을 쪼개내고 파헤치는 사람은 바위를, 그 위에 그린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두 암각화를 비교하면서 나는 관계 맺음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반구대 암각화 예술가들은 주변환경과 돌, 자신에 대한 깊은 관계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세계를 깊은 전체성으로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까지 인정하는 초자연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자연은 언제나 자기와 동일시되거나, 나의 일부분이었다. 예술은 그런 동일시된 감각들의 소통 이야기였다. 반구대 암면을 둘러싼 장소와 고래와 나의 행위가 그곳에 새겨지며 기억된다. 그날 그 장소에 있었던 모든 행위자들의 마주친 감각을 새겨넣으며 그 일은 내면화된다. 고대인들의 감각은 나와 다른 존재를 구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감각으로 이어져 있었다. 자신들 손이 돌과 접촉할 때 그 돌도 자기 손을 만졌다. 자신들의 감각이 돌을 만질 때 만지는 기관과 만져지는 기관이 동시에 작용하며 대화한다. 만물의 대화는 그렇게 언제나 동시적이고 즉각적이다. 예술은 모든 존재가 동시에 작용하고 변형되는 그 합일의 순간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모든 감각이 배제된 ‘보기’가 있다. 모든 감각이 단절된 채 눈으로만 보는 형상은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다른 존재의 행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대화하지 않는 방식이다. 일방적 ‘보기‘의 형식에서는 나와 사물이 하나가 될 수 없다. 내가 돌을 만질 때 돌도 나를 만진다는 감각을 알지 못하면 서로의 감각을 전달할 수 없다.
자신과 만나는 감각적 질료와 대화하지 못하고 일방적 관계만 남을 때 우리는 상상하는 능력을 잃는다. 그것은 바위를 자기 힘으로 찍어누르고 훼손하게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현대 예술은 예술가의 관점보다 고객의 관점에서 개별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예술품이란 예술가에게 주문하는 것이 되었다. 고객의 취향과 시선을 재현하는 것이 예술이 됐다. 똑같은 자기를 재현하는 초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관계를 지워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보기’ 위해, ‘보여주기’ 위한 예술이다. 나를 감각하고 있는 존재에게 나의 감각이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기도‘가 담기지 않는다.
걷는 자의 예술은 상상력에 의해 드러나는 감각의 마주침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것은 없던 세계가 드러나는 영감(靈感)의 세계, 신성한 세계의 표현이었다. 자연의 모든 행위자가 공유하는 성스러운 감각을 포착한 순간 신이 현현하는 느낌을 기억하고 남기는 행위였다.
감각을 깨워야 산다
나는 『빙하 이후』로 끊임없이 걷던 고대인이 어떻게 빙하 이후 살아남게 됐는지 보았다. 걷는 것은 곧 도구로서의 신체의 감각 영역을 넓히는 일이었다. 감각의 마주침을 위한 힘의 발산이었다. 마주침으로 인해 생각이 떠오르고 상상력이 커졌다. 그것이 그들을 극한의 조건에서도 생존하게 했다. 만약 그들이 걷지 않았다면, 실패와 좌절의 순간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걷지 않는다면, 무감각에 머무르고, 마주침의 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류는 멈출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가는 법을 상상하지 못해 삶이 멈출 것이다.
수렵채집인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보기 위해 걸었다. 아직 내가 만지지 못하고 나를 만져보지 못한 존재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전체의 부분으로서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부분들을 만나러 나섰다. 상상의 세계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만나는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드러난다. 나의 감각을 깨우는 관계가 모두 신이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조건이다. 그들이 남겨둔 예술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를 위해서일지 모른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대인이 우리를 위해 ‘기도‘한 흔적이다. 감각의 연결을 기억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상상력을 통해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내가 반구대 앞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이유는 고대인이 가졌던 그 섬세한 감각 기능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장소를 그들처럼 신성하게 느낄 수 없고, 그곳에 그림을 새기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는 나에게 이야기한다. 살아남을 방법이란 잠자는 감각을 깨우는 일이고, 잃어버린 감각 기능을 되찾는 일이라는 것을 말한다.
나의 신체와 함께 자연의 신성을 떠올리고 빈곤해진 감수성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더 이상 자기 신체의 신성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의 신성 또한 경험할 수 없다. 나의 신체는 자연의 신성함에 열려있지 않다. 내가 자연과 우주와 하나라는 일체감으로 세계를 감각할 수 없다. 신성함은 이제 개인이 예술품을 주문하는 것처럼 개인적 체험이 되어버렸고, 그에 따라 믿는 신도 모두 달라졌다.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주던 자연의 보편적 신성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레비스트로스가 신체 체조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모순을 받아들이고 부딪히고 불균형 속에서 균형을 찾아 걸어보는 일이다. 그것은 나에게 인류학 공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