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빙하 이후] 세속화된 사람들
『빙하 이후』 인도를 가로지르는 길
세속화된 사람들
2024.7.1. 최수정
밤베트카(Bhimbetka)는 인도 전역에서 가장 많은 바위그림이 있는 곳이다. 지역 주민은 사악한 영혼이 한 일라고 여기는데, 이는 그들이 ‘영혼’의 개념을 믿는 애니미즘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이다.
“홀로세의 수렵채집민은 연중 대부분 시간을 바위가 많은 반디야에서 보내면서 여름철에 식량과 물을 찾아 갠지스 평야에 왔었지만, 이제 이곳에서 정주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500쪽)
영혼을 믿는 수렵채집민에게 바위는 어떤 곳일까? 바위와 함께 살고 바위 곁을 떠나지 않으며, 돌로 만든 도구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닌 그들에게 바위는 무엇일까? 흑요석이라는 돌을 얻기 위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걸어 교역을 떠나는 그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신성과 세속의 구분이 없다
인류에게는 바위 곁에 사는 것과 평야에 사는 것 사이에 어떤 관념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애니미즘 세계에서는 바위 절벽과 숲이 있는 고요하고 엄숙한 장소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그들에게 바위, 동굴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죽음처럼 보이지 않는 실체가 거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어두웠던 그곳이 빛에 의해 일렁이면 바위 면에 어떤 살아 있는 형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그 움직임을 동굴 벽이나 바위의 표면은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영’들의 체현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표면을 가진 물체로서의 ‘바위’ 면이 움직이는 어떤 존재를 품고 있으며, 그 존재를 손으로 불러내기 위해 형상을 그렸을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아비 바르부르크 『뱀 의식』에서 동물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그 동물의 형상과 힘을 불러내는 주술적 행위와, 사냥꾼이 사냥을 위해 사냥할 영혼을 불러내어 되새기며 덫을 만드는 일이 떠오른다.
서기전 11,000년 러복은 자위체미 샤니다르(Zawi Chemi Shanidar) 수렵채집민 주거지에 들어선다. 계곡 너머에는 참나무와 피스타치오 나무로 이루어진 스텝 산림지대가 있고 사람들은 씨앗을 채집하고, 산양을 사냥하고 역청과 흑요석을 얻기 위해 먼 길을 나선다. 그리고 황혼이 내릴 즈음 남자와 여자들은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독수리 날개를 단 사람도 있고, 산양 가죽을 뒤집어 쓴 사람도 있다. 이들이 추는 춤은 염소와 독수리의 먹고 먹히는 사냥 장면을 극화한 것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신성함과 세속 사이의 구분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었다.
러복은 이 시대의 동굴을 수렵채집민의 ‘쉼터’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선사인들의 혹독한 일상의 쉼터이기도 하지만, 삶의 쉼터, 즉 죽음의 거처이기도 하다. 선사인들에게는 삶과 죽음 신성과 세속이 언제나 연속된 하나였다.
세속적인 그림 속 사람들
러복은 밤베트카 바위그림에서 점점 수렵채집이나 야생 동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본다. ‘영’적이라기보다 어딘가 세속적인 모습의 그림들이다.
인더스 평원에 농경은 밀과 보리, 염소, 흙벽돌집과 함께 한꺼번에 들어왔다. 서쪽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민이 들어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곡물과 염소에 의존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농경민의 아내가 된 젊은 여성들은 농경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믿으며 기꺼이 수렵채집 생활을 버리고자 하였다.
서기전 5500년 즈음 어린아이의 무덤방에서 구리 염주 여덟 개가 나온다. 염주는 구리 광석을 가열하고 내리쳐 얇은 판으로 만든 다음 가는 선으로 말아서 만든 것이다. 또한 그 염주 가운데 목화 조각이 확인되며 섬유를 만들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은 소를 이용해 밭을 갈고, 운반하며 우유와 고기를 얻었다. 토기를 생산했다. 토기는 전시하고 방문자에게 과시하는 데 적당하였다. 서기전 4000년이 되면 토기가 물레를 통해 대량생산된다. 진흙과 뼈로 인장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교역이 갈수록 중요해졌으며, 사적 소유와 내밀함, 부라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했음을 시사한다.
