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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류학

 

 

[최종에세이] 벽돌에 갇힌 사자와 나

작성자
유나
작성일
2024-07-31 17:56
조회
163

빙하 인류학 / 최종 에세이 (수정) / 2024.07.31 / 손유나

 

벽돌에 갇힌 사자와 나

 

청금석 라피스라줄리처럼 찬란한 색을 내고, 유약을 발라 반짝거리며 빛나는 벽돌 패널에 장식된 거대한 사자상을 보고 있다. 사자상은 기원전 600년경 번성했던 신바빌리 제국이 벽돌로 쌓아 올린 웅장한 건축물의 장식이다. 바빌리 제국은 높이 14m, 너비 30m의 거대한 건물을 짓고 이쉬타르의 문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이쉬타르의 문에서 신년 축제의 집까지 향하는 800m에 이르는 길에 사자, , 황소 등 120개의 부조로 장식한 벽돌을 쌓아 행렬의 길을 만들었다. 이 중 사자 벽돌 패널 2점이 한국 메소포타미아 특별전에 전시되었다. 여기저기 빛바랬지만 당시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 사자를 보며 경탄이 아니라 사자에 대한 연민과 함께 탄식이 절로 흘러나오며, 그제야 빙하 인류학 세미나의 길잡이 존 러복과 함께 짧지만 긴 여정을 함께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빙하 인류학은 최후빙하극성기라고 불리는 빙하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부터 여정을 시작했다. 빙하 시대의 구석기 인류가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부터 서서히 따뜻해진 기후에 힘입어 농경과 정주로 대표되는 신석기로의 전환, 그리고 서기전 5000년 경의 문명의 탄생 직전까지의 길목을 둘러보았다.

주 교재 <빙하 이후>에서 길잡이 존 러복은 서기 7000년 경의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 초기 마을인 차탈회위크를 방문한다. 그리고 곡물통 옆에 놓인 앉아 있는 여인상을 발견하고 악몽을 꾼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당시 존 러복이 놀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심히 지나쳤다. 하지만 이제는 러복이 그토록 놀란 이유를 안다. 이 여인상의 여성은 옥좌 위에 앉아 양옆에 자리 잡은 표범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다. 풍만한 가슴과 튀어나온 배가 구석기 시대의 전형적인 여인상의 특징을 보여주지만, 동물을 복속시킨 듯한 모습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구도이다. 차탈회위크는 계급이 없는 평등한 도시였다. 하지만 이 여인상을 보면 인류의 세계관이 크게 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힘의 원천인 동물

구석기 시기의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동물이야말로 힘의 원천으로 인류는 동물 가면을 만들고, 새의 깃털을 달고, 동물을 모습을 흉내 내어 춤을 추면서 동물이 되는 방식으로 힘에 접속하였다. 동물이 지닌 역동하는 힘은 구석기인이 그린 동굴벽화에서 잘 드러난다. 울퉁불퉁하고 거친 표면에 그린 동물들은 입체감이 뛰어나고 벽에서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 생동감이 가득하다. 신비로운 영적인 힘이 가득한 동굴에 그려진 존재는 사슴, 들소, 말 등이고 인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따금 동물의 몸에 발은 사람인 걸로 보아 동물로 변신한 샤먼으로 추정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중석기에 접어들 무렵 동굴벽화에 인간 군집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했다.

동굴벽화 외에도 독일 홀레슈타인 동굴유적에서 발견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각품 반인반수의 사자상이 있다. 4만 년 전에 매머드의 상아를 깎아 만든 것으로 높이 약 30, 너비 5.6이다. 얼굴은 사자이고 몸은 사람의 몸으로 표현된 이 사자는 고개를 아주 살짝 치켜들고 입가에는 느긋하고 인자한 미소를 띄고 있다. 위협이 되는 적수가 없는 최상위 포식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이 흘러 넘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같이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허리께에서 주먹을 쥔 팔에는 가로줄이 새겨져 있어 다부진 근육이 연상된다. 정체를 인식할 수 있는 얼굴이 사자이고 하체는 인간의 모습인 걸로 보아 동물로 변신하여 자연과 교감하고 있는 샤먼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여기서도 힘과 접속할 수 있는 통로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 지니고 있다.

