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빙하이후] 유골이 묻힌 생활 공간
빙하 인류학(23) / 빙하 이후 / 2024.07.02 / 손유나
유골이 묻힌 생활 공간
서기전 6400년. 야림 테페(Yarim Tepe)의 마을은 사람들의 일상 활동으로 북적북적하다. 토기를 빚고, 교역자와 흥정을 하고, 사람이 기르는 개도 돌아다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이 마을은 까마득한, 왠지 나와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은 선사시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대신 굉장히 친숙하고, 그저 아주 오래전 먼저 존재했던 과거의 마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친숙한 마을에서 정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한 가지가 있다. 건물의 여기저기에 사람의 유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야림 테페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다실을 가진 직사각형이며, 때론 소도시 안에서도 서로 군집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상당히 다른 건물도 있다. 몇 미터 지름의 둥그런 건물로 흙벽과 나뭇가지로 분구형(돔) 지붕을 만들었다. … 러복은 부분적으로 잘린 젊은 여성의 시신을 여러 사람이 지붕에서 전달하여 둥그런 건물 바닥에 놓는 것을 본다. … 메르페르트와 문차에프의 발굴에서는 바닥 아래, 벽 사이, 구석, 조용한 곳과 집의 구멍 등 여러 곳에 어린이들의 뼈를 밀어 넣은 양상이 드러났다. … 그러나 이런 성인뼈는 전체를 대표한다기에는 너무 수가 적었으며, 아마도 소도시 밖에서 장례가 치러졌으리라 생각된다. 어린 시절 죽은 이는 고고학자들이 발굴 상자에 넣어 박물관으로 옮길 때까지 집 안에 그대로 묻혀 있었다. (538~539)
서기전 9000년 경 예리코와 괴베클리테페 마을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무덤은 바닥 아래에 있든지, 집 구조물 아래에, 벽 사이에, 그리고 탑 안 등 어떻게든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 케년이 제단으로 생각했던 구조물 아래에는 구덩이 안에 유아 두개골 다섯 개가 있었다.(90)”
야림 테페, 예리코, 괴베클리테페는 지역이 비교적 가까운 편이라 같은 문화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원전 6000년 경 유럽 동남부 레펜스키비르 마을에서도 집 안이나 화덕에 어린 아이 시신을 매장하는 모습이 있었다.(216) 과거 사람들은 죽음과 매장을 현대인보다 가깝게 생각했다. 집 안에 시신을 매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거지와 매장지의 위치가 상당히 가깝다.
유골을 집 바닥에, 벽 사이에 묻는 것과 현대인도 종종 행하는 집 안에 위패를 모시는 행위 동일 선상의 이야기일까? 모든 유골을 건물 안에 두지는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 선택된 것일까? 이 역할은 일종의 희생이었을까 아니면 영예로운 일이자 축복이었을까? 하지만 왜 뼈를 주거지에 묻어 함께 생활했는지, 죽음이 그들에게 꺼림칙한 일은 아니었는지, 죽고 난 후의 재탄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많은 궁금증이 인다.
나는 생명이 죽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작물을 성장시키는 흙을 신성시하는 농경 문화권의 영향일 것 같다. 사냥을 하는 수렵채집민에게는 뼈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과 재탄생의 의미가 농경 문화권과 수렵 문화권에서는 다를 것 같다. 흙으로 돌아간다면 것은 이전 삶에서의 인과를 끊고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라면, 뼈가 남아 있다면 그 뼈에 살아 돋아나는 느낌으로 개체성이 유지된다. 농경문화와 수렵문화는 죽음과 재탄생을 다르게 인식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