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빙하 이후(9)] 문화적 장벽
빙하 이후(9)/240702/강평
문화적 장벽
다른 상상력
『빙하 이후』를 읽으며 구석기인들의 흔적과 그 흔적에 대한 해석을 공부했다. 아주 드문 흔적이 남았고, 해석의 숙제를 많이 남겼다. 이번 주말 아파트 단지마다 가득 쌓인 버려진 가구, 전자제품, 재활용품, 쓰레기더미와 대비를 보인다. 차고 넘치는 것들 사이에서 남겨진 귀중하고 미세한 흔적들을 더듬더듬 따라가본다. 보이는 것의 이면, 보이지 않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간 중요한 것은 다 놓치고 보던 것만 봐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석기인들은 문자를 남기지 않았고 그들의 생활상을 짐작케 하는 돌, 나무, 뼈로 만든 도구, 옷, 그리고 암각화, 벽화 등의 예술품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대충, 보던대로만 보면 지금의 첨단의 전단계로, 조악한 것이라거나 가끔 그 시대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교한 몇 가지 놀라운 유물이 있는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주먹도끼, 옷, 암각화를 자세히 공부하면서 깜짝 놀랄만한 해부학, 자연학 지식, 은근과 끈기가 겸비된 수련이 빚은 기술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석기인들은 적어도 문명인들이 가리키는 ‘야만’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다. 신석기인이 출퇴근하는 노동자라면 구석기는 비정기적으로 일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연마하는 기술자의 상(像)이다. 스티브 마이든은 신석기로의 이행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우연과 환경 조건과 인간의 반응이라는 원인과 결과가 실타래처럼 얽혀서 만들어진 것이 역사라고 한다.
익숙한 효율, 생산성과는 다른 상상을 상상력의 ‘범위’를 넓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빙하 이후』를 읽고 다른 상상력은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범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스티븐 마이든의 화자 러복은 멀쩡한 집을 깔끔하게 청소한 후 고의적으로 파괴하고, 굳이 천장 없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추위와 바람을 견디고 사생활을 아예 없앤 뒤, ‘놀랍게도’ 예전에 있던 집터에 다시 ‘똑같은’ 집을 짓는 선사시대 사람들을 본다. 이에 이 장면이 연출된 자그로스 산맥에서 ‘문화적 장벽’을 느꼈다는 소감을 말한다(525페이지). 왜 하필, 굳이, 그럴거면 왜라는 꼬리를 무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예전 집터에 다시 지은 집은 러복이 보기에는 외관상 똑같은 집이지만, 선사인들에게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집이었을 것 같다. 러복이 보기에는 ‘삽질’같은 무의미하고 ‘고된’ 일이었지만, 정작 선사인들은 ‘만족’한다. 러복과 선사인들의 상상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인 것 같다. 서로를 서로의 생각을 상상하기 어렵고 그 사이에는 ‘문화적 장벽’이 있다. 편안한 집이라는 기준점이 분명한 러복과 청소, 파괴, 견딤, 다시 준비, 건축하는 과정에서 가진 것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든 떠나고 만들 수 있는 예행연습이라도 한 것일까.
가난한 청년
나카자와 신이치가 『곰에서 왕으로』에서 말하는 신화를 두고 인간이 곰이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모피를 입고 털가죽을 구하러 가는 사냥꾼들은 모피 몇 장이라는 양적 비교,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는 자기 중심을 굳건히 하는 사고의 ‘방향’을 밝힌다. 따뜻한 모피를 ‘많이’ 획득하는 것이 ‘문명’이다. 아무 때나 ‘다다익선’을 진리처럼 말한다. 이를 위해서 마구잡이로 사냥하고 사체를 함부로 다루고, 필요한 부분만 쓰고 나머지를 버린다. 하지만 신화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생존에 필요해서 부득이 얻는 동물이라면 ‘최소한의 양’을 취하고 ‘예’를 갖추고,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는 것은 ‘야만’이다. 신화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동물에게 ‘예’를 다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다른 상상력이란 상상력의 범위가 아니라 방향이다.
함부로 남획하는 것에 테러로 맞서는 상황에서 중재에 나선 것은 가난한 청년이다. 왕년의 잘나가는 사냥꾼이 아니라 그 탐욕의 물에 발을 담근 적 없는 청년, 금욕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등 따시고 배부른 자는, 배고프다는 이에게 라면을 먹으면 되지라고 반문하게 된다. 마치 한번도 굶주린 적 없는 것처럼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남 이야기로 듣게 된다. 조금 억지스러운 연결일 수도 있지만, 자그로스 산맥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청소하고 파괴하고 여러 날을 맨 땅에 지낸 경험이 어쩌면 언제나 가난한 자로 살기 위한 의례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빔베트카 벽화
벽화가 그려진 곳은 낮은 산이지만 경사는 꽤 있으면서 가시 돋친 산림으로 접근이 쉽지 않은 장소이다. 기어서 갈 수 있는 작은 길, 또는 서서 지나갈 수 있도록 일부러 머리 높이까지 석기를 이용해 나뭇가지를 잘라놓은 곳에 있다. 마트팔은 유럽 벽화와 달리 빔베트카 벽화가 모든 이가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그려져 있어 사적 예술이 아니라 공적 예술이라고 한다. 또 그려진 동물과 사람도 영적이라기보다 세속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낮은 산이기는 하지만 가파르기도 하고 나뭇가지가 가로막고 있어서 접근이 쉽지 않았던 환경이라는 설명과 쉽게 볼 수 있는 공적 예술이라는 점은 다소 배치되는 설명처럼 느껴진다. 다만 라스코는 캄캄하고 좁은 동굴이고 유독한 가스도 나오는 것에 비하면 접근도가 쉽다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은 든다. 그림이 세속적인 모습이라는 것도 이해가 어려워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동물 사육의 흔적
힌두쿠시 산맥에서 발견된 고고학 퇴적층 분석 결과 소, 양은 시간이 지나면서 크기가 작아지고 염소와 가젤의 뼈는 크기가 일정했다고 한다. 소, 양은 사육되고 가젤은 야생에 머물렀다는 것을 반증한다. 가젤은 단체 생활을 견딜 수 없어 가축화에 실패했다. 사육되면 크기가 작아진다. 염소, 개 사육의 흔적도 같이 발견된다.
매를 길들여서 사냥에 이용하는 이야기는 들어봤다. 독수리도 길들일 수 있을까. 자그로스 산맥에서는 독수리를 길들여 사냥의 도우미로 쓰는 장면이 나온다. 세계테마기행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어린 독수리를 둥지에서 빼와서 묶어두고 훈련 시키는 장면이었다.
도시와 교역과 함께 하는 문명
문명의 정의는 무엇일까. 스티븐 마이든은 인류 역사상 첫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이란 기념건축물, 도시 중심지, 광범위한 교역, 산업 생산, 중앙집권, 팽창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인류사회라고 한다. 소규모 집단이 아니라 도시화와 교역을 특징으로 한다. 구비전승으로는 대규모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문자’도 같이 등장한다. 마이든은 러복을 통해 이 도시화와 교역의 문명이 시끄럽고 연기가 자욱하고 쓰레기 냄새가 진동해서 떠나고 싶은 암담함으로 느낌을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