 

2. 생명력을 읽은 사자상

행렬의 길을 장식한 사자상은 야생동물 특유의 힘과 생명력을 뿜어내지 않는다. 반짝이는 청금색 배경에 노랗게 표현된 사자는 화려하다. 눈을 또렷하고 뜨고, 벌리고 있는 입에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이 사자가 위험한 맹수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뿐이다. 누군가 빗질이라도 해준 듯이 잘 정리되어 몸쪽으로 갈무리된 갈기와 네 다리를 모두 땅에 붙이고 차분히 걸어가는 모습, 예의를 차리는 듯 너무 낮게 쳐지지도 높게 치켜들지도 않은 꼬리는 야생의 힘을 발산하는 동물이 아니라 잘 훈련된 사자로 보이게 한다. 사자가 가진 충만하고 넘치는 생명력이 벽돌에 갇혀버린 듯했다.

달라진 동물의 위상을 더 명확히 드러내는 비슷한 시기의 작품이 있다. 기원전 약 7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이다.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5.5m 높이로 조각되었고, 인물은 우르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라고 추정한다. 왕은 눈을 부릅뜨고, 풍성한 수염과 우람한 팔다리 근육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왕은 한쪽 팔로 사자를 고양이 안 듯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채찍과 비슷해 보이는 의례용 무기를 들고 있다. 왕에게 안겨 있는 사자는 왕의 다리 한쪽에 지나지 않는 크기에, 버둥거리는 듯한 발 모양새, 한쪽 앞발을 왕에게 꽉 잡혀 있는 모습이 완전히 제압당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반인반수의 형태도 변한다. 기원전 850년 경 아시라아의 왕궁을 지키는 전설상의 동물이 있다. 돌을 통으로 깍아 조각된 라마수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은 사자 또는 황소이고 날개가 있다. 수수께끼로 유명한 동물 스핑크스도 암사자의 몸에 얼굴은 인간이다. 과거와 달리 사람들은 동물의 뛰어난 신체를 빌려올 뿐, 본질은 인간이고자 한다. 이제 힘의 원천은 동물에게 있지 않다.

 

3.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 왕

영험한 힘의 원천이던 동물이 힘을 잃었다면 그 권력은 누구에게로 갔을까? 메소포타미아 특별전에서 권위 있는 존재는 인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다. 어떤 왕의 두상에 대한 설명글에 관만 바꿔 씌운다면 신과 왕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인간은 동물의 탈이 아닌 관을 쓴다. 신조차 의인화 되었고, 신과 닮은 왕이 위엄있는 자세로 조각된다. 위엄을 표현하는 방식은 튼튼한 팔, 큰 눈, 얼굴을 뒤덮은 수염, 크고 윤곽이 뚜렷한 근육, 특정한 옷과 머리 장식 같은 것으로 정형화되어 개인 식별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왕이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문자로 이름을 새겼다.

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등장하더라도 주제는 다르지 않다. 결투에서 패배하여 목에 베이는 사람, 바닥에 쓰러진 적군, 포로를 데리고 가는 병사, 왕에게 조공을 바치러 온 사절단 등 영광과 승리로 가득 찬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 시각화한 권력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건 비단 예술품만이 아니다. 문명이 만들어낸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건축물 또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한다. 사자 패널에서 쓰인 벽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중요한 건축 재료였다. 석재가 드물었기 때문에 충적토와 진흙을 섞고 동물의 배설물이나 겨를 더해 태양 아래에서 건조해 단단하게 말렸다. 틀에 찍어 대량으로 생산한 벽돌로 대형 건축물들을 짓고 거대한 도시를 형성하고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지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인간의 오만과 타락의 상징으로 나오는 바벨탑이 이 바빌리 제국의 건축물이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남긴 기록으로는 바벨탑으로 추정되는 지구라트는 가로 세로 각각 90m, 높이 98m의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바벨탑은 한때 전설의 건축물이었으나 설계도면이 그려진 석판과 비슷한 크기의 구조물이 발견되면서 실제했다는데 무게추가 기울고 있다.