인도 중부는 농경의 용광로 같은 곳이다. 특히 서기전 5000년 이후 중국 남부에서 재배 벼까지 들어온다. 서기전 3000년까지는 인도 남부로 농경이 확산되지 못했으며, 주로 소를 기르는 형태였을 뿐이다.
케르메즈 데레(Qermez Dere)라는 수수께끼 같은 마을
케르메즈 데레의 사람들은 잘 먹고 건강하게 산다. 사냥할 동물과 채집할 식물성 식량이 있는 언덕과 평원 사이의 살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다리를 타고 벽과 바닥으로 내려간 움집 안은 흙으로 만들어 석회를 바른 네 기둥이 있다. 마치 사람의 어깨와 팔이 잘린 모습을 묘사한 듯하다.
그런데 어느 봄날 두 여성이 방을 깔끔히 청소한 뒤에 고의적 파괴에 들어간다. 상당한 거리에서 파 온 흙으로 방을 메운다. 남은 것이라곤 갈판과 바구니, 도구들과 폐기물, 화덕자리, 매트 몇 장뿐이다. 간단하게 나뭇가지로 지은 움막과 바람막이 정도로 바람과 추위를 견딘다. 이렇게 사생활이 사라진 삶에서 사람들은 사냥하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잠을 잔다. 그리고 가을이 오자 새로운 집을 다시 짓는다. 이는 마치 이들이 계절적 주기에 따라 주거지를 옮기는 의례를 시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러복은 이들의 생활상이 규모는 다르지만 괴베클리테페와 비슷하다고 본다. 이런 유적과 사회가 나타나고 결국 신석기 시대의 세계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여기서 봄의 씨앗 심기의 모티브가 떠오른다. 씨앗이 땅속에 묻혀 다시 싹을 틔우듯이 ‘들소의 고깃덩어리, 야생 밀 한 줌, 잘 만들어진 가죽 옷, 돌을 갈아 만든 염주 한 꾸러미, 마지막으로는 뼈로 만든 바늘’을 흙에 묻힌 집에 던지는 것은 살을 땅속에 묻어 재생을 바라는 의식처럼 보인다. 특히 러복이 야림 테페 마을에서 ‘부분적으로 잘린 젊은 여성의 시신’(538쪽)이 그녀가 생전에 소유했을 생활용품과 함께 묻히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문명으로 다가가기
메소포타미아 도시는 서기전 3500년 즈음 문자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다. 서기전 11,0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놀라운 수렵채집 주거유적, 농경 마을과 소도시가 출현했으며, 교역망이 확장되고 혁신적 기술과 새로운 종교 관념이 나타난다. 서기전 6000년 즈음이 되면 메소포타미아에는 농업공동체가 번성하면서 도시생활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나아갔던 것이다.(517쪽)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서기전 6500년 즈음에서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새로운 규모의 인간사회가 발달한다. 신자를 평원 남쪽에 있는 움 다바기야(Umm Dabaghiyah)라는 마을은 이런 경제 성장의 산물인데,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방에 ‘여성 가슴이 잘린 모습을 표현한’ 그림에서 수렵채집민의 여성상이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움 다바기야는 사냥감이 풍부한 곳이었다. 이런 생활환경에 따라 이곳은 전문성을 지닌 교역의 장소였던 것 같다. 사냥꾼들은 털과 가죽, 발굽, 고기, 기름을 주고 마을 주민과 방문한 교역자들에게서 곡물과 원석을 교환한다.
러복은 야림 페테에서 토기를 빚고 석기를 만들고 바구니를 짜는 전문 장인을 만났다. 또한 끊임없이 들어오는 교역자들이 양털과 흑요석 돌날의 값을 두고 언쟁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교역이야말로 문명의 번성과 기술 혁신, 문화적 통일성의 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