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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세계 끝의 버섯(3)] 3부 교란, 의도치 않은 디자인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4-12-09 17:20
조회
91

세계 끝의 버섯(3)/241209/강평

 

교란, 의도치 않은 디자인

 

교란, 풍경

3부는 교란이다. 교란은 무엇인가? 교란하면 인위적, 목적적, 파괴적 행위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교란은 이와 거리가 멀다. 애나 칭은 교란은 손상이 아니며 나쁜 것도 아니고 항상 인간에 의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284페이지). 교란 이전에는 조화로운 상태였다는 전제가 없다(285페이지)라고도 한다. 교란은 생태계에 명백한 변화를 야기하는 환경 조건의 변화다. 홍수, 산불은 교란의 형태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 또한 교란을 야기할 수 있다. 교란은 생태를 파괴할 수도 재생시킬 수도 있다. 교란은 규모 등 여러 요소에 따라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결정된다. 숲의 나무가 쓰러지는 것은 사소한 규모이고, 쓰나미는 핵발전소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교란이다. 교란은 새로운 풍경의 배치를 가능케 하면서 변형을 가능케 하는 마주침이 발생하도록 그 풍경을 개방시킨다.

애나 칭은 책 시작 부분에서 숲바닥 아래’, ‘버섯을 생산하기 훨씬 전부터’, ‘드러나지 않은 협업을 이야기한다. 프롤로그에서는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산책을 말한다. 이와 연장으로 3부는 숲에서 조심스럽게 걷다 보면 훼손된 숲에서조차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발밑의 존재와 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지상의 존재를 포함하는 생명의 풍부함을 느끼게 된다숲의 삶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라 참여자 중 하나로 이야기한다. 일례로 일본 토종 딱정벌레와 외부에서 유입된 소나무 재선충의 이동 경로를 통해 일본 숲의 풍경이 바뀐다. 풍경에는 인간 이외에 많은 동식물이 있다.

애나 칭은 배치를 이해하기 위해 배치가 존재하는 개별 방식을 주시함과 동시에 산발적이지만 그 결과로 발생하는 조율을 통해 그 선율들이 어떻게 합쳐지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280페이지)’라고 한다. 인간만, 소나무만, 버섯만, 재선충만 따로 볼 수 없다. 이 개체들이 교란하며 상호작용하는 숲이 풍경이다. 무엇이 교란인지 결정하는 것은 관점의 문제를 동반한다. 개미집을 무너뜨리는 교란은 개미와 인간의 관점이 다르다. 같은 종이라더라도 성별, 지역별, 소득별로 교란은 다르게 개념화된다. 따라서 교란을 산정하는 단일 기준은 불가능하다. 삶의 방식에 기반한 관점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무, 역사의 행위자

인간은 풍경의 주인공이 아닌데 왜 주인공으로 착각할까? 애나 칭은 나무가 역사의 행위자라고 한다. 근대 산림관리는 소나무를 지속 가능한 목재 자원으로서 자립적이고 등가적인 물체로 환원시킨다. 산림관리의 목표는 불확정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차단해 역사를 만드는 소나무의 능력의 제거하는 것이다. 소나무는 빛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늘진 곳에서는 경쟁에서 진다. 그 결과 소나무는 극한 환경에서 생존하는 전문가가 된다. 소나무는 추운 고원지대, 거의 사막화된 곳, 모래와 자갈 지대에서 생존하고 불에도 잘 적응한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은 소나무가 균근균(균근 곰팡이)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교란된 풍경 사이를 이동하면서 역사를 만드는데, 이는 오직 균근균과의 동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299페이지).