 

5. 위대함의 그림자

메소포타미아전에서 본 작품은 하나 같이 나는 위대하다!’고 외치는 듯했다. 자신의 권력을 다른 존재에게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예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후대의 우리는 평범한 인간의 힘을 넘어선 고대 문명의 위압적인 건축물을 보면서 감탄한다. 어쩌면 왕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위대한 왕의 이름과 업적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강한 자의 자기 과시 속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사라진다. 한 존재가 특별히 위대한 만큼 다른 사람과 동물은 하찮은 존재가 되고, 잊히고, 생명조차 경시되어 버린다. 그리고 힘으로 이 모든 야만이 정당화되어 버린다. 사냥하는 동물에게조차 예를 지켰던 구석기 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언뜻 보면 구석기에서 문명으로 가는 과정이 인간 정신 구조의 발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타의 구분이 없이 인간과 동물이 경계를 넘나들고 세상을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는 신생아의 정신에서, 개인의 고유한 자아가 생기고 남의 눈을 의식하여 문화를 이룩하는 과정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른 존재를 짓밟고 위엄을 세우는 문화가 어찌 성숙한 문화라 할 수 있을까.

 

6. 갇혀버린 인류

다시 처음의 이쉬타르의 문과 화려한 행렬의 길을 떠올려 보자. 이 길을 닦고, 높은 건축물을 짓고 장식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지 상상해 보라. 과연 누가 이런 고역을 기꺼이 감당하려 했을까? 결국 노예나 전쟁포로 혹은 힘이 약한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세미나의 부교재인 <농경의 배신>에서 저자 제임스 스콧은 과거 문명이 높은 성벽을 쌓아 올린 것이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보다 더 주요한 목적은 세금과 강제노역에서 도망치려는 백성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파한다. 벽돌에 갇힌 자는 사자뿐 아니라 국경이라는 성벽에 갇힌 인간이기도 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왕의 폭정에 시달리지 않는다. 하지만 갇혀버린 자들이라는데는 변화가 없다. 양태가 달라졌을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인간은 인간이란 범위를 넘어선 힘과 접촉하는 능력과 다양한 것과 관계 맺는 능력을 상실했다. ‘인간을 넘어선 힘을 알지 못하니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고, 다양한 것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 가질 수 있는 좋은 것은 돈, 이 하나에 집중된다. 상대와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바꿔말하면 상대를 도구이자 이용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존중받지 못하고 도구화될까 언제나 불안하고 남들보다 우위를 차지하려고 끝없이 경쟁한다. 인간의 한계를 알고, 다양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면 권력이 제시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회에서 북미 원주민의 삶의 방식을 볼 기회가 있었다. 체로키족의 어느 사람이 문명인들은 마음에 안 드는 식물은 잡초라 부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잡초란 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풀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목적을 갖고 나왔다. 쓸모없는 풀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다고 한다. 권력의 중점 왕에서 벗어나 모두가 목적을 가진 소중한 존재라면 우리의 불안은 줄어들 것이다.

 

빙하 인류학 6개월간의 여정 끝에, 내가 몸담은 문화와는 다른 구석기 문화를 공부하면서 내가 피부처럼 느끼는 전제와 사고방식이 얼마나 낯설고 이상한 것인지 깨달았다. 정주와 농경으로 대표되는 신석기 혁명과 중앙집권 국가의 탄생은 필연도 진보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그리고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 내가 힘이 세다고 다른 존재를 이용하고 착취해서는 안 된다. 구석기 인류는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만물과 평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문명 시대의 인간은 자신들만이 특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가장 힘이 센 자가 왕이 되었다.

동굴벽화를 그리던 구석기인과 현대의 우리는 모두 같은 정신 구조를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석기인처럼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한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가질 수도, 권력을 찬양하고 자신의 위대함을 세상에 과시하고자 하는 사람도 될 수 있다. 19세기까지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북미 원주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지금도 세상에 존재하는 수렵채집민들의 사상과 문화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벽돌에 갇힌 사자는 반짝이는 벽돌에 조각된 화려한 몸을 가지고 사람들의 경탄을 받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의 위에 있는 왕은 얼마나 대단한가. 나는 구석기인들이 갖추었던 만물과 교감하고 존중하는 삶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나는 왕이 되어 모두의 경탄을 받고,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도구 삼아 휘두르고 싶다. 하지만 구석기인의 만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아무도 특별하지 않고, 그래서 나 자신도 특별하지 않다.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벽돌에 갇힌 사자를 보며 묻게 된다. 빙하 인류학을 따라 다른 문화를 공부한 맨 끝에서 내가 마주한 질문이다.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특별한 존재이고자 하는 욕망을 떨쳐낼 수 있는지, 내 한 몸 편하려고 다른 존재를 경시하는 마음을 깨고 나올 정도로 간절한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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