인간은 의도적으로 소나무를 심거나 의도하지 않고 제어하는 종류의 교란을 일으켜 소나무를 퍼뜨린다. 인간보다 소나무 씨앗을 더 멀리 퍼뜨린 포유류는 없다. 송이버섯은 바위와 모래를 분해하는 강한 산을 분비하고 소나무와 곰팡이의 상호 성장을 돕는 영양분을 발산한다. 송이버섯과 소나무가 함께 성장하는 풍경에서는 다른 곰팡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송이버섯과 소나무가 동맹을 맺으면서 함께 돌을 식량을 바꾸는 까닭에, 그들은 유기질 토양이 희박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한다.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교란된 풍경을 차지하면서 함께 역사를 만든다. 동시에 인간은 숲을 엄청나게 교란한다. 송이버섯소나무인간이 함께 그려내는 풍경의 궤적이다. 이것들은 서로 의도치 않은 디자인으로 서로를 경작한다(270페이지).

함께 만드는 풍경의 궤적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이 역사의 행위자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국가 주도의 근대 산림관리 떄문이다. 숲을 인간의 의도에 따라 영구적, 일정 주기로 생산되는 곳으로 만드는 기지로 만들면서부터이다.

애나 칭은 3부에서 말하는 교란을 시작점, 즉 행동을 위한 첫 단추로 삼는다고 한다. 교란은 변형적인 마주침을 위한 가능성을 재배치한다. 풍경의 패치들은 교란에서 등장한다. 그리하여 불안정성은 인간을 넘어서는 사회성에서 일어난다.

 

네버엔딩 부활

숲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는 파괴된 후 재생하는 것이다. 애나 칭은 이를 두고 회복 탄력성, 생태 복원보다는 부활로 생각하자고 한다. ‘부활은 다른 개념 대비 숲의 관점에서 온갖 역경을 이기는 숲의 생명력, 능력을 부각시키는 의미인 것 같다. 숲은 빙하, 화산, 산불, 그리고 인간의 모욕에도 부활했다.

최근 몇 년동안 강원도 해안을 중심으로 큰 산불이 몇 번 있었다. 산림청이 산불의 주범이라고 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산림청은 소나무를 강원도 지역에 집중 육성을 하고, 조림과 산불 진화를 위해 임도를 설치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소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잡목을 제거해서 나무 사이가 넓어졌고, 임도까지 설치가 되면서 불이 잘 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림청에서 애나 칭이 말한 교란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한 것은 조림과 산불 조기 진화 조치라는 인간 중심의 조처였던 것 같다. 나는 민가의 엄청난 피해가 생각나기도 하다. 이 책의 사례에 따르면 교란으로 인위적으로 불을 내기도 한 것 같은데, ‘산불=피해야 할 재해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도시와 유사한 산림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이후 강릉에 갔을 때 산 근처만 가도 아직 재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민둥산을 보며 화마의 흔적이라고만 생각했다. 이 책을 읽은 후라도 이를 두고 교란을 통한 부활로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마도 인간 중심적인 사고라서 그런 것 같다.

일본의 삼나무, 편백나무 사례를 보니,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생각난다. 소나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못생겨서, 그리고 인간의 교란 덕이다. 숲에서는 소나무참나무인간의 상호작용이 벌어진다.

일본 K교수는 자연의 지속 가능성은 절대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또한 끌어내는 인간의 작업을 통해 끄집어내져야 한다고 한다. 요시무라 후미히코는 산림 벌채, 즉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및 전쟁 기간 벌어진 숲의 교란을 중요시한다. 농민과 군대에서 다양한 사유로 나무가 잘려나갔다. 이후 소나무는 이 벌거벗은 풍경에서 전후 다시금 푸르게 바뀐다. 중국 윈난ㄴ성 중부의 소농민 숲은 불쾌할 정도의 어수선함에도 항상 개방적이며 일본 중부 소농민 숲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숲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소농민의 독창성 때문만은 아니고 대변동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일본 메이지 유신의 근대화와 중국의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구분한다. 하지만 애나 칭은 나무 입장에서 보면 이 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사람과 나무는 되돌릴 수 없는 교란의 역사에 갇혀 있다. 교란 이후에는 재성장이 뒤따랐다. 이러한 숲은 국가 주도의 산림 벌채와 같은 대재앙에 의해 작동되었다. 그러나 숲은 관점 또한 존재하고 온갖 모욕에도 부활은 아직 멈춘 적